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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욥의 친구들과 공감 (욥 3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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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친구들과 공감 (욥 32:1-14)

“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이 말을 그치니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 그가 욥에게 화를 냄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또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이라 엘리후는 그들의 나이가 자기보다 여러 해 위이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화를 내니라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뒷전에서 나의 의견을 감히 내놓지 못하였노라 내가 말하기를 나이가 많은 자가 말할 것이요 연륜이 많은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노라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말하리라 보라 나는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노라 당신들의 슬기와 당신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노라 내가 자세히 들은즉 당신들 가운데 욥을 꺾어 그의 말에 대답하는 자가 없도다 당신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진상을 파악했으나 그를 추궁할 자는 하나님이시요 사람이 아니라 하지 말지니라 그가 내게 자기 이론을 제기하지 아니하였으니 나도 당신들의 이론으로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리라” 

성경은 참 다양한 책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장르의 형식을 통하여 인류 구원과 평안의 삶을 위한 수천수만의 이야기들을 성경에 담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천지창조 이야기로부터 인류의 오랜 역사 이야기, 예언, 법과 규례, 시가 등 인류의 구원과 삶, 고뇌와 환희, 사랑과 희생에 관한 풍부한 지혜와 지식이 성경 속에 녹아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완전한 자아 정체감을 가진 존재였으나, 범죄하여 타락한 결과 하나님의 형상은 훼손되었고 개인 정체감은 상실되었다. 하나님은 이런 인류를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분의 십자가 희생과 부활을 믿는 자들을 양자 삼으셔서, 소속감과 자존감과 통제력의 욕구를 채워주시고, 개인 정체감을 회복시키신다.” 

인간 정체감의 회복의 결과로, 이제 그리스천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분을 신뢰할 수 있다. 나는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따라서 자존감을 경험할 수 있다. 나는 스스로 통제할 수 있으며, 소망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의 안정과 소속감에 대한 욕구를 채워주듯이, 아버지를 중심에 모시고 있는 성도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나는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고, 따라서 신뢰할 수 있다” 라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존감에 대한 우리의 욕구를 채워주시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들은 다른 사람들을 성장시켜서 이들이 “나는 사랑을 받고 있다. 따라서 신뢰할 수 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지점까지 인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힘에 대한 우리의 욕구를 채워주듯이, 교회는 나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이 활력을 얻어 “나는 스스로 통제할 수 있고, 소망이 있다” 라고 말할 수 있도록 세워주고 봉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효과적인 도움을 주려면 그에게 공감(共感, empathy)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도와주는 과정은 우선 공감으로 특징 지워져야 합니다. ‘공감한다’는 것은 자신의 가치관이나 해석을 강요하지 않은 채 자신을 다른 사람의 처지에 놓아보고, 세상을 볼 때 그 사람이 보듯이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 욥기에서 공감에 관한 좋은 가르침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욥이 모진 시련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욥의 세 친구 엘리바스와 빌닷, 그리고 소발이 위로하기 위해 왔습니다. 친구들은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된 욥을 보자 슬피 울며 7일 동안 조용하게 그와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친구들의 오랜 침묵을 진정한 공감으로 오해한 욥은 자신의 진짜 감정을 그들에게 표현했습니다. 욥의 감정은 ‘깊은 우울증’과 ‘죽고 싶은 갈망’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욥의 고백으로 시작된 욥과 그의 친구들 간의 격렬한 논쟁 속에 인생의 고통과 그 고통의 의미를 찾으려는 처절한 노력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논쟁은 총 삼차 삼주기로 되어 있습니다. 

욥기에 나오는 수많은 주제들 중 오늘은 공감에 대한 것을 중심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는 먼저 욥의 고통을 살펴보고, 욥을 위로하러 온 친구들의 자세가 진정한 공감과는 거리가 있음을 인식하고, 진정한 위로와 도움을 주려면 어떤 마음 자세여야 하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욥의 고통

욥기는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인생들이 현 세상에서 경험하게 되는 실존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우리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신앙적 자세에 관하여 교훈할 목적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동방의 우스 지역에 살고 있던 욥은 열 명의 자녀와 많은 재산을 소유한 큰 자였습니다. 그는 자기 아들들이 생일을 맞이하여 잔치를 벌인 다음날이 되면 그들이 잔치 중에 혹 마음으로나마 하나님을 배신하였을까 염려하여 그들을 불러다가 번제를 드려 성결케 할 정도로 경건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욥에게 영문 모를 엄청난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첫 번째 재앙은 그의 소유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재산 곧 소, 양, 약대, 그리고 종들에 대하여 무서운 재난이 사슬처럼 연이어 발생하였습니다(1:13-17). 그리고 그러한 첫 번째 재난은 그의 열 자녀들이 한 순간에 몰살을 당하는 것에서 그 절정에 달합니다(1:18-19). 

