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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 (행 20:4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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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 (행 20:40-47)


‘손수레’는 영어식으로 ‘리어카’라고도 하고, 일어식으로는 ‘구루마’라고도 합니다. 이 손수레는 둘 달린 바퀴로 손쉽게 물건을 운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바퀴가 크기가 같고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우는 쪽 방향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차이가 크면 계속 그 방향으로 선회하게 됩니다. 그래서 원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마치 교회가 이 손수레와 같습니다.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가 두 바퀴처럼 교회를 앞으로 이끌고 나갑니다. 그런데 이 두 교회가 서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모이는 교회란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드리고, 말씀을 나누고, 그리고 서로 교제하는 교회의 기능을 말합니다. 그리고 흩어지는 교회란 성도들이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일과 세상을 섬기는 교회의 기능을 말합니다. 이 교회의 두 모습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오늘의 한국교회는 이 균형과 조화가 무너져있습니다. 많은 교회는 모이는 교회라는 바퀴는 크고 튼튼한 데 비해 흩어지는 교회라는 바퀴는 상대적으로 작고 부실합니다. 또 어떤 교회는 모이는 교회는 빈약한데 흩어지는 교회는 활발한 교회도 있습니다. 이런 교회들은 건강한 교회로 교회다운 교회로 지속적으로 세워져가기 힘이 듭니다.

우리 상도중앙교회는 교회다운 교회를 지향하며 건강한 교회로 든든히 서가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해 왔습니다. 오늘 창립기념주일을 맞아 우리 교회의 모습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더욱 교회다운 교회로 건강한 교회로 든든히 서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교회는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가 각각 잘 세워져 가고 있는지 그리고 이 두 모습이 서로 균형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이는 교회

본문 2:46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가장 우선적인 특징은 성도들이 모이기를 힘썼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저들이 모이기를 힘썼을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께서 성도들을 교회로 모이게 하신 것입니다.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 강권하셔서 모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자연 물리 현상가운데 ‘구심운동’(求心運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원운동을 하는 물체가 회전 중심으로 나아가려는 운동을 말합니다. 이 구심운동이 일어나는 이유는 구심력(求心力)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원의 중심에서 물체를 잡아끄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세계에서도 이런 구심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교회로 모이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각종 교회의 모임에 나아가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영적 구심운동이 일어나는 이유는 역시 영적 구심력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성도들을 교회로 이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일차적으로 구심적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성도들이 교회로 교회로 모여듭니다. 바로 이것이 모이는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모이는 교회는 교회의 구심적 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왜 성도들을 교회로 모이게 하실까요? 오늘 본문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본문 4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이 말씀 속에서 세 가지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교회에 모여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로부터 말씀을 배웠습니다. 당시 신약성경이 기록되기 전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거나 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대부분의 성도들이 예수님을 만나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본 일이 없었습니다. 

사도들은 성령의 인도로 교회에 모여든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가르쳤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도록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교회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그리고 모여서 말씀 배우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모여서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의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져가야 합니다. 

둘째, 서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달랐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혈통적으로 유대인입니다. 나면서부터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자라면서 철저히 유대인 전통으로 양육 받았습니다. 그래서 혈통적으로나 전통적으로 저들은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혈통적으로 다양했습니다. 유대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이라고 해도 팔레스틴 땅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도 있었지만 타지역으로 이민 가서 살고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혈통적으로나 전통적으로 서로 너무 달랐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저들을 교회로 모으시고 서로 하나 되도록 교제하게 하셨습니다. 바로 코이노니아입니다. 서로 함께 하면서 성령 안에서 소통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를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너무 다른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단 하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 그것 밖에는 같은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생각이 다릅니다. 성격이 다릅니다. 서로의 입장이 다릅니다. 그래서 서로가 불편합니다. 자칫 함께 있으면 상처받고 다툼과 갈등이 일어날 소지가 넘쳐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의 띠로 묶어주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로 서로 모이기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부지런히 교제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셋째, 기도에 힘쓰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달랐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지키는 일에 힘썼습니다. 기도도 하긴 했지만 주로 기도문을 암송하는 형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자기들 힘으로 율법을 지키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보혜사인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을 받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라고 명하셨습니다. 실제로 주님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성령께서 저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성령 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저들이 모여서 기도에 힘쓸 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 기도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가 모이기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모여서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이렇게 초대교회 성도들은 교회에 모이기 힘썼습니다. 모여서 말씀 배우고 서로 교제하고 함께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러면서 저들은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져갔고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고 성령의 사람들이 되어갔습니다. 한 마디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교회에 모이기 힘쓰며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갔던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청년이 미국의 부흥을 주도했던 무디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지 교회에 열심히 출석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질 않았습니다” 무디가 대답했습니다. “그런데요 무엇이 문제입니까?” 청년이 되물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꼬박꼬박 주일예배를 지킬 필요가 있을까요? 그리고 그 많은 교회 집회에 열심히 참석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 때 무디가 난로 안에 활활 타오르고 있던 조개탄 한 개를 집게로 꺼내들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그 조개탄이 꺼지고 말았습니다. 청년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자는 조개탄과 같다는 뜻이죠? 함께 모여 있으면 큰 불을 일으키지만 혼자 떨어져 있으면 꺼져버리고 만다는 뜻이죠?”

