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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복의 때는 옵니다 (호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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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의 때는 옵니다 (호 1:1-11)

< 인간적인 야망을 멀리하십시오 >   

요즘 방영되는 <추적자>란 드라마는 많은 도전적인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그 드라마에 나오는 대통령 후보 강동윤은 야망의 화신입니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사랑도 팔고 거짓말도 불사합니다. 양심도 없습니다. 그에게는 성공이 양심입니다. 그가 말합니다. “마차가 먼 길을 가다 보면 그 바퀴에 깔려죽는 벌레들도 있다.” 그에게 국민들은 얼마든지 깔려죽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얼마나 섬뜩한 얘기입니까? 성공 추구가 잘못은 아니지만 강동윤처럼 성공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종교계에도 그런 야망의 화신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역사상 가톨릭교회의 교황 중에는 강동윤 같은 야망의 화신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베드로성당 건축을 시작한 율리우스 2세(Julius II)입니다. 그는 1443년 제네바 인근 농촌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야망성취를 위해 누군가 깔려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출세를 향해 달린 끝에 마침내 1503년 만 60세에 교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교황이었지만 줄리어스 시저를 숭배해서 교황청을 그의 상징물로 도배했습니다. 그는 저돌적이고 성격이 불같아서 조폭 두목이 서러울 정도였고 짜증나면 측근조차도 주먹이나 지팡이로 마구 두들겨 팼습니다. 1506년에는 페루자와 볼로냐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직접 추기경 26명과 교황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가서 ‘전사 교황’이란 별명까지 붙었고 프랑스와의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는 직접 전투를 지휘했습니다.   

1509년 프랑스 군과의 전쟁 중에는 매독과 학질로 거의 죽다 살아나면서 반대파로부터 ‘율(Jul) 매독’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당시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목표는 이태리의 점령이 아니라 자신의 야망과 권력욕을 위해 신자들을 무참히 짓밟는 악질 교황의 폐위였습니다. 그때 교황 한 명만 물러나면 전쟁이 끝날 수 있었지만 교황은 프랑스 군에 대해 무도한 야만인이란 딱지를 붙이고 수많은 시민들과 교황 군대를 희생시키고 프랑스 뒤에 포진한 스페인과 영국을 사주해 마침내 프랑스 군을 철수시켰습니다. 

프랑스 군이 철수하자 군중들은 프랑스 야만인을 로마에서 쫓아내는데 교황이 큰 역할을 했다고 뜨겁게 환호했고 시인들은 앞 다퉈 헌시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1513년 그가 죽자 죽은 그의 발에 먼저 키스하려고 군중들 사이에 다툼까지 벌어졌습니다. 마차를 타고 먼 길을 갈 때 깔려죽을 수 있는 벌레처럼 여겨졌던 대중은 그를 그토록 사모했습니다. 군중심리가 그처럼 무섭고 어리석은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야망을 가진 종교 리더가 가톨릭교회에만 있습니까? 교황에 비하면 새 발의 피와 같지만 기독교 내에서도 교황처럼 행세하려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야망의 마차를 타고 먼 길을 갈 때는 그 바퀴에 깔려죽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래도 순수하고 착한 성도들은 눈물로 그런 목회자를 위해 기도해줍니다. 외부에서는 그 어리석음이 다 보이는데 내부에서는 그것을 못 보는 것이 문제입니다. 

목회자의 야망의 길에 꽃단장을 깔아주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현세에도 삶의 의미를 못 찾고 내세에도 상급을 못 찾습니다.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그런 불행이 없도록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거부하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 군중심리에 휩쓸려서 인생을 낭비하고 결국 야망을 가진 목회자의 화려한 언사에 이용만 다니다가 깔려죽으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야망을 가진 목회자가 야망을 이루려고 교회성장을 추구할 때는 아주 저돌적입니다. 그들은 작은 교회의 형편은 상관하지도 않습니다. 작은 교회 목회자들은 먼 길을 가는데 밟혀죽을 수 있는 벌레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목회자들도 나머지 인생 전체를 걸고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선 하나님의 종들인데 그들의 한이 하늘에 사무치게 하면서까지 성공하는 것이 과연 진짜 성공일까요? 어불성설입니다. 

