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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 11: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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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 11:17-32)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17-20)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1-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23-2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27-30)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요11:17-32)


장사 후의 나사로의 집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 하셨을 때의 나사로 집은 완전히 초상집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17-20)  
  
첫째로, 당사자인 나사로는 죽어서 무덤으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이 도착하셨을 때 나사로는 이미 장사된 지 나흘이 지났습니다. 이 나흘이라는 기간이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사흘 동안 시체 주위를 맴돌면서 자기 몸에 다시 들어가고 싶어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몸이 부패해서 변하는 것을 보면서 떠나간다고 합니다. 

Bar Kappara 는 말하기를, 최대의 애도는 사흘간 계속되는데 그 까닭은 그 사흘 동안은 얼굴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미쉬나에도 시체 확인은 죽은 지 사흘 이내에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제4일에 가장 크게 애도했는데, 이것도 그날에 자연적인 소생(蘇生)가망성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전통에도 사람이 죽으면 바로 입관하지 않고 얼마간 놔둡니다. 왜냐하면 자연히 소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체에서 냄새가 나면 이미 회생의 희망은 없어집니다.  예수님이 도착하셨을 때가 바로 사망 후 제4일이었습니다. 소생 가망성이 완전히 사라진 때였습니다.  
  
둘째로, 많은 조문객들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나사로의 집은 예루살렘에서 15스타디온(약5리 정도)의 거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사로의 집에 도착하셨을 때는 많은 유대인들이 위로차 머물고 있었습니다. 장사 지낸지 나흘 후까지 많은 사람들이 喪家에 머무는 것은 유대인의 풍속입니다. 

A. Edershime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었을 때 첫 삼일간은 곡하는 기간, 그 후 4일간은 깊은 애도 기간, 그 후 30일간은 가벼운 애도 기간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탈무드에 보면 복상 기간을 셋으로 구분합니다. 죽은 직후 첫 3일간은 곡하는 기간, 그 다음 7일간은 애도 기간, 그 다음 30일간은 머리를 깍지 않고 옷을 벗지 않는 기간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상객들도 이 기간 동안에 잠깐 들리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머물면서 가족들의 애도에 참여 했습니다. 

죽은 지 나흘 후까지 나사로의 집에 많은 사람들이 머물고 있었던 것은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가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무튼 이 조문객들은 나중에 나사로 부활 사건의 목격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싫든 좋든 나사로 부활의 法廷的인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이들 때문에 나사로 부활은 은폐된 사건이 아니라 多數 앞에 공개된 열려진 사건이 되었습니다.
  
셋째로, 유족 마르다와 마리아는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라비의 병세가 심상치 않자 사람을 예수께 보냈었습니다. 그러나 심부름꾼이 떠나자마자 곧 오라비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슬픔에 빠져 있었습니다. 관습대로 마르다는 손님 치르기에 바빴고 마리아는 집 바닥에 앉아 있었습니다. 유대 풍속에는 시체가 집을 떠난 직후에 모든 의자나 침상들을 엎어 놓고, 유족들은 맨 바닥이나 낮은 침상에 앉아서 애도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단, 안식일 날은 제외, 금요일은 한 시간만 애도) 마리아는 바로 이런 의식 속에서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죽은 나사로는 무덤에서 부패되고 있고, 많은 조문객들의 위로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가운데, 마르다와 마리아는 슬픔에 젖어 있는 이것이 나사로 집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집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었을까요?


예수를 맞는 마르다의 신앙

예수께서는 나사로의 마을에 당도하셔서 나사로의 집으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동구 밖에서 마르다 자매를 만나셨습니다. 아마 상가의 의례적인 관례가 주님께는 필요 없으셨을 것입니다. 먼저 마르다가 주님을 맞으러 나왔습니다. 주님은 길에 선채로 마르다와 짤막한 대화를 하셨습니다. 이 대화는 요한복음의 주제를 담고 있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우선 마르다가 주님께 한 말을 통해서 그가 예수께 어떤 기대를 걸고 있었으며,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고 했습니다. 오라비가 병상에 누웠을 적에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죽지 않았을 텐데! 마리아 역시 주님을 보자마자 똑같은 말을 합니다. 주님이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겁니다.(32) 아마 마르다와 마리아는 이 말을 수없이 되뇌었을 겁니다. 병든 사람들을 수 없이 고쳐주신 주님이시니 나사로가 누워 있을 때에만 오셨더라면 어떤 병이든지 고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이제는 죽어버렸으니 속수무책(束手無策)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마르다가 바라보는 예수님의 한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생전의 일만 해결하시는 분입니까? 살아 있는 사람의 문제라면 만사를 해결하실 수 있는데, 숨이 떨어진 뒤에는 어쩔 수 없는 예수님이신가요?  그들은 오라비가 살아 있는 한 예수님께 해결책이 있었는데, 오라비가 죽었으니 예수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많은 것을 의지합니다. 돈, 직장, 사업, 질병, 이성 관계, 자녀, 부부 관계 등등. 그러나 생사 문제만은 포기해 버립니다. 그것은 예수님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 손으로 할 수 있는 세상의 일들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할 수 없는 생사 문제 아닙니까? 오늘 우리는 죽고 사는 이 문제 때문에 예수를 믿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의 생사를 주장하고 계십니다. 마르다는 거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습니다.  
  
