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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롭고 산 길 (히 10: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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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고 산 길 (히브리서 10:19-20)

엑소도스는 애굽을 탈출한 히브리인들의 해방의 길이었고 과거를 떨처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감격과 기쁨으로 애굽을 박차고 나온 그 길은 홍해를 앞에 둔 광야의 길이었습니다(출13:17,18).   기적을 체험하며 애굽을 떠난 히브리인들은 지긋지긋한 종살이가 끝났고 이제부터는 자유로운 세상 신천지가 우리 앞에 열릴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출애굽한 히브리인들 앞에는 금방 광야가 나타났고 곧 이어 홍해가 앞을 가로막았으며 뒤에는 바로의 마병 군대가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식민통치 아래 살던 우리 어른들이 해방을 만났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요?   일본의 압제로부터 벗어났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후련하고 행복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일본인 순사 눈치를 안보고 살게 되었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후 모든 일이 순조롭고 만사형통이었습니까? 해방의 기쁨은 잠시였습니다.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우리 민족 앞에는 동족을 둘로 가르는 사상의 분열과 6.25동란이라는 거친 광야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이런 것이 우리가 걷는  인생의 길인데 우리가 애써 무시하거나 원하지 않고 신나는 신천지만 기대하는 것은 아닐까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걸었던 홍해의 길과 광야의 길로부터 우리는 소중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엑소도스를 체험한 그 백성이 편한 길 대신 곧장 홍해와 광야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신 8:2)   출애굽한 히브리인들은 광야의 생활을 통해 버릴 것은 버리고 배울 것은 배워야 하는 훈련의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과정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한 원리로 적용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성도들은 엑소도스를 경험한 사람들이며 새로운 삶의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인들로 하여금 홍해를 통과하게 하신 새로운 길 엑소도스는 신약의 세례와 연관이 있습니다. 홍해 사건은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이 물속에 그들의 과거를 수장시키고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났음을 깨닫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적인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홍해라는 물에서 그들의 과거를 씻었고 수장시켰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의 죄악된 과거는 거기서 죽었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어야 했습니다. 반대로 이스라엘을 뒤쫒던 바로의 마병군대는 거기서 죽임을 당하였고 다시는 이스라엘을 추격하고 괴롭힐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홍해 사건을 가리켜 우리의 조상들이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고전10:1,2).  세례는 이처럼 죄에게 붙들렸던 과거를 씻고 거기에 수장시키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과거의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고 주의 피로 씻음받은 새로운 내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성도 여러분은 더 이상 지난 날의 죄된 삶에 붙들려 살지 맙시다. 죄에 붙들려 종노릇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붙잡혀 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통과하였으니 그 다음부터는 길이 훤이 열리고 만사가 형통이었을까요?   곧이어 거친 광야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구름과 불기둥이 그들의 앞길을 인도하고 있었지만 그 길은 어린이와 노약자들을 데리고 걷기에는 너무나 험하고 거친 길이었습니다. 그곳에는 마실 물이 없었고 쉴만한 그늘도 없는 고통의 장소였습니다. 홍해를 건넌 후 춤추며 불렀던 기쁨의 찬송은 금방 원망과 불평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은 마실 물이 없다고 부르짖는 백성들을 위해 반석에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셨습니다.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이 떨어졌을 때 아침마다 하늘의 만나를 공급하셨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신령한 양식과 음료를 먹고 마시며 광야를 걸었습니다.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던 광야의 길,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열려진 새 길을 걸었습니다.

신작로라는 말 들어보았습니까? 어른들은 잘 알지만 젊은 세대는 모를 수도 있는 용어입니다.   어릴 때 걸었던 신작로가 생각납니다.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 아주 어린 시절에 어른들이 하는 말을 따라 했으니 그 뜻을 제대로 알 수 없었습니다. 좀 더 자란 후 그 의미를 알게 되기 전까지는 어른들이 왜 동네 밖에 있는 큰 길을 내가 다니는 교회 박 장로님 김 장로님처럼 신 장로라고 부르는지 이상하기는 했었습니다.   