어느 날, 한 대형교회에서 ‘아무개 학교’란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에서 말씀도 전하고 세족식도 하고 사랑의 편지도 쓰고 며칠 동안 여러 가지 감정적인 사랑을 느끼게 해주면 참석자들은 눈물도 흘리고 변화된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프로그램이 좋다고 소문이 나니까 목회자들은 자기 교인들을 좋은 사람 만들어달라고 그 프로그램에 보냅니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이 확산되고 각 지역마다 지부가 생기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즉 그 프로그램을 위한 활동과 교제가 교회 활동과 교제보다 앞서게 되는 문제입니다. 그러다가 그 큰 교회에서 어떤 지역에 지교회를 세우면 그 프로그램의 참여자들 상당수가 그 교회로 옮깁니다. 동시에 그 지역에서 기존 교회에 욕구불만을 가진 성도들이 대거 합류하면서 그 교회의 지교회가 생길 때마다 근처의 수많은 교회들이 성도를 빼앗기고 타격을 받습니다.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해서 성도들을 보냈다가 뒤통수를 맞은 셈입니다.  

그처럼 아버지 학교로 보냈더니 남자 교인들을 뺏기고, 어머니 학교로 보냈더니 여자 교인들을 뺏기고, 청소년 학교로 보냈더니 청소년 인재들을 뺏기고, 기도 학교로 보냈더니 기도 교인들을 뺏기고, 큐티 학교로 보냈더니 큐티 교인들을 뺏기고, 결혼 학교를 보냈더니 청년 부부들을 뺏기고, 찬양 학교로 보냈더니 찬양 교인들을 뺏깁니다. 그러니까 자기 교인들이 어떤 집회와 프로그램에 간다고 하면 불안해하는 목사님들이 많습니다.
  

< 오명을 얻지 마십시오 >   

옛날에는 이단 집회에 가면 불안해했는데 요새는 좋다는 프로그램에 가는 것도 걱정해야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목회 윤리의 실종 때문입니다. 그처럼 목회 윤리를 내세우면 큰 교회 목사님들은 말합니다. “누가 성도들을 빼앗습니까? 은혜가 넘치기에 그들이 자발적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새들도 먹이를 따라 국경을 넘는데 성도가 은혜를 따라 교회를 옮기는 것이 뭐가 잘못입니까?”  

교회 옮기는 것이 죄나 잘못은 아닙니다. 사명과 은혜를 따라 옮겨도 됩니다. 그러나 옮기는 과정에서 윤리와 철학과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려고 옮기면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오히려 칭찬하고 존경합니다. 그러나 따뜻한 양지를 찾아서 옮기면 철새와 해바라기란 소리를 듣습니다. 왜 사람들이 힘 있는 여당에서 힘없는 야당으로 옮기는 것은 용납하지만 힘없는 야당에서 힘 있는 여당으로 가는 것은 무섭게 비판합니까? 철새와 해바라기는 싫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도 역시 철새와 해바라기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곳으로 가서 무슨 축복과 상급을 기대하겠습니까? 결국 문제는 좋은 프로그램으로 성도를 보내도 찜찜한 마음이 들게 하는 야심가형 초대형 교회 목회자의 윤리 의식이 문제입니다. 결국 성도가 교회를 옮기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목회자가 야망을 가지고 나누기보다는 뺏기에 열중하는 것이 잘못입니다. 그런 오명을 얻더라도 기필코 교회를 키우고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목회자가 의외로 많습니다. 상처뿐인 영광과 오명뿐인 성공이 그토록 좋을까요?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자기 권세를 과시하려고 초대형 베드로 성당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건축비가 모자라니까 돈을 받고 죄를 사해주는 면죄부가 등장했습니다. 그러자 루터는 그 교황을 술탄보다 더 사악한 사단의 괴수라고 하며 결국 일부 독일 제후들의 도움으로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신교가 등장한 것입니다.  

그렇게 면죄부까지 팔면서 100여년 만에 베드로 성당 건축은 끝냈지만 교황 율리우스 2세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분열의 단초를 제공하는 찬란한 오명을 남겼습니다. 또한 곳곳에서 벌어진 신구교의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까? 결과적으로 보면 대형 성당 하나를 무리하게 건축하다가 수천 만 명을 죽인 셈입니다.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에도 강동윤이나 율리우스 2세와 같은 목회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엄청난 재원으로 나눔을 선도해 찬란한 명망을 남기지 않고 엄청난 건축을 단행하며 찬란한 오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주님 냄새보다 강동윤 냄새가 더 납니다. 그는 몇 만 명 교회의 목사란 위치가 좋은 이름을 남겨줄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역사를 보면 그런 생각이 얼마나 허무한 생각입니까?   

