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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중보자이신 예수 (딤전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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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보자이신 예수 (딤전 2:5-7)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습니다. 오래 전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 전학을 갔습니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친구들을 맞닥뜨리게 되었는데 저는 그 당시 장난이 아주 심했습니다. 현재 저의 근엄한 모습을 보시는 분들은 아마 상상하시기 힘드실 것입니다. 얼마나 장난이 심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3학년 담임선생님이 제 장난이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으로 저를 생활부장에 임명하셨습니다. 생활부장이 무얼 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생활부장이 된 다음에도 저의 장난기는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어린이회의 시간이었는데 한 학생이 손을 들더니 영준이는 불량식품을 사먹는 등 장난이 심하고 평판이 안 좋으니 생활부장의 자리에서 내쫓아야 된다고 탄핵안을 내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순간에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학생들이 옳소! 옳소!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의 저의 입장을 여러분이 상상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완전히 왕따가 된 느낌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제 마음 한구석에는 장난이 심하다고 생활부장에 임명할 때는 언제고, 장난이 심하다고 생활부장에서 쫓을 때는 언제냐. 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날 어린이회의가 끝나고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거의 다 집에 가고 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제 자리에 앉아있는데 아직 안 가고 있는 몇몇의 학생들이 저의 천사가 돼 주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담임선생님에게 ‘영준이를 생활부장의 자리에서 내쫓으면 안 됩니다. 영준이는 공부를 잘하고 말을 잘하기 때문에 내쫓으면 안 됩니다.’라고 진언을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정말로 생명의 은인처럼 생각됐습니다. 

담임선생님이 그들의 진언을 들어주셔서 저는 생활부장의 직분을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생활부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의 모든 학생들이 저를 나쁜 아이로 몰아가는 상황에서 누가 제 편을 들어주었다는 그 사실 자체가 고마웠던 것입니다. 제가 제 자신을 두둔할 수 없을 때 누군가가 저를 두둔해주었다는 것이 정말로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라고 합니다. 본문 5절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중보자-mediator라는 말의 뜻은 ‘둘 사이에 서서 일을 주선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전적인 정의는 좀 사무적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중보의 역할은 좀 더 적극적입니다. 두둔해주는 사람 · 대언자 ·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입장을 대표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중보기도라고 할 때 중보기도는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뜻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중보 기도하는 사람은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무개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아무개에게 은총을 내려 주시고, 아무개가 아직 철이 없어서 아직 어리니 그의 잘못을 그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게 중보기도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누구를 두둔하고 변호하는 것입니다. 제가 생활부장의 자리에서 탄핵될 위기에 처했을 때 주를 두둔해 준 친구들은 저의 중보자가 되어 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관점에서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별로 두둔한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사람들에 대하여 매우 엄하셨습니다. 인간의 죄에 대해서 예수님은 결코 관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사람은 다 그래. 철이 없어서 그렇다. 원래 심성은 착한데 성질이 급해서 그렇다. 원래 착한 아이인데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그렇다. 가정환경이 열악해서 그렇다. 상처가 많아서 그렇다.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해서 그렇다. 중심은 착한데 방법을 잘못 선택해서 그렇다. 단점이 있지만 장점이 더 많다…. 

