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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요 6:6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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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는 것은 영이니 (요 6:60-71)


우리는 풍족한 삶을 꿈꿉니다. 동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 같은 아름다운 삶을 꿈꿉니다. 부족한 것 하나 없이 누리는 삶을 원합니다. 날마다 행복이 가득한 곳 천국의 삶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아쉬움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실 하나님께서는 낙원을 사람들에게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낙원 에덴 동산은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먹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날마다 기쁨으로 하나님을 만나며 먹고 싶은 대로 먹거리를 골라가며 마음껏 먹으며 병들고 아프거나 죽을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근심할 것도 두려울 것도 염려할 것도 없는 그러한 나라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허락하신 나라입니다. 

그런데 악한 마귀로부터 시작된 시험이 이 낙원을 잃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행복했던 것들이 어느 순간에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죽음의 공포가 있습니다. 가진 것을 잃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서로에 대해 불신하고 언제 저 사람이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서로 도우며 가장 가까이 함께 즐겨야 할 사람이 오히려 두려운 존재로 바뀌고 만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영원히 살 수 있던 존재가 이제는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악한 마귀는 아담과 하와에게 먼저 먹을거리를 가지고 시험을 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라는 것입니다. 아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죽을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결코 죽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하는 말에 그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게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마음대로 다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단지 하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먹으면 반드시 죽도록 정하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루 강아지 호랑이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처럼 아직 죽음이 뭔지조차 잘 모릅니다. 언제 죽음을 겪어봤던가요? 더군다나 온 세상을 지으시고 자기들에게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데야 이거 아니라고 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까짓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이 왔고 하나님이 주신 모든 복이 오히려 저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서로 불신하게 되고 수고하지 않고서는 먹을 수가 없었고 새 생명의 탄생이 고생과 수고와 죽음의 공포로 어우러질 수밖에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가장 가까워야 할 당신이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 되고 만 것도 다 먹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악한 마귀는 예수님에게도 똑같이 먹는 것으로 시험을 했습니다. 사십 일을 금식한 후에 몹시 굶주려 있는 예수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뭐 힘들게 지낼 것이 무엇이 있느냐,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능력을 가지고 먼저 그 배고픔을 해결해라. 가장 쉬운 방법이 있지 않느냐? 지천으로 널려 있는 광야의 돌을 가져다 그것으로 빵을 만들어 먹으면 되지 않겠니?” 
요일 2:15~16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먼저 기억할 것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험이 다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험이라는 말처럼 시험 자체가 즐거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험이 있도록 허락하시는 목적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좋은 군사로 세우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허락하시는 시험이 다른 말로는 시련입니다. 영어로는 trial, 훈련 또는 연단이라는 뜻입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명령과 질서를 따르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훈련하고 어떠한 적과도 싸워 이길 수 있기 위해 필요한 모든 갖추도록 훈련합니다. 

두 번째 시험은 기말고사와 같이 우리가 얼마나 실력을 갖추고 있는가, 우리의 수준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아보는 test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 그 사람의 실력과 수준이 공인되게 됩니다. 이 시련과 test로서의 시험은 그러기에 우리들에게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악한 마귀의 시험은 이것과는 격이 다릅니다. 악한 마귀의 시험은 temptation이라고 해서 다른 말로는 유혹입니다. 그것은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넘어뜨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기억할 것은 악한 마귀의 시험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기편을 넘어뜨리려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다른 편이기에 어떻게든지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시험의 때에 우리는 먼저 감사해야 합니다. 물론 시험을 이기면 더 좋겠지요. 또 이겨야 되고요. 

하지만 설사 넘어졌다고 해도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품으로 빨리 달려가 안겨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바른 길로 다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돌아온 탕자를 얼싸 안아주시던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감싸 안아주십니다.