가톨릭교회는 전 세계 교회가 하나이고 나머지는 다 지교회이기에 교황은 11억 가톨릭교회의 담임목사인 셈입니다. 그 앞에서 몇 만 명 교회의 담임목사란 타이틀은 명함도 내밀지 못합니다. 교황이 양떼 숫자가 많아서 명망을 얻습니까? 아닙니다. 양떼 숫자가 많은데 잘못 행동하면 더 큰 오명만 얻습니다. 율리우스 2세는 평범한 어부의 아들로 교황까지 되어 야망을 이뤘고 죽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발에 경쟁적으로 키스했지만 그가 성공한 인생입니까? 역사적으로 찬란한 오명을 남긴 그는 실패한 인생입니다.  

그런 엄중한 역사를 보고도 몇 만 명 교회의 담임목사란 타이틀에 현혹되어 많은 불신자들에게 교회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주어 전도를 막고 심지어는 수많은 성도들까지 염려의 눈길로 지켜보는 초대형 교회 건축을 무리하게 진행시키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렇게 건축을 끝내도 교황처럼 죽을 때까지 담임목사로 있는 것도 아니라 얼마 후에는 은퇴해야 합니다. 그래도 왜 무리한 건축을 밀어붙입니까? 먼 길을 마차를 타고 가다가 벌레가 깔려죽어도 자기 야망을 꼭 성취해야 하는 강동윤이기 때문입니다.  

오명뿐인 성공이 되어도 강동윤은 사람들이 대부분 비판하고 심지어는 자기 교인들조차 상당수 비판하는 그런 초대형 교회 건축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개는 짖어도 기차는 간다!”고 하며 무리한 건축을 밀어붙일 수 있지만 그런 인간적인 야망을 하나님이 그냥 두고 보시겠습니까? 바른 여론을 두려워할 줄 알고, 엄중한 역사를 두려워할 줄 알고, 무엇보다 공의의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왕좌를 거절하고 십자가를 지고 다 나눠주셨기에 인류의 영원한 주님이 될 수 있었습니다. 
  

<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   

지금 한국교회는 바알숭배가 심각한 상황입니다. 바알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신입니다. 결국 바알숭배는 오늘날로 말하면 배금주의와 기복주의와 외형주의를 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상황을 그냥 두고 보지 않고 반드시 무섭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물론 그 무서운 심판조차 결국 그 영혼과 나라를 돌이키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회복의 길과 가능성을 열어주십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오. 이 구절에 나오는 ‘여로보암’은 북 이스라엘의 창시자인 여로보암이 아닌 ‘여로보암 2세’를 뜻합니다. 호세아가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할 때 남 유다 왕으로는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왕이 거쳐 갔고 북 이스라엘의 왕은 여로보암 2세로부터 여섯 왕들(스가랴,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 호세아)을 거쳐 가면서 그는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하는 주전 722년경까지 약 40여 년을 선지자로 활동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음란한 매춘부와 결혼하라고 했습니다((2절). 이스라엘이 영적인 음행을 경고하려고 하나님의 그의 삶을 활용한 것입니다. 그 명령대로 호세아가 고멜과 결혼하고 둘 사이에 첫 아들이 생기자 하나님은 그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짓게 했습니다(3-4절). 이스르엘은 ‘하나님이 흩으신다’는 뜻으로 바알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을 쳐서 널리 흩으실 것임을 경고하려고 주신 이름입니다.  

그 후에 고멜이 잉태해 딸을 낳자 하나님은 그 딸 이름을 로루하마라고 지으라고 했습니다(6절). 루하마는 ‘긍휼히 여기다’는 뜻인데 ‘로’는 영어로 ‘노(No)’를 뜻하기에 로루하마는 ‘긍휼이 여기지 않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바알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다는 뜻으로 그런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그처럼 북 이스라엘은 무섭게 심판하지만 남 유다에 대해서는 구원의 약속을 주십니다(7절).