우리가 서로를 두둔할 때 많이 쓰는 논리를 예수님은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두둔하지 않았고 인간의 편을 들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알기에는 그렇습니다. 히브리서 5장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것이 인류를 위한 중보기도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흔히 말하기를 예수님은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신다고 하는데 맞는 말이에요. 예수님은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미워하시는 한은 죄인을 두둔할 수는 없고 죄인을 편을 들어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읽어보면 한 번도 인간의 죄에 대하여 관대한 태도를 보이신 적이 없고 엄격한 천국의 요구를 양보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사람은 다 그런 거다, 그러기에 사람이다, 하나님도 이해하실 거다, 이런 말씀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이해하는 관대함의 모습을 예수님에게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의 중보자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 하나님 앞에서 예서님은 어떻게 우리의 중보자가 돼주실 수 있었다는 얘기냐.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어 주신 길은 우리의 죗값을 대신 담당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두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는 인간에게 죄가 너무 많아요. 사람을 두둔해서 될 일이 아니에요. 죄인을 사랑하는 것이나 죄에 대해서 관대한 것은 다른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고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은 인간을 두둔하는 대신에 인류 대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대언자요 중보자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귀한 중보는 없습니다. 어느 것이 더 위대합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더 위대합니까, 아니면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는 것이 위대합니까. 이건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두둔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우리의 죗값을 대신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중보에는 두 가지 면이 있습니다. 이쪽을 위한 것뿐만이 아니고 저쪽을 위한 것이 중보입니다. 그래서 중보-mediator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인간을 대표하신 면이 있고, 사람 앞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표하신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인들을 대표하셨다면 사람들 앞에서는 하나님을 어떻게 대표하셨느냐. 하나님의 거룩함, 의로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사랑 이 모든 것을 사람들 앞에 어떻게 나타내셨느냐. 이건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 역시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류를 보실 때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보시고 사람이 하나님을 볼 때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보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을 보실 때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보시기 때문에 죄인을 의인이라고 여겨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때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보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숨으려고 하거나 하나님의 심판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 대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알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여기시는 것도 있고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있고 안타까운 것도 있고 이것저것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에 대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알려면 그것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이 가장 확실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담겨져 있고 동시에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도 담겨져 있습니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해결하셨습니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섭섭함을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다 푸셨습니다. 인간에 대한 의로움의 요구도 이것도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다 해결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 하나님을 알고자 하신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셔야 됩니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입장 · 하나님의 자비 · 사랑 · 구원 이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온전히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 하나님을 알려고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또 십자가 없이 하나님을 보려고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전히 율법의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에 세력 다툼이 일어나서 시저가 정적 폼페이우스를 몰아냈습니다. 폼페이우스가 이집트로 도망갔습니다. 그래서 시저가 폼페이우스를 쫓아서 이집트에 도착했을 때 이집트의 왕이 마중 나와서 항아리 하나를 선물했습니다. 그 항아리 속에 폼페이우스의 목이 들어있었습니다. 이집트 왕이 이렇게 한 이유는 그렇게 하면 시저를 기쁘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시저의 비위를 맞추려고 했기 때문이고 시저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저는 그것을 보고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언짢아하고 폼페이우스의 장례식을 정중하게 치러줄 것을 명했습니다. 

과거 인류가 하나님의 비위를 맞추려고 했던 것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했던 것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시키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여전히 죄인이었고 하나님은 여전히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로 해결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누구를 기쁘시게 못한다는 얘기입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얘기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습니다. 또 요한복음 6장 29절에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우리가 다른 일을 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기 이전에 먼저 해야 될 하나님의 일은 당신이 보내신 이를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저와 비슷하신 면이 있다면 아마 여러분도 누가 강요하는 것을 싫어하실 것입니다. 누가 강요하는 것 좋아하는 분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누가 잔소리하는 것 좋아하는 분 계시면 손들어 보세요. 아무도 없습니다. 좋은 말도 되풀이하면 싫다고 했는데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도 옳은 말씀이지만 우리의 잘못, 우리의 허물, 우리의 죄, 우리의 모순을 지적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으면 그것도 잔소리로 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못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은 선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율법이 인간을 바꾸지 못한 것입니다. 무엇을 해라, 무엇을 하지 마라라는 율법이 인간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을 포기하셨다는 얘기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시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변화시키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하나님의 고통 · 하나님의 인내 그리고 하나님의 인내하는 사랑의 증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쉬운 사랑이 아니고 어려운 사랑입니다. 사랑하기 힘든 대상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오래 참으면서 사랑하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의 속성은 원래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원래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해 받은 것을 기억치 않고 사랑은 오래 참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사랑은 온유하고 사랑은 자랑치 아니하고, 이 모든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어떻게 말할 수 있느냐. ‘여러분은 사랑을 해야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율법이에요. 옳은 말씀이에요. 그러나 요구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을 해야 됩니다.’ 이건 율법이고 그럼 복음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게 복음이에요.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십자가에서 나타납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의 큰 고통 사라져’ 그래서 남의 말 듣기 싫어하고 옳은 말 듣기 싫어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듣기 싫어했던 우리로 하여금 이제는 억지로가 아닌 부득이가 아닌 자원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순종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이 이루신 일이요, 이루고 계신 일이요, 앞으로 이루실 일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 ‘저는 아직 그렇지 못합니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앞으로 그렇게 하실 줄을 믿으시면 됩니다.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의 중보자가 되십니다.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이 의인으로 여겨주실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바라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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