그렇습니다. 우리가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 교회가 더욱 모이는 교회가 든든하게 서 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모이는 교회를 세워가는 데 앞장 서 주시기 바랍니다.

흩어지는 교회

본문 2:47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교회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또 하나 본질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가 성도들이 세상으로 흩어졌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저들이 흩어지게 되었을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주님께서 저들을 세상으로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교회에 모여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진 사람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나가 그 사명을 감당하라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세상으로 흩어져 주신 사명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자연 물리 현상가운데 ‘원심운동’(遠心運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원운동을 하는 물체가 회전 중심에서 멀어지려고 하는 운동을 말합니다. 이 원심운동이 일어나는 이유는 원심력(遠心力)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원의 중심에서 멀어져 가려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세계에서도 이런 원심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교회에 모였다가 세상으로 흩어지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흩어짐은 단순히 집으로 돌아가는 움직임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을 말합니다. 이 영적 원심운동이 일어나는 이유는 바로 주님의 보내심 곧 주님의 파송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원심적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주님의 파송을 받은 성도들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흩어지는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흩어지는 교회는 교회의 원심적 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왜 성도들을 보내시는 것일까요? 간단히 말하면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 복음 전파입니다.

마 28:19-2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만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한 마디로 말하면 세상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미국에서 고단한 이민생활을 하던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일주일 내내 열심히 일하고 주일에는 교회 봉사한 뒤 주일 오후면 전도하기 위해 길을 나섭니다. 어느 날 백인 저택 앞을 지나는데 계속 초인종을 누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인종차별이 심한 지역이어서 동양인이 전도한다고 초인종을 누르면 문도 열어주지 않을뿐더러 나오더라도 화만 낼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도 계속 누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그런데 세 번을 눌러도 답이 없었습니다. 돌아서다가 그래도 하는 마음으로 한 번 더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그 때 백인 노인이 나왔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그 한 마디를 하고 자기 전화번호가 적힌 전도지를 전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그 노인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만나자는 것입니다.

만나서 자초지종을 들었습니다. 이 노인이 너무 외롭고 사는 것이 힘들어 자살을 하려고 했답니다. 목을 매고 자살하려는 그 순간에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는 것입니다. 세 번 울릴 때까지 기다리다 가면 목을 매려했는데 네 번째 또 울리더랍니다. 그래서 나와서 전도지를 받아들게 됐답니다. 전도지를 읽으면서 죽기 전에 이 사람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전화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살려내라고 보내십니다. 이것이 흩어지는 교회의 사명입니다.

둘째, 사회봉사입니다.

눅 10:3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가서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웃사랑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국의 슈바이처, 바보 의사라 불렸던 장기려 박사는 최고의 의사였으면서도 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였습니다. 한 교회의 장로로써 예수님께 받은 이웃사랑의 사명을 잘 감당했던 분입니다.

6.25 전쟁 후에 모두가 가난했었습니다. 그래서 먹지 못해서 병이 든 환자들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병원장이었던 장기려 박사는 잘 먹기만 하면 그 병에서 호전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장기려 박사는 처방전에 다음과 같이 적어주었다고 합니다. “이 환자에게 닭 두 마리 값을 내주시오. 원장.” 이것이 약 처방이었습니다. 때로 병원이 이 돈을 지불해주지 않으면 그는 자기가 받은 봉급으로 그 돈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친구가 필요한 사람들 그들을 찾아 주님의 사랑을 몸으로 전하라고 보내십니다. 이것이 흩어지는 교회의 사명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 두 바퀴로 나아갑니다. 이 두 바퀴 모두 든든해야 합니다. 

우리 상도중앙교회가 지난 56년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이제 앞으로 더욱 교회다운교회로 든든하게 서 가야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선 더욱 모이기 힘써야 하겠습니다. 주일 예배에 모이기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각종 모임에 열심히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더욱 힘을 얻고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서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사명을 가지고 흩어지는 일을 힘써야 하겠습니다. 복음 전하는 일 더욱 열심히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일 더욱 힘써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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