같은 민족인데 왜 하나님이 차별합니까? 이스라엘은 차별한다고 하겠지만 사실상 못하는 사람과 잘하는 사람의 차이를 두는 것이 오히려 의롭고 공평한 것입니다. 인간사회에는 어디서나 차별이 있습니다. 그러나 차별이 크지 않은데 자격지심으로 차별이 큰 것처럼 느끼면 누구도 그 감정을 달래줄 수 없습니다. 사실 자격지심을 가지고 자존심이 상했다고 달려들면 누구도 못 말리는 사람이 됩니다.  

드라마 <추적자>에 나오는 서회장의 말입니다. 그가 어려서 시골에 살 때 머리에 꽃을 꽂고 다니는 미친 여자를 봤는데 그녀는 남들이 자기 몸을 건드려도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데 자기 꽃만 건드리면 미친 듯이 날뛰었다고 하면서 자존심은 미친 여자의 머리에 꽂은 꽃과 같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적절한 비유입니까?   

가끔 보면 어떤 일로 인해 자존심 상한다고 영혼과 인생 전체를 걸고 교회와 하나님까지 멀리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데 교회나 목회자에게 상처를 입었다는 사람을 만나면 자격지심 때문에 보통 일을 상처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 경우에는 그 마음을 달래주고 그 상처를 아물게 해줄 마땅한 비책이 없습니다. 많은 위로도 거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격지심이 그 상처의 밑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격지심이 심한 사람을 대하면 계속 위로해주다가 나중에는 주위 사람들도 지쳐서 그를 멀리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는 더 상처받고 더 원망합니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도 더 피곤해지니까 더 멀리하게 됩니다. 관계의 악순환입니다. 그런 관계의 악순환이 선순환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큰 축복을 받아 마음이 넉넉해지거나 아니면 성령 충만으로 겸손해져서 스스로 그 자격지심 문제를 극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 심은 대로 거둡니다 >   

이제 자격지심으로 생기는 피해의식과 차별의식이 없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야망의 성취가 아닌 나눔의 목표를 가지고 성공을 위해서도 열심히 뛰고 심은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공평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심고 행하지도 않으면서 축복이 없다고 한탄하며 차별 당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자격지심을 가진 사람이 느끼는 차별은 실제로는 진짜 차별이 아니고 공평을 차별로 오해한 경우도 많습니다.   

창세기 48장을 보면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야곱이 병든 소식을 듣고 요셉은 자신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와서 야곱의 축복을 받게 했습니다. 그때 야곱이 병상에서 간신히 일어나 두 손자를 축복할 때 요셉이 야곱의 오른손에는 장자인 므낫세를 두고 왼손에는 에브라임을 두었는데 야곱이 손을 엇갈려서 오른손은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어 축복하고 왼손은 므낫세의 머리에 얹어 축복했습니다.   

왜 야곱이 그렇게 행동했을까요? 평소에 두 손자의 삶을 지켜보며 하나님이 주신 감동을 따라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때 요셉은 첫째 아들 므낫세가 자존심이 상할까봐 불편한 마음으로 “아버님! 손을 잘못 얹었습니다.”라고 하며 손을 바꾸려고 했지만 야곱은 “나도 안다!”고 하며 그대로 축복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동생인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축복권이 가게 되었는데 그것이 불공평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므낫세가 자존심 상할 것을 염려해서 평소에 심은 것을 외면하면 그것이 오히려 불공평한 것입니다. 결국 차별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차별이 아니고 오히려 무조건 차이를 두지 않으려는 것이 또 다른 차별이 될 수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는 것이 사실상 공평한 것이고 그것이 바로 정의입니다.   

저는 새벽에 성도들을 위해 축복기도를 할 때 가끔 이 원리를 체험합니다. 예를 들어, 우 집사님을 위해 기도할 때 원래는 “하나님! 동형이와 화수를 축복해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하는데 가끔 저도 모르게 “하나님! 화수와 동형이를 축복해주세요.”라고 기도가 나옵니다. 장자는 동형이지만 매 주일에 함께 예배하는 화수에게 더 마음이 가기 때문입니다. 그때 야곱이 왜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손에 놓았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공평한 보상을 차별로 보지 않도록 이해심이 넘치고 믿음이 주는 넉넉한 여유를 가지십시오. 그리고 자격지심이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자신의 감정을 지배하지 않도록 성공도 추구하고, 그 성공이 바른 성공이 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창조적인 지혜와 아이디어와 인맥도 구하십시오. 그리고 많이 행하고 많이 심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행한 대로 갚아주시고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 회복의 때는 옵니다 >   