어쨌든 악한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우리 앞에 시험을 펼치는데 그것이 먼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육신의 정욕 말 그대로 몸에 관한 것을 가지고 시험합니다. 먹는 문제 이성 문제 건강 등이 악한 마귀가 우리를 시험하는 첫째 과제입니다. 그래서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 도 선악과를 가지고 시험을 했고 40일 금식한 후 굶주린 예수님도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시험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먹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마음껏 먹으라 하지만 절제하라고 하십니다. 진짜 몸을 위한다면 절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건강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주신 질서를 따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은 무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리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욕심 때문입니다. 조금 더 조금 더 하다가 그만 쓰러지고 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는 간단합니다. 먹을 때 먹고 쉴 때 쉬고 잘 때 자는 것입니다. 그 때를 맞추어 살면 되고 지나치지 않도록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나치게 먹고 지나치게 쉬고 지나치게 자도 문제가 됩니다. 모든 것은 적당히 해야 합니다. 적당히 먹고 적당히 움직이고 일하고 운동하는 삶 소위 균형 잡힌 삶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편식이라든가 편애는 문제가 됩니다. 균형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먹는 문제, 건강 유지, 그리고 이성 문제 등 몸으로 겪는 것이 첫 번째 사탄의 시험입니다. 소위 육신의 정욕이요 하와가 보았던바 선악과를 보니 먼저 먹음직도 하다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요 예수님에게도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시험이 보암직도 한 것 즉 안목의 정욕입니다. 소위 소유의 문제입니다. 보이는 것, 보여주기 위해서 필요한 것, 그래서 꾸미고 갖추기 위해서 필요한 재물들 그래서 집이 있어야 하고 그것도 얼마짜리 집이냐, 자동차도 있어야 하고 자신을 멋지게 포장하기 위해서 공부도 해야 되고 이런 저런 자격도 갖추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을 위해서 돈이 있어야 되는데 얼마나 있어야 되느냐 몸도 꾸며야 되는데 얼마짜리로 꾸미느냐 등등 멋있다 좋다고 탄성이 나오게끔 갖추고 싶은 마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악한 마귀는 예수께도 자기에게 절하면 세상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했습니다. 자기 것도 아닌데 자기 것인 양 인심을 쓰려고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시험은 이생의 자랑입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싶고 다른 사람을 부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명예와 권세가 그래서 우리가 소망하는 시험거리입니다.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전에서 뛰어내리면 천사가 받들어 너를 지켜 줄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너를 찬양하리라. 결국 칭찬받고 싶고 높아지고 싶고 남들 앞에 우뚝 세워지고 싶은 마음이 또 하나의 시험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물론 이 모든 것들 몸에 관한 것이라든가 소유의 문제 명예와 권세에 관한 것이 나쁜 것도 아니고 필요 없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복된 삶을 위해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한 마귀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명령과 질서를 떠나 내 방식대로 가지라고 하는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땀 흘리지 않고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수고할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도록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수고해야 하고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냥 빨리 빨리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다리를 올라가듯 한 계단씩 올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뛰어넘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떨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서둔다고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서둘러야 할 때도 있고 기다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일해야 할 때가 있고 쉬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에 바람은 있어야 하지만 욕심이 되면 안 됩니다. 욕심이라는 것은 분수에 지나치게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뱁새가 황새를 흉내 내다가는 가랑이가 찢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황새는 황새대로 살고 뱁새는 뱁새대로 살 것입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뱁새와 황새가 같이 어울려 살아간다고 해서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다른 것을 인정하면 됩니다. 그것은 부부 사이에도 그렇고 가족 간에도 그렇고 모든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습니다. 함께 있고 같이 있고 같이 살아도 똑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쌍둥이도 세대 차이를 느낀다고까지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살리는 것은 영이시라는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6장은 오병이어로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먹는 문제로부터 이야기가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론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맺어집니다. 우리는 보통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았다는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필요를 따라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 능력의 주님을 생각합니다. 

물론,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하신 빌립보서 4:19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쓸 것을 채워 주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우선 순위는 육신이 먼저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하신 요한삼서 1:2의 말씀처럼 영혼이 잘 되는 것 즉 영적인 문제가 먼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순서를 바꾸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만을 바라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영혼이 잘 되는 것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좋은 군사가 되기 위해서 먼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의 모든 것이 다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온 천하를 주고도 생명을 얻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실되게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고 있습니까? 참으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맞습니까? 하나님이 참으로 아빠 아버지가 되십니까? 

