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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아주심 (신 1:2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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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아주심 (신 1:29-33)


지금 우리 교회는 신명기 말씀을 큐티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신명기 1장 말씀을 읽다가 유난히 내 마음을 사로잡는 말씀 한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31절에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가지고 한동안 깊이 묵상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안으셨는데, 마치 아비가 자식을 안는 것같이 안으셨다는 말씀이 바로 눈앞에 있는 커다랗고 선명한 글자처럼 제 마음에 확 들어와 닿았습니다. 

이 신명기는 죽음을 앞둔 모세가 이제 가나안 입성의 주역으로까지 성장한 것만이 복 받는 길임을 교훈하기 위해 주신 책입니다. 모세는 지난 날 그들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곧 애굽의 종된 데서 이곳 광야까지 이적과 기사로 인도하신 하나님이심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보다 한 세대 앞선 그들 선조들은 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반역하고, 불순종하므로 광야에서 멸망당한 아픈 과거역사를 신명기 말씀에서 상기시킵니다. 모세는 이제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 살 새세대들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 명령에 순종할 것을 권면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제반 규례와 율법을 반복하여 말하고, 또 새롭게 해석하고, 그들의 현재의 삶에 적용시킨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애굽을 떠나던 날-그것은 얼마나 대단한 민족적인 감격의 체험이었을까요? 노예의 사슬을 벗어 던지고 그들은 이제 자유의 새로운 세상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언약의 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애굽 땅을 벗어나자 마자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광야였습니다. 물론 처음에 광야를 대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크게 두려워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직선으로 광야를 가로질러 가면 불과 300Km에 불과한 길이었고 직선으로 쉼 없이 걸어가면 40일이면 갈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40일이 무려 40년이 된 것입니다. 좀 원색적인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뺑뺑이 쳐 돌리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광야 길의 체험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셔야 했을까요? 우리가 피상적으로 사고한다면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고생시키는 하나님이 잔인하신 분으로 이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 때문임을 분명히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430년 동안 이스라엘은 애굽에 종노릇을 한 백성들입니다. 430년 동안 그들을 지배했던 노예문화가 있었습니다. 노예문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오늘만 무사히 편하게, 잘 먹고 잘 살자 입니다. 그러다 보니 책임성도 없고 공동체성도 없는 것이 노예근성입니다. 이 노예근성은 하루아침에 뽑혀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뽑혀져야 하나님의 세계를 보고 하나님의 뜻 앞에 바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학교에서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연단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하나님은 40일만 안으면 될 걸 40년이나 안으셨습니다. 누가 더 힘들었지요? 길을 가는 백성들보다 하나님이 더 힘든 광야 길이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지치지 않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시고 40년 동안 안고 그 광야 길을 가신 것입니다. 세상에 어느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들이 힘들어 할 때, 위험할 때, 아플 때, 모른척하거나 도망가겠습니까? 악한 부모라고 할지라도 안아 가슴에 품든지 등에 업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아버지가 버릴지라도 버리지 않는다고 하신 하나님은 버려두거나 모른 채 하지 않고 안아주시고 인도하십니다. 

30년 전 핏덩이 채로 스웨덴에 입양된 고아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옷에는 ‘박서애’라는 명찰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애는 스웨덴에 도착하는 순간 더 이상 서애일 수가 없었습니다. 양부모가 이미 지어놓은 ‘아스트리드 트로직’이라는 이름으로 스웨덴에서 살다가 24세가 되던 해에 자기를 버렸던, 조국이면서도 조국이 아니기도 한 대한민국을 처음으로 찾았습니다. 그리고 조국이 아니면서도 조국인 스웨덴으로 되돌아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는데, 그 책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친 엄마는 나를 정말로 사랑했다. 그러나 엄마는 내가 살아남도록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나를 버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엄마의 마음과는 달리.......’ 

자기를 버린 비정한 친어머니를 자기를 사랑했기 때문에 버렸을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용납하고 수용하며 이해하고 납득하기까지 그녀가 삼켜야 했던 배신감과 고통의 아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았던 고아가 설령 어머니를 용납하고 화해와 용서를 선포했다 할지라도 자기 자기자식을 버렸던 어머니의 행동은 정당화되지도 않고 정당화될 수도 없고 또 정당화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미가 자기 자식을 버릴 때 왜 사정이 없었겠습니까? 왜 이유가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정과 이유가 어떠하든지 간에 부모가 자식을 버린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잖습니까? 