두 번째 재앙은 욥의 육체에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재 가운데 앉아 기와조각으로 몸을 긁어대는 비참한 모습에 욥의 처는 첫 번째 재난을 당할 때까지만 해도 잠잠했었지만 이제는 욥을 향하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탄식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은 심하게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녀들과 소유물과 건강마저 잃었습니다. 내면적으로 그는 자녀들을 상실한 것에 대해 슬퍼했을 뿐만 아니라, 외면적으로 그의 전신을 괴롭게 하는 종기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친구들에게 자신의 내면의 고통을 토로한 욥의 고백 속에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힘든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3:11=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3:24-26= “나는 음식 앞에서도 탄식이 나며 내가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소리 같구나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 

욥은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죽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고 말한, 죽음에 이르는 병인 절망의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흄(Hulme)이 예리하게 분석한대로, 욥은 솔직히 하나님을 저주할 수 없기 때문에 아내의 냉소적인 지시(“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라”)를 따를 수 없었습니다. 그의 종교적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와 동시에 욥은 하나님을 방어할 수도 없습니다. 그가 당하는 외상(外傷)은 지나치게 불공평해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진퇴양난에 빠졌고, 고뇌하며 그 이유를 묻습니다. 

성도 여러분! 욥의 곤경은 인간의 논리로 단순히 설명되고 해결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우리의 삶을 안내하는 안내자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삶의 사실들을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인간의 생명의 근원에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으며, 이 모든 고난과 부조리는 인간이 범한 죄로부터 나온 것임을 분명히 밝혀줍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결코 바로잡을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이 제정하신 구속(救贖)의 방법,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부활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2. 친구들의 비공감적 태도 

욥이 극심한 육체적 고통 속에서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듣고, 친구 중 연장자인 엘리바스가 먼저 나섰습니다. 그런데 엘리바스는 너무나 비난적이고 비공감적인 태도로 반응했습니다.  

4:2=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싫증을 내겠느냐,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4:5= “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 네가 힘들어 하고 이 일이 네게 닥치매 네가 놀라는구나” 

4:7=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5:8=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엘리바스의 이런 말은 욥의 분노를 촉발했을 뿐, 욥을 위로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욥과 그 친구 사이에는 깊은 균열이 생깁니다. 엘리바스가 욥을 도와줄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도 여러분! 욥의 감정 폭발에 위협을 느낀 엘리바스는 어쩌면 충동적으로 욥을 침묵시키려 시도했습니다. 엘리바스는 도덕주의자의 접근을 취했습니다. 그는 욥에게 죄책감을 줌으로 회개케 하려 했습니다. 엘리바스의 말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습니다. 

“여보게 욥! 부끄러운 줄 알게! 왜 자네가 말한 것을 실천할 수 없는가!”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엘리바스가 교리적 또는 신학적 요점을 사용한 점입니다. 그는 욥을 훈계합니다.  

5:17-18=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엘리바스의 말은 하나님의 계시에 드러나 있는 탁월한 요점이요 가르침입니다(히 12:5-6 참조). 그러나 지독한 곤경에 빠져 있는 욥의 상담자로서는 표적을 빗나간 영적 상담입니다. 왜냐하면 욥은 하나님에 의해 징계를 받거나 훈계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친구의 충고의 말은 욥이 있는 위치에 적중하지 않기 때문에 욥에게 아무런 긍정적인 효과가 없습니다.

엘리바스는 근본적으로 신학적인 인과(因果) 공식을 들고 나왔습니다. “너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욥의 경우 이 점은 근거가 없으며, 따라서 그에게 더 큰 굴욕감과 고통을 야기시킵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도울 때에 그 사람을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성경 말씀을 인용하는 것을 서두르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울증이나 불안증에 걸리면 돕는 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환자를 지지하고 그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것입니다. 고통당하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 그에게 공감해 주는 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엘리바스와 같이 비공감적 태도로 상대방에게 고통을 더하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우울증으로 고통당하는 자매님, 자매님의 눈을 주님께 돌리십시오. 죄를 고백하십시오. 믿음을 회복하십시오. 하나님께 순종하십시오. 그리고 감정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이같은 말들을 얼마나 자주 들어왔습니까! 그 목록은 끝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훌륭한 조언이지만, 충고를 주는 사람은 당면한 특정 상황에 그 말이 직접적으로 적용된다는 절대적인 확신을 갖기까지는 충고를 자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엘리바스 뿐 아니라 뒤이어 논쟁에 뛰어든 빌닷과 소발의 조언은 모두 그렇지 못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친구들의 비공감적 태도에 대한 욥의 반응을 보십시오. 욥은 친구들의 논리적 언쟁이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6장). 욥은 그의 친구들에게 부르짖습니다. 

“나는 내게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감정과 느낌이 있다네. 나는 우울하고 슬퍼서, 혼란스럽고 당황스럽다네. 그러나 자네들은 나를 논리를 가지고 치료하고 싶어하지 않은가. 자네들은 나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네.” 