이는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늘로서 내려온 양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심으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덧입어서 그 모든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길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신 말씀대로 우리가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믿음으로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믿음으로만 영혼이 잘 되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부터 고구마 줄기에 고구마가 줄줄 따라 나오듯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게 되는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악한 마귀는 이 우선 순위를 자꾸 바꾸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질서를 따를 때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는 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즉 우리의 수고와 더불어 하나님의 복 주심이 없이는 우리가 아무리 모아도 하나님이 불어버리시면 남아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학개서 1:9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오늘 본문 말씀에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고 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물러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26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따라왔던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과연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기에 많은 사람들이 물러가고 다시는 그와 함께 다니지 않는 결과가 되었습니까?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였으며, 사람들은 그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문제에 해답을 찾았다고 생각했었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삼으려고 했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그가 왕이 되면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거절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대속의 제물로서의 예수님의 희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 사건 후 무리들이 몰려와서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하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배에 태워 서둘러 바다를 건너가게 하시고 자신은 홀로 산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무리들이 다음날 아침에 와보니까 예수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었습니다. 해변에 있던 배조차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간 것이 틀림이 없다고 여기며 열심을 다해 예수님의 뒤를 쫓아 왔습니다.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고 무리들이 묻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그들의 잘못된 이해로 말미암아 그 이후에 나오는 싸움들이 요한복음 6장에 길게 기록되어지고 있습니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 내가 너희를 살리기 위하여 피와 살을 주려고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양식이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이제 그들은 쉽게 그것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너희는 아직 모르는구나.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지 않으면 그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 그들은 다시 “아니 저희들이 그 생명의 양식을 위하여 왔지 않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아니다, 너희는 떡 때문에 왔지 생명과 진리 때문에 온 것이 아니다. 나는 죽으러 왔고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과는 다른 예수님의 말씀에 다 도망을 간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몇 가지 수군거림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41~42절에 나타난 수군거림입니다.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이런 수군거림이 52절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그리고 오늘 본문 60절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여기서 등장하는 제자들은 열두 제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는 제자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부르신 열두 제자가 있었고, 자신들이 제자가 되기를 자청하고 좇아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청해서 제자가 되고자 했던 사람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다 도망을 갔습니다. 바로 여기가 문제입니다. 어찌하여 그렇게 많이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을까요? 

먼저, 왜 제자들이 수군거리며, 사람들이 수순거렸습니까? 
기독교와 타종교의 가장 큰 차이는 이것입니다. 타종교는 인간이 자기로부터 어떤 도를 깨우치며 어떤 진리를 얻고 승화시켜 나가는 것으로 종교를 정의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 스스로는 무엇을 하든지 희망이 없다는 것을 선언한다는 것이 그 차이점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 중에서 ‘내가 바로 너희 죄를 씻기 위하여 내 피와 살을 주려고 온 자라’고 하시면서 인간 스스로로부터는 도무지 그 어떤 것도 시작될 수 없다고 하시는 대목에서 사람들은 싫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요구는 우리에게 어떤 것을 하도록 가르쳐 주어서 그것으로 부터 우리가 어떤 도나, 법칙이나, 진리를 갖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선언하기를 너희들에게 그런 것을 해 주어 봤자 너희는 전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부터 우리 인간이란 어떤 것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빛이 세상에 왔으되 모든 사람들이 영적 장님들이라 보지 못하는 고로 어두움을 더 좋아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게 하기 위하여 세례 요한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는 내용으로 시작을 합니다.

3장 니고데모 이야기는 종교적으로나 지식적으로나 인생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대표적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선언하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니고데모에게 어떤 도를 깨우쳐 주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어떤 것도 희망이 없으니 너는 거듭나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네가 갖고 있는 종교, 힘, 도덕성, 그 어떤 것으로도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한 길 거듭나는 길 밖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4장의 사마리아 성 수가의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를 통해서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 즉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5장은 38년 된 병자의 사건입니다. 베데스다 못에는 가끔 천사가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물이 동할 때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자는 고침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병자는 꼼짝 달싹하기 어려운 중풍병자입니다. 눈앞에 물이 동하여도 제일 먼저 들어갈 방법이 없습니다. 여기서 38년 된 병자라는 것은 오랜 병자라기보다는 38년 동안이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시도를 했지만 성공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의 지적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기독교의 도를 준다고 해도 그것을 성취할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볼 눈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 부분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밤낮으로 싸워야 하셨던 부분입니다.