사49:15에 보시면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여인이 자기가 난 자식은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겠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집념으로 얻어진 결실이 바로 이 자리에 함께 한 여러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민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인생길이 쉽지 않기에 이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품에 안겨도 별로 실감이 안나요. 그래서 문제를 만나면 흔들리는 것입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맥그래스 교수가 쓴 『내 평생에 가는 길』이란 책에서 인생을 묘사한 한 구절이 참으로 제 마음에 와 닿습니다. ?짧고 상쾌한 산책일 줄 알았던 것이 미처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마라톤으로 바뀐다.? 어린 시절, 철이 없을 때는 인생이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걷는 산책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좀 더 걷다 보면 미처 준비가 안 된 채 달려야 하는 마라톤이 되어 버립니다. 이 마라톤을 달리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쳐 쓰러지는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탈락하는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절망에 빠지는지요. 이것이 우리가 가는 인생길입니다. 

지금 모세는 광야를 "그 크고 두려운 광야"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지나온 광야에 많은 위험과 어마어마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자연히 그 광야에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출애굽기 15장을 보면 물을 구하지 못해 모세에게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봅니다.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며칠을 굶었는지 모르지만 배가 고파 못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마실 물이 전혀 없어 어린아이들도 물을 달라고 엉엉 웁니다. 짐승들은 픽픽 쓰러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성을 잃고 맙니다. 나중에는 모세를 향해 돌을 던질 것 같은 정말 기막힌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며칠에 한 번씩 천막을 쳤다 걷었다 하는 불안정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여행의 연속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그들 안에서도 분쟁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늘 불안하고 지루하고 힘들고 짜증스러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눈에는 광야생활이 하나님 품에 안겨서 걸어가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죽지 못해 끌려가는 삶이었습니다. 하루하루가 고되었습니다. 이러니 모세가 ?너희는 지난 세월 동안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겨서 이 광야를 지나왔다?고 해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가 과장된 소리를 하는 것으로, 거짓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모세는 이처럼 험난한 광야생활을 놓고 백성들과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모세가 혼자만 구름을 타고 다닌 건 아니지 않습니까? 백성들과 똑같이 고생하면서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어쩌면 백성들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80세가 넘은 고령에, 광야에서 수백만 명의 생사를 책임져야 하는 지도자의 자리는 피를 말리는 위치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광야 여정을 고난의 통로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걷는 은혜의 통로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상황을 보는 시각이 달랐습니다. 백성들은 숨막히는 환경만 쳐다보며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눈을 고정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래의 것, 곧 눈앞의 현실을 쳐다보고 있는 반면, 모세는 위의 것, 곧 하나님의 약속을 쳐다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의 차이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여기 32절에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무슨 말입니까? 모세는 광야 길에서 자신과 민족을 안으신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지만, 백성들은 환경과 상황만을 보고 원망과 불평을 쏟아 놓은 것입니다. 결국 믿음의 차이입니다. 

저는 광야의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그 근본 문제는 결국 믿음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이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홍해를 여시던 하나님, 반석을 열어 물을 주시던 하나님, 마라의 쓴 물을 치유하시던 하나님,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던 하나님을 아직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들만의 문제일까요? 우리는 성경의 하나님, 기적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늘 고백하지만 자신의 인생에서 다시 어려움을 경험하게 되면 오늘의 나의 어려움 앞에서는 다시 믿음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습니까? 다시 믿음 없는 사람처럼 말하지 않습니까? 어제는 믿었는데 오늘은 또 다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샤를르 푸코라는 군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하라 사막에 들어가 선교하다가 원주민이 쏜 총에 순교했습니다. 그분이 쓴 <사하라의 불꽃>이라는 책에서 그는 이렇게 반문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이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쉽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합니까? 그런데도 왜 그리스도인들이, 현실적인 삶 속에서 성경과 전혀 동떨어진 행동을 합니까? 그 순간 그 자리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하는 만큼 그 사실을 내가 인식하며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경건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집중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였습니다. 아무도 없는 빈들에서 죽였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쌓인 가인에게는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철저하게 경외하던 다윗은 남의 아내를 데리고 궁중의 밀실에서 통정했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욕정 앞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애굽에 도망갔을 때 아무도 위협하지 않는 가운데 스스로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일가친척을 떠나는 용단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객지의 까닭 없는 두려움 앞에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그분을 인식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아무리 선교와 봉사 그리고 섬김의 행위를 아름답게 행한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치밀어 오르는 감정 앞에서, 욕정 앞에서, 두려움 앞에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은 바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갖고 살아가는 그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을 보세요 경제가 휘청거린다고 합니다. 정부를 믿을 수가 없고, 정치하는 사람들의 말을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온 세상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불신의 덩어리로 화해 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젊은이들대로 미칠 듯이 제 갈 길을 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즘 우리 기독교를 아주 말살하려는 종자연 이라는 불교의 음흉한 세력들이 있고, 방송 매체에서는 이단과 사이비들을 기독교로 매도해서 그들의 비리를 마치 기독교의 문제인 냥 매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엄청난 사람들이 동조해서 마치 우리 기독교가 비리와 부패의 온상인 냥 믿는 사람마져도 교회를 떠나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환경과 영적 세력이 우리를 흔들어대도 결코 우리를 꺾지 못할 줄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이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품에 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 광야 백성들이 40년 동안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았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를 만날 때 마다 원망과 불평입니다. 이 믿음의 눈이 안 열리니까 이 광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정말 두려운 현장입니다. 29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지금 모세는 왜 우리로 하여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을 합니까? 