신.작.로(新作路)는 말 그대로 새로 만든 길입니다.   지금처럼 포장이 잘 되고 차선이 그어진 넓은 길이 아닙니다. 동네 길보다는 훨씬 넓고 자동차들이 여유있게 비켜 갈 수 있는 정도의 넓은 길이었고 자갈이 깔린 도로였습니다.  버스가 지나가면 먼지가 풀풀 날려 가던길 멈추고 뒤돌아서 뽀얀 먼지가 사라질 때까지 코와 입을 가리고 기다려야 했던 비포장도로였습니다.   

중학생 시절에는 친구들과 버스를 타고 다른 동네에 갈 때 일부러 맨 뒷줄에 앉아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진동에 맞춰 엉덩이가 펄쩍펄쩍 뛰는 것이 재밌어 시시덕 거리기도 했습니다. 격세지감이라고 지금은 우리나라 도로사정이 얼마나 놀랍게 변했습니까?  몇 년 만에 고국을 방문하여 지방을 다녀보면 길을 시원하게 너무 잘 닦아놓다 못해 시골 논밭과 계곡을 가로질러 뚫어놓은 거대한 콘크리트 고가도로와 교각들은 아기자기했던 자연 풍경을 망쳐놓아 흉측하게 보일 정도입니다.    

어제 신문을 보니 경춘고속도로에서 길이 막히자 빨리 가려고 갓길로 주행하던 운전자가 연쇄 추돌사고를 내고 본인은 그 사고로 숨졌다고 합니다. 남보다 빨리 가려고 법을 어기면서 무리하게 들어선 어떤 길은 이렇게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길이 되고 맙니다.   길이라고 모두 생명길은 아닙니다.    

땅과 바다에 길이 있고 하늘에도 길이 있어 정해진 길을 따라 운행합니다.  구름 없이 맑은 날 하늘에 수놓아진 비행기 구름을 보면 꼬리에서 뿜어나온 비행운을 보면 무질서하게 그려진 것 같지만  비행기들이 하늘길을 따라 곧바르게 이동한 흔적입니다.  항로를 벗어난 배와 비행기들이 자기 길로 돌아서지 않으면 조난사고를 당합니다.   항로를 벗어난 인생길도 멀지 않아 위험을 만납니다.  속히 항로를 수정하지 않으면 영원한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맙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제시하신 구원의 길은 오직 한 길 뿐입니다. 비슷하게 보이는 길, 그럴듯하게 포장된 길들이 사방으로 뚫려있지만 생명으로 가는 길은 오직 한 길 뿐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먼저 걸으셨고 열어놓으신 새로운 길이며 산 길입니다.  오늘 읽은 히브리서의 말씀이 우리에게 그 길을 보여주고 따라오라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자기 몸을 단번에 희생제물로 드림으로 구약의 제사를 완전히 이루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 값으신 사건입니다.   제사장들은 매일 아침 똑같은 제사를 반복하여 드리지만 사람의 죄를 아주 없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한 번의 제사를 드리셨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이전에는 제사장들만 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오직 대제사장만 전체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휘장을 열고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했으며 감히 성소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갈 특권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화해하신 자기 백성들과 함께 교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열어놓으신 새로운 길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만 임시로 만들어 놓은 길이었습니다. 짐승의 피를 드리는 제사는 오래되어 낡고 사라져가는 방식이었고 이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이 새로운 길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는 산 길이십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죽은 짐승의 피를 들고 휘장을 지나 지성소로 들어갔지만 우리는 영원히 살아계신 큰 대제사장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갑니다. 이제 우리는 생명 없는 동물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고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통해 나아갑니다.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림으로 속죄를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우리가 각자 담대하게 성소에 들어갈 자격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길은 아들의 피, 아들의 생명을 대신하여 영원히 죽을 죄인들에게 열어주신 생명의 길이며,  새생명을 얻게 하시는  산 길입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휘장을 지나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같은 방법으로 우리도 휘장을 지나 아버지께로 나아갑니다.  지성소를 향한 구약의 휘장은 사람의 손으로 짠 두툼한 커튼이지만 지금 우리가 열고 들어갈 그 휘장은 잔악한 로마 군병들에게 창으로 창으로 찔리고 못에 박혀 찢겨진 주님의 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갈라져 둘이 되는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했던 휘장은 더 이상 제사장과 백성을 구별하는 가로막힘이 아니었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들의 사이를 갈랐던 막힌 담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죄인들이 직접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찢긴 육체로 말미암아 그 확실한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서 매일마다 짐승을 잡아 그 피를 제단에 뿌리는 희생제사를 반복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어린양 예수께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단번에 희생의 피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진리와 생명과 길을 보여주고 앞장 서 걸으며 나를 따라오라 할 수는 있지만 어느 누구도 내가 곧 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라 하셨습니다(요14:6).  죄인들을 위해 찢겨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만 하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길 외에 다른 길을 주신 적이 없고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도 없습니다.   