“너희는 희망이 없다, 내가 대신 죽어 주지 않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하니, 사람들은 매일 반발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결국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십니다. 겉으로만 보면 그 싸움으로 인해 잡히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를 구원하는 데에는 그 방법 밖에는 없으므로 예수님께서 친히 죽으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에 와서는 사람들이 “그 말이 어렵다!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 하면서 수군거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어떤 시원한 해답을 주시기보다 오히려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것은 생활에 필요한 떡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오게 하여 주셨기 때문에 교회에 나올 수 있게 된 것이지 내 뜻대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타내신 것은 생명의 떡을 줄 자가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을 구별하라는 뜻으로 나타내신 것이지, 떡 먹는 재미로 주님께 나오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즉 우리가 교회에 나아오는 것은 생명의 떡 때문이요 하나님이 오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떡 때문이 아니요 내 의지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육신의 문제나 우리의 의지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믿음으로 반응하고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할 때 하나님의 나라와 더불어 세상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이 모든 것이 우리들에게 더해질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와 순서를 자꾸 혼동하게 되어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예수님은 왕으로 삼으려고 할 때에 도망을 가신 분이십니다. 그 이유는 “내가 너희를 가르치려 하고, 너희에게 깨우치게 하려고 하고, 주려고 하는 것은 영에 관한 싸움이요 생명에 관한 싸움, 즉 영원에 관한 싸움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 짧은 인생에 있어서 짓밟히고 찢기는 한이 있어도 영원을 준비하겠다는 그 결단입니다. 하늘나라를 어떠한 경우에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우리의 자세는 뒤집혀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를 믿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차라리 안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유혹이며 시험입니다.
오병이어로 출발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무리가 따랐습니다. 그러나 떡을 찾아왔던 수많은 무리들은 다 떠나버렸습니다. 남은 자는 12제자들뿐이었습니다. 여기서 떠나간 무리들과 남은 제자들과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다 도망간 후에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밀물 같이 몰려왔다가 도망간 자들은 떡을 찾아서 왔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남은 자들은 생명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결코 기적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어떤 것으로 인해 시작이 되었습니까? 그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신앙이 지속되고 있습니까? 기억할 것은 그 계기가 무엇이었든지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것이 계기가 되어 그 부르심에 우리가 순종하여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살리는 영이 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도 그 주님의 품을 떠나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은 모든 것을 잃는 자가 되고 맙니다. 생명도 잃어버리고 우리가 그토록 갖고 싶은 모든 것을 다 잃게 되고 만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고 하신 것은 육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이 살아야 육도 유익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몸도 망가지고 삶도 엉망이 되고 맙니까? 이 우선 순위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단의 전략입니다. 먼저 먹을 것을 챙기라는 것입니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고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노새 노새 젊어서 놀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즐기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즐기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고와 더불어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는 오직 그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귀한 귀한 은혜를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왜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아버지께서 우리를 지목하사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 사람을 위하여 네 피를 흘려다오!' 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감격할 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붙잡은바 되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복이 없으며, 이 특권보다 더 큰 특권이  없음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잠시 동안 사는 인생 속에서 기껏해야 100년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인생인데 이제 남은 인생이 얼마가 되었든 남은 인생도 붙잡아 둘 수는 없습니다. 결국 다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영원한 나라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며 그 나라에서 누릴 복을 생각한다면, 이 짧은 인생 속에서 우리는 너무나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는 셈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고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나를 지목하여 불러주셨습니다. 자녀삼아 주셨습니다. 내게 특별한 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감사할 것밖에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어차피 다 사라질 것들이었습니다. 다 빼앗길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시길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이를 위해 오직 그의 나라의 그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십니다. 왜요? 풍성하게 채워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빼앗길까 두려워합니다. 없어질까 봐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주시되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처럼 우리 삶에 필요한 모든 것도 풍성하게 채우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먼저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넘치도록 우리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사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살리는 것은 영이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우리 영혼을 살리심 같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따라 풍성하게 채우시는 귀한 삶을 누리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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