둘째로, “그러나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2)했습니다. 이 말은 얼핏 듣기에는 지금이라도 예수님이 죽은 오라비를 살릴 수 있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런 말이 아닙니다. 이 마르다의 말 속에는 세 가지 부정적인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 마르다는 예수님을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로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무엇이든지’ 응답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과 같은 기도의 대상자는 아니다!” 예수님은 유능한 기도자시지만, 생사 문제는 어쩔 수 없는 기도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입니다. 오늘 우리 중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 이름을 빌려 오는 분으로만 알고, 예수님이 직접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시행하시는 줄은 모릅니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해 주시는 중보자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우리 기도를 직접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당사자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1:2-3) 예수님은 하늘과 땅과 사람을 만드시고, 온 우주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무엇이든지’라는 말입니다. ‘무엇이든지’라는 말은 복수형입니다. 얼핏 듣기에는 제한 없이 무엇이든지 응답된다는 뜻 같으나, 실상은 ‘단 한 가지’는 제외하고 있습니다. 바로 자기 오라비가 살아나는 일입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문제’, 다시 말해서 ‘죽은 자를 살려내는 일’은 제외하고, ‘일반적인 것들’은 ‘무엇이나’ 예수님이 기도하면 응답된다는 뜻입니다. 셋째, 마르다는 ‘믿나이다’하지 않고 ‘아나이다’ 했습니다. “죽은 내 오라비는 어쩔 수 없지만, 일반적인 것이야 지금이라도 예수님이 기도해주신다면 무엇이든지 이루어 질것을 알고 있습니다.” 안다는 말은 믿는다는 말보다 무기력하게 들립니다. 신앙은 믿는 것이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제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많이 알아도 믿지 않는 한 헛것입니다. 아는 자는 자기 삶을 맡기지 않아도, 믿는 사람은 자기 삶을 주님께 맡깁니다. 아는 자 속에는 생명이 없어도 믿는 자 속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아는 자는 소망이 없지만 믿는 자는 소망을 가집니다. 여러분은 아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24) 했습니다. 예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23) 하시니까 마르다는 이 말씀을 조문객들이 상투적으로 하는 말로 알았습니다. 우리도 성도 집에 조문 가서 흔히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품에 가셨으니 위로 받으세요’ ‘부활의 날에 다시 만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도 부활을 믿었습니다. 지금도 예루살렘 동편 감람산 기슭에는 유대인들의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메시야가 오면 예루살렘성 동쪽 황금 문으로 들어오시고 그 때에 죽은 자들이 부활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마르다는 이러한 유대인들의 교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내가 믿나이다’ 하지 않고 ‘내가 아나이다’했습니다. 마르다는 유대인으로서 교리적인 부활을 알고 있지만 그것은 먼 장래의 일이고, 지금이야 당장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까닭은 종말적인 부활과 영생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목적이 순전히 미래에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현세에서부터,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시작케 하시고, 우리의 생각과 사상을 움직이시고, 하루하루 일과를 주장하십니다. 악의 구렁에서 지키시고, 사탄의 유혹을 막아 주십니다. 불의의 재앙과 환란에서, 혹은 강도나 도적에서, 죽을 병에서, 수 많은 죽음에서 보호해 주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편)
  
주님과 마르다의 대화를 통해서, 마르다의 예수님께 대한 믿음의 정도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오라버니가 병상에 있을 때 주님이 오셨더라면 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사 문제는 주님도 별 수 없습니다.  다만 주님은 지금 남아 있는 유족들에게는 상당한 위로가 되시고, 기도로 많은 도움을 주실 것입니다. 오라비에 대하여는 장차 종말에 부활할 것이나 기대해 보겠습니다.” 주님을 제한적으로 믿습니다. 이러한 마르다에게 주님은 과연 무엇을 주실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의 인류사적 선언

예수님은 마르다 앞에서 인류사 최대의 선언을 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25-26) 이것은 죽은 나사로를 애도하는 위로의 말이 아닙니다. 오늘날 무덤에 누워 있거나, 혹은 흙으로 돌아간 무수한 인생들에게 하시는 선언입니다. 이 말씀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봅니다.
  
첫째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25) 하셨습니다. ‘내가 부활을 주며 생명을 주리라’ 하지 않으시고 ‘내가 그 부활이요 그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주는 분이기 이전에 부활 능력 자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이전에 생명 자체십니다. 이 말은 예수를 소유하면 이미 부활의 능력을 가진 자요, 예수를 마음에 모신 자는 이미 영생을 소유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오늘 여러분 속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미 부활의 능력을 소유하셨고, 영생을 소유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는 분으로 믿기 이전에, 예수 자신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재산이 된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무엇을 주신다고 말하지 않고 ‘예수가 곧 무엇이다’라고 말합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라’(6:35), ‘나는 세상의 빛이라’(8:12),  ‘나는 양의 문이라’(10:7,9), ‘나는 선한 목자라’(10:11,14),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14:6), ‘나는 참 포도나무라’(15:1,5)
  