모세에게 주신 첫 언약이 피로 세웠던 것처럼(히9:18) 새로운 언약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언약이었으니 피는 곧 생명입니다. 어떤 짐승의 희생이 없었다면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가죽옷이 없었고,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 없이 히브리인들의 장자들이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제단에서 피 흘려 죽은 희생제물 없이 죄사함이 없었고(히9:22)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가 아니고는 자기 힘으로 구원 얻을 어떤 의인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향한 오직 한 길입니다. 그 이름 외에 구원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   이 길이 새로운 길이며 산 길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앞장을 서셨고 제자들을 향해 나를 따르라 하신 길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것은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 삶입니다.    

애굽을 떠난 히브리인들이 구름과 불기둥의 안내를 받았지만 자기 발로 홍해를 지나고 광야를 걸어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내 발로 걸어야 할 길이 있습니다. 기쁜 찬송을 부르며 걷기도 하지만 고통의 눈물을 흘리며 따라가야 할 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길에 항상 주님이 동행하십니다.      

네비게이션의 길 안내를 보며 맘놓고 따라가지만 네비게이션이 대신 운전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 좋은 기계는 공사구간 표시나 정체 구간을 예고하고 지연될 시간도 알려주며 우회도로를 찾아주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빨리 갈 수 있게 그 사이에 공사를 마치거나 밀린 자동차들을 치워주지는 않습니다.  그 길만이 목적지를 향한 유일한 길이라면 운전자와 승객은 참고 기다리며 따라가야 합니다.   구름과 불기둥도 준비하시고 양식과 물도 제공하시지만 광야는 내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험한 길, 쉬운 길 모두 내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욥23:11,12)   누가 이렇게 멋진 고백을 하였습니까?   갑작스런 재난으로 모든 것을 잃고 홀로 된 욥의 고백입니다.  욥은 내가 왜 이런 고난을 만나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앞길에 또 어떤 일이 있을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는 것은 분명히 알고 믿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누구에게나 앞에 광야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길을 통과한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안내를 따라 걸어봅시다.  

모세는 바로의 왕궁을 떠나 광야로 들어갔고 거기서 40년간 양을 치며 연단받았습니다. 그리고 가시떨기 불꽃 속에 임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기 백성을 구출하기 위해 애굽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 또한 광야의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의 추격을 피해 유대광야로 나갔던 다윗은 그 광야에서 피할 바위와 산성이 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는 훈련을 단단히 받았습니다. 

아합과 아세벨에 맞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갈멜산에서 기도하여 하나님의 불로 제단을 불태우고 그 땅에 비가 다시 내리는 기도의 응답을 받았던 선지자 엘리야도 광야의 사람이었습니다.  갈멜산의 기적을 체험한 엘리야에게 승리의 기쁨은 잠시였고 엘리야를 죽이려는 이세벨의 칼을 피하여 광야로 급히 도망쳐야만 했습니다.  성취감을 느긋하게 즐길 틈도 없이 광야로 달아나던 엘리야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허탈감을 견디지 못하고 탈진하여 광야의 로뎀나무 아래 누워버렸습니다.   지쳐 쓰러진 엘리야를 일으켜 위로하시고 새힘을 공급하신 하나님은 그가 달려가야 할 길을 또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였던 세례 요한도 광야로 나갔고 거기서 회개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습니다.  광야의 삶을 살았던 성경의 인물들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이 모든 분들이 광야의 삶을 소망 중에 걸었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도 광야로 나가셨으며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갈보리 십자가를 향한 고난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해 열어놓으신 길,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신 예수께서 닦아놓으신 새롭고 산 길입니다.   여러분이 도달해야할 목표가 분명히 정해졌다면 목표를 향해 열린 길을 힘있게 걸으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몸을 찢어 우리 앞에 열어놓으신 그 길을 따라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한 주간이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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