그처럼 로루하마를 젖 뗀 후에 고멜이 잉태하며 또 아들을 낳았습니다(8절). 그 아들 이름을 하나님은 ‘로암미’라고 지으라고 했습니다. 암미란 ‘내 백성이다’란 뜻입니다. 역시 이 단어에서도 ‘로’는 영어의 ‘노(No)’를 의미하기에 로암미란 ‘내 백성이 아니다’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바알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는 내 백성이 아니다!”란 속상한 심정을 담아 그렇게 이름을 붙여주신 것입니다.

그처럼 ‘로루하마(내가 긍휼히 여기지 않으리라), 로암미(너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곧 이어서 하나님은 본문 10-11절에서 다시 이스라엘의 회복과 축복을 약속합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때로 사람이 되라고 때리시기도 하지만 곧 다시 그 상처를 싸매주십니다. 그 하나님에 대해 호세아는 본문 10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살면서 그처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사랑을 생생하게 체험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교회를 개척할 때부터 선교하는 교회를 지향해서 ‘나눔’을 최상의 가치로 두었습니다. 우리도 넉넉하지 않았지만 선교사님들과 더 어려운 교회를 위해서 고린도전서 8장 3절 말씀처럼 힘에 지나도록 최선을 다해 나누었습니다. 2008년 초에 이상한 그룹이 와서 교인들이 휩쓸고 나가면서 교인이 3분의 1로 줄고, 헌금이 3분의 1로 줄어서 극도로 재정이 힘들어졌을 때도 저의 사례는 못 받는 한이 있어도 선교와 나눔은 줄이지 않았습니다.  

선교사님들이 잠깐 한국에 방문하면 물심양면으로 최고로 환대하고 섬겨드렸습니다. 그래서 동료 목회자들과 선교사님들은 우리 교회가 굉장히 부자 교회인 줄 압니다. 그러나 그렇게 최상의 나눔을 실천하기까지는 수많은 눈물의 희생들이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도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저희가 나눔을 실천하며 물질을 잘 쓰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쓸 수 있도록 능력과 여건을 허락해주셔서 한국 교회에 나눔을 도전할 수 있는 모델 교회가 되게 하소서!”  

그렇게 믿음으로 나눔의 삶을 실천하며 나갈 때 길이 막힐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마다 신기하게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특히 은혜 받은 몇몇 온라인 새벽기도 회원들의 기도와 후원도 선교사역 지속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신기한 체험을 하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더욱 생생하게 느낍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그러므로 당장에 돈을 벌지 못하고 당장에 소원을 이루지 못해도 결코 믿음이 흔들리지 마십시오.  

바울은 자랑할 것이 있다면 자기의 약한 것과 십자가만 자랑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투박한 고백 속에 바울이란 거인의 비밀이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한가한 산보가 아니라 가시밭길을 걷는 것처럼 힘겹습니다. 그러나 일단 그 길을 걸으면 생각을 초월한 놀라운 평안과 기쁨이 생기고 때가 되면 놀라운 회복과 축복의 은혜가 펼쳐질 것입니다.  

그런 축복의 때가 우리 분당 샛별교회에도 조만간 찬란하게 주어지고 그 동안 끊임없이 선포한 대로 예수 믿고 인물 되는 역사의 주인공이 조만간 우리 가운데 속속 등장하게 될 줄 믿습니다. 본문 11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시련 후에 다시 회복의 은혜를 주실 때 분열되었던 남 유다 자손과 북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강대국의 포로생활에서 벗어나 마침내 이스르엘의 때가 올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하나님이 흩으신다’는 뜻을 가진 이스르엘은 부정적으로는 망해서 흩어지는 뜻도 있지만 긍정적으로는 번성해서 흩어지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 붙잡고 살 때 하나님은 놀라운 축복과 번성의 때를 반드시 허락할 것입니다. 그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살기로 새롭게 다짐하고 일어서서 영혼과 가정과 교회에 나타날 놀라운 축복의 때를 준비하며 사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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