첫째, 갈 길을 앞서 인도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30절에 "너희 앞서 행하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목자가 언제나 양의 앞에서 갈 길을 인도하듯 하나님은 우리 앞에서 갈 길을 지시해 주십니다. 그래서 모세는 여호와를 가리켜 30절에 "너희 앞서 행하시는 너희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우리 갈 길이라도 우리가 제대로 모르고 그래서 헤메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전지하신 하나님으로서 우리보다 더 우리 앞길을 환히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또 우리는 알았다 해도 우리들의 능력에 한계가 있어서 어떻게 행해야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능력도 무한하셔서 우리보다 앞서 가셔서 우리를 위해 행하십니다. 또 더욱 감사되는 것은 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 앞서 행하십니다. 이는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들로 광야 같은 세상에서 길을 잃고 헤매지 않도록 안전한 길을 지시하고 보호하시기 위함입니다. 

둘째, 우리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길을 인도만하시는 것이 아니라, 본문에 보면 친히 장막을 치고 머물러 쉴 곳도 찾아 주십니다. 33절에 "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 여기에 "찾으신다"라는 말은 "이리저리 다니다", "정탐하다", "자세히 조사하고 살피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목자가 양을 위해 맑은 물과 푸른 풀밭을 이리저리 다니며 자세히 살피며 찾듯 하나님도 우리를 위해 가장 안전하고 평온한 곳, 쉴만한 물가, 푸른 초장을 찾으시고 예비하여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를 믿어야합니다. 무시무시한 맹수들과 대적들이 있고, 더위와 추위로도 몸이 상하고 지쳐서 더 나아갈 수 없는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전히 장막치고 거처할 곳이 필요한 것도 하나님께서 아시고 앞서 행하셨습니다. 

셋째,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가 되셔서 광야의 여정을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광야에는 길이 없습니다. 동서남북을 분간하기도 막막하고 어려운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친히 그 여정을 진두지휘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이 은혜와 인도가 없이 우리 역시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를 안으시고 인도하시는 그 하나님 앞에 좀 담대하게, 당당하게 나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성경을 보면 참 많은 명령들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제일 많이 하신 명령은 ?두려워 말라?입니다. 신명기에서도 중요한 고비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반복해서 ?두려워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넓은 품에 안겨서 광야를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크고 따뜻한 아빠의 품에 안긴 어린아이가 공포에 질려 벌벌 떠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는 자녀는 떨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살아갈 일이 아득해서 공포가 몰려옵니까? 앞날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 두렵습니까? 앞이 캄캄해서 전혀 보이지 않습니까? 믿음으로 나 자신을 향해서 선포합시다. 세상을 향해서 선포합시다. 하늘을 향해서도 선포합시다. 땅을 향해서도 선포합시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는 사람이야!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야! 내 영혼아 두려워 말라!? 이렇게 할 때 우리를 두렵게 하는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우리 앞에 반석이 갈라져 생수가 솟는 기적을 볼 것입니다. 우리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만나를 먹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것입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길을 열어 주는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침!! 묻습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눈을 들어 하늘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보면 비참해질 수밖에 없고, 이웃을 보면 원망을 할 수 밖에 없고, 어두운 현실을 바라보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보면 하나님이 나를 여전히ㅡ안으시고 인생의 여정을 이끌어 가시는 그 깊은 은혜를 알게 됩니다. 주님은 반드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광야생활을 승리로 끝나게 하시고,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복락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지금 삶의 현장에서 꼭 체험하며 사는 복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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