욥의 친구들은 욥의 표면적인 말에만 열중하고, 하나님의 관점이 아닌, 자기들의 신조로부터 그들의 관점을 취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욥을 비난하고, 나쁘다고 정죄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완전히 그릇되게 대신하였습니다. 

욥에게 필요한 것은 이론적인 신학 담론(談論)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의 정서적 절망을 이해하고 공감해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엘리바스에게 반응하는 욥의 모습은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많은 문제의 핵심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감정을 평가 절하하는 것이며, 정상적인 인간의 감정이 좋지 않은 것이고 죄악된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마음의 감정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욥기에서 특히 분명하게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들간에, 특히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공감입니다. 공감의 가장 좋은 사례는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그리스도는 자신을 낮추어 인간들의 타락하고 죄 많은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어느 시점에서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와 불행 그리고 비탄으로부터 거리를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하시고 지옥의 고통을 당할 정도로 인간들의 적개심과 혐오조차 인내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의 정서적 삶에 속박되어야(enmeshed) 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감정적 불행을 공유할 의지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방어적이고 회피적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욥을 전혀 도와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욥은 친구들의 신학 이론을 공격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 반대로, 그는 하나님의 임재하심보다 신학에 더 가치를 두는 특정 마음자세(mind-set)를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정확하다고 하여 하나님에 대한 더 깊고, 더 친밀한 지식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마음으로 공감의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3. 엘리후의 공감적 태도 

욥과 친구들간의 격렬한 논쟁 분위기는 새로운 논객 엘리후의 등장으로 전환점을 이룹니다. 아마도 혈연적으로 욥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엘리후는 욥의 재앙 소식을 듣고 욥을 위로하기 위해 와 있다가 욥과 친구들 간의 변론이 아무런 결론도 맺지 못하고 중단되자 드디어 논쟁에 뛰어들었습니다. 

엘리후는 욥의 친구들이 논쟁에서 욥을 굴복시키지 못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절대 공의를 옹호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변론에 개입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후의 변론은 앞의 친구들의 말과는 달리 욥의 고난의 원인을 무조건 죄에서만 찾지 않고 연단과 같은 다른 측면에서도 찾음으로써 친구들의 변론보다 훨씬 진보적인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록 욥을 향한 엘리후의 논쟁이 신학적으로 항상 정확하지는 않지만, 엘리후는 친구들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여줍니다. 

그는 욥을 진심으로 걱정합니다. 그가 하는 말은 공감을 드러내며, 욥의 고난에 대한 동일시(同一視)를 나타냅니다. 그는 고난당하는 욥을 내려다보는 듯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욥과 동일선상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33:6= “나와 그대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비록 엘리후는 욥이 자기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것에 대해 화가 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청년의 태도는 따뜻함과 존경심을 풍깁니다. 그는 욥이 용납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그리하여 엘리후는 욥에게 소속감을 주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준비시킵니다.  

하나님께서 나중에 욥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정죄한 욥의 친구들에 대하여는 엄히 책망하시면서도 엘리후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은 엘리후의 변론이 비록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상당히 긍정적인 것임을 시사하여 줍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욥기를 통하여 우리가 배우는 것은 고난을 당하여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 대하여는 다른 무엇보다도 진정한 이해와 사랑의 마음으로 위로하는 자세가 요청된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오신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와 그밖의 애도자들의 슬픔을 보았을 때, 여행으로 인한 피로나 그의 생명에 대한 위험을 걱정하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눈물을 흘리며 우셨습니다. 

예수님의 공감하는 반응은 곁에 서 있던 유대인들이 이렇게 말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보라, 그(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요 11:36). 

공감은 예수님의 삶 전반에 배어 있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친히 육신을 입고 인간 세상에 오셨고, 유아기 유년기 청소년기를 거쳐 장성하셨고, 가난 속에서도 경건한 삶을 사시면서 인간의 연약함을 친히 경험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곤경을 이해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담당하신 형벌을 통하여, 우리 죄 때문에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하나님의 노여움을 전부 경험하셨습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성도 여러분! 욥에게 필요한 것은 그의 처지와 마음의 고통에 동참하는 공감이었습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욥을 위로한다며 오긴 왔으나 자신의 경험과 지식의 잣대를 가지고 고난 가운데 부르짖고 있는 욥을 일방적으로 정죄하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들은 욥에게 도움을 주기는 커녕 오히려 고통당하는 욥에게 영적 정신적 고통을 얹어주는 무정한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의 엘리후처럼 신뢰를 격려하는 분위기를 조성할 줄 아는 공감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우리 모두는 보다 완전한 모범되신 예수님에게서 진정한 공감의 자세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고통당하는 이들을 자기 탐색에 필요한 소속감과 안정감으로 이끌 수 있는 성숙한 성도로 성장해 가야 하겠습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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