마르다는 예수님이 기도해 주셨더라면 오라비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분이요, 생명 자체십니다. 나사로가 비록 죽어서 썩어버렸을지라도 예수가 그에게 있는 한 그는 살아납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먼 장래뿐 아니라 지금 당장에라도 살아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수많은 죽음에서 우리를 살려 내고 계십니다. 죽을 병에서, 전쟁에서, 독약에서, 강도의 칼에서, 불의의 사고에서, 재앙에서. 지금도 우리를 살리시는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25-26) 하셨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육체적으로 죽을지라도 다시 살아난다는 뜻이요, 동시에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 금생에서 예수를 믿는 자는 영혼이 영원히 죽지 않는 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성경은 죽음을 소멸로 보지 않습니다. 죽음을 다만 ‘나뉨’으로 봅니다. 육체적 죽음이란 우리의 육체가 영혼과 잠시 나뉘는 것이요, 영혼의 죽음이란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나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육체는 종말에 다시 우리 영혼과 재결합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든 불신자이든 육체적으로 본다면 다 같이 부활합니다. 영원히 병들지 않고 죽지 않고 썩지 않는 몸으로 부활합니다. 그리고 영혼과 재결합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모든 인생들은 不死(immortality)的이요 영생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부활 이후에 있습니다. 거기서부터 신자와 불신자의 상황이 달라집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고,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영원히 나뉘게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영생이라 하고, 하나님과 영원히 결별하는 것을 성경은 둘째 사망, 혹은 영적 사망이라 부릅니다. 이 영적 사망자들이 사는 곳을 지옥이라 합니다. 

지옥이란 어떤 곳인가? 바로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사는 곳이요, 하나님이 상관치 않고 버려두신 곳이 곧 지옥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을 떠난 모든 사람들의 삶은 결국 지옥의 삶입니다. 하나님 없는 영혼이 지옥이요, 하나님 없는 가정이 지옥이요, 하나님 없는 교회가 지옥이요, 하나님 없는 사회가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지옥에 가려고 특별히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지옥행입니다. 주 안에 있다면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육체의 죽음과 상관없이 영혼이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 중에 중요한 것은 ‘부활’이 아니라, ‘영생’입니다. 우리는 신 불신을 막론하고 육체적으로 다 부활합니다. 문제는 그 부활 이후에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몸은 부활했지만 그 몸과 영혼이 지옥에 떨어진다면 우리의 부활은 오히려 불행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몸이 부활해서 몸과 영혼이 하나님 품에 살게 된다면 우리의 부활은 영원한 행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서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본문에는 ‘살아서’ 라는 말과 ‘믿는’이라는 말이 하나의 정관사에 붙어 있습니다. “oJ zw'n kai; pisteuvwn”  신앙이란 삶과 믿음의 결합입니다. ‘살아서 믿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살아서 믿는 자는 믿는 순간부터 그 영혼이 하나님의 품에 살게 됩니다.  육체가 죽을지라도 그 영혼은 늘 하나님과 함께 삽니다. 그러니 죽어도 사는 것이요, 조만간 육체가 부활하는 때에는 영혼과 육체가 함께 하나님 품에서 살게 됩니다.
  
셋째로, “이것을 네가 믿느냐?”(26)고 하셨습니다. ‘네가 아느냐?’ 하지 않으시고, ‘네가 믿느냐?’ 하셨습니다. 진리를 아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아는 자에게 역사하지 않으시고, 믿는 자에게 역사하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르다의 신앙고백

마르다는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즉시 ‘내가 믿나이다’ 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 앞서서 마르다는 ‘내가 아나이다’ 했는데, 이제는 ‘내가 믿나이다’로 변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짧은 시간이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한 단계 높아졌습니다. 여기서 마르다가 고백한 신앙의 내용은 더욱 중요합니다.  
  
마르다의 고백은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로, 주는 그리스도시라는 고백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입니다. 셋째는, ‘세상에 오시는’ 이라는 고백입니다. 세상에 오신다는 말은 구약에 선지자들이 오리라고 예언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주’ ‘그리스도’‘하나님의 아들’‘세상에 오시는 분’ 이 모든 고백들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밝히려고 하신 자신의 신분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물으신 것도 바로 이 고백을 받아 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최종적으로 밝히려고 한 것도, 바로 예수가 누구신가 하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오늘 마르다는 이 중대한 고백들을 단숨에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마르다처럼 제한적인 신앙으로 예수를 맞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한 단계 높이시기 바랍니다. 마르다는 오라비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과의 인간적 관계를 신앙적 관계로 끌어 올렸습니다. 오늘 죽음에 직면하셨습니까? 죽음은 영생에 이르는 최고의 신앙 수련장입니다. 죽음의 고난을 통해서 예수님과의 인간적 관계를 신앙적 관계로 끌어 올리시기 바랍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윤리적 스승에서 인생의 구주로 바꿨습니다. 오늘 우리도 윤리적 차원의 스승 예수에서 나의 구주이신 예수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주는 나의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는 믿습니다.” 이 고백으로 모든 사망에서 건짐 받는 참 생명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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