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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때 (요 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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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때 (요 7:1-13)


어느 마을의 농부들이 하나님께 “하나님, 우리들이 원하는 대로 일 년만 날씨를 변화시켜 주십시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좋다. 그러면 1년만 너희들의 소원을 들어주겠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다음부터 농부들이 비를 원하면 비가 내리고 해를 원하면 해가 비췄으며, 바람을 원하면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러자 농부들이 원하는 대로 그 해 가을에는 아주 곡식이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탈곡하려고 보니 알맹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농부들이 하나님께 항의했습니다. 

“하나님, 왜 알맹이가 하나도 없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비 달라고 할 때 비주고 바람 달라고 할 때 바람 주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들은 알맹이 달라는 말은 안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서야 농부들은 하나님께 주문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것이 가장 좋은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화창한 날을 허락하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도 하십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느냐고 하나님께 아무리 항의를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은 당신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일일이 변명하실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 이 때 응답해 주옵소서.” 라고 ‘우리의 때’를 고집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때에 맞추어서 응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는 해를 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의 자세만 갖추면 됩니다. 이것이 신앙인들의 중요한 자세입니다.

1930년대 미국에 경제 대 공항이 일어났습니다. 미국인들에게 무서운 절망감이 찾아 왔습니다. 이때 뉴욕의 홀튼 거리에 있는 조그마한 교회의 재레미아 램파이어 목사님은 30여명의 성도들과 함께 “왜 우리에게 이러한 절망이 찾아 왔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결과라고 결론을 내리고 나라를 위한 기도모임을 가졌습니다.

다락방과 같은 작은 기도모임의 불씨는 미국 전역에서 국민적 영적 대 각성운동으로 퍼지기 시작했으며, 이때 J. J. 라스코는 극심한 불황가운데서 뉴욕의 맨해튼에 바위를 깨고 세계에서 제일 높은 102층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건설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했습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 편에서는 사랑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 가정, 민족의 편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어느 때 입니까?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할 때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모든 것이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병이후의 사건 이후에 예수께서는 주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는 다니려 아니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오신 분인데 어찌해서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한다고 해서 그들을 피해 다니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러나 한 마디로 말해서 그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웠습니다. 유대인들이라면 당연히 초막절에는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 년에 세 번 유월절과 오순절과 초막절에는 반드시 성전에 올라가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형제들이 예수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라고 말씀드립니다.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이 예수가 정말 메시야가 맞다 하고 인정할 수 있도록 많은 사람 앞에서 떳떳하게 보여줄 수 있는 많은 이적들을 펼쳐서 자신을 증명해 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이렇게 자신을 드러낸다면 즉 그의 기적에 의하여 명성을 획득할 능력이 있다면, 그 능력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보다 쉬운 길이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허락하신 능력을 알아주지도 않고 보아줄 사람도 없는 이곳에서 낭비하지 말고 유대로 가서 그곳 잘난 사람들 앞에서 그 능력을 행하십시오. 그럼 세상이 다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하는 것을 다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그 말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예수님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처음 광야에 나가 시험을 당할 때도 받았던 시험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다시 말해서 돌로 떡을 만들어 먹음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명하라고 합니다. 

이는 오늘날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악한 마귀의 계교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신지 증명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단지 태초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선언할 뿐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누구의 자식인지 굳이 증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끔씩은 나 부모님 자녀가 맞나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자녀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고민에 빠져 있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예수님 역시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걸 사람들은 쉬운 방법으로 증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면 되고 성전에서 뛰어 내리면 된다고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능력과 하나님의 친히 함께 하심을 보여주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러기로 한다면 애써 배고플 일은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로써 처음부터 배가 고프지 않게 하실 수는 없겠으며 아니 꼭 광야의 돌을 가지고 빵을 만들어 먹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이 세상을 만드신 주님께서 빵이 아니라 뭔들 만들고자 하시면 못 하실 것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이 스스로 존재하신 분이시듯 예수님 역시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체로 메시야이십니다. 왕이십니다. 하지만 고난의 종입니다. 죽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자신이 메시야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오히려 메시야로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대속의 제물이 되고자 하셨던 분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나타내셨던 많은 이적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으로부터 시작해서 가버나움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신 일에 더하여 오병이어의 역사까지 메시야가 아니고서는 하실 수 없는 많은 이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가장 가까운 일가친지들까지도 여전히 그런 예수를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하셨습니다. 앞서서 믿고 함께 힘을 합쳐야 할 자기 형제자매들이 그리고 일가친척들이 오히려 예수를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친족이 그의 신령한 능력을 짓밟지 않고 예수님이 메시야 되심을 인정했다면 그들은 절대로 이와 같이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 안에서 역사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주님을 최대의 공경심을 가지고 받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한데 그들은 오히려 예수를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예수가 미쳤다고까지 하지를 않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듣게 되는 이와 같은 내용은 오늘날에도 매일 재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듣는 것보다 자기 친척과 가족으로부터 악한 비난의 말을 들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주어지는 상처가 되는 말들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오늘날도 가장 쉬운 사탄의 방법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를 제일 먼저 알아주고 인정해주어야 할 가족들의 비난은 앞서 수고하려고 하던 사람들로 하여금 힘을 잃고 마치 날개 잃은 새가 추락하듯 그렇게 일꾼들로 하여금 휘청거리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내 가족이 내 아내나 내 남편이 내 자식들이나 내 부모들이 오히려 나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하게 될 때 그 받게 되는 충격과 상처는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계속해서 이어지게 되면 그만 모든 힘을 다 잃어버리게 되죠. 가장 큰 지지자가 되고 협력자가 되어야 할 이들이 오히려 비난의 앞잡이가 되어 그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질 때 누군들 힘이 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첫 번째 표적을 친척집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는 이적을 통해 나타내셨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아 맞다 예수야 말로 정말 메시야다” 하고 앞장서서 증거 해야 할 사람들이 그 일가친척들이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형제들조차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예수 당신이 메시야 됨의 증거를 유대로 가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나타내 보이라고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많은 주님의 역사를 친히 보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믿음은 표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령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여 믿음의 고백을 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우리들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해도 성령의 깨닫게 하심이 아니고서는 믿음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누가복음 6:37~38은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잘 낫네, 못 낫네를 따지지 마십시오. 오히려 잘 나면 잘 난대로 못 나면 못 난대로 들어 쓰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그리고 그 모든 수고를 인정해 주십시오. 주님을 향한 그 마음들을 그대로 받아주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나라 백성이요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말씀대로 서로를 헤아리지 말고 서로를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헤아린다는 것은 그를 일꾼으로 삼으신 하나님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것밖에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을 판단할 수 있습니까?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고린도 후서 5:17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분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 신분에 맞는 삶의 모습을 갖추어가는 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던 모든 방식으로부터 하늘나라 백성다운 모습으로 우리는 서서히 바뀌게 됩니다. 이를 위한 우리 삶의 원리가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가치 기준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까지 하십니다. 그게 하늘나라 백성의 삶의 모습입니다. 사람의 칭찬이 아닌 하나님의 칭찬을 더 바라는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모든 선행에 따른 칭찬을 마다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잘 하였다 수고하였다 내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하는 그 한 마디를 듣고 싶어 합니다. 

어디까지나 칭찬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을 아빠 아버지가 되신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하는 마음으로부터 이 모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거운 일이 아닙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하신 마태복음 11:28~30의 말씀처럼 오히려 기쁘고 즐겁게 이 모든 맡겨진 일들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내가 일꾼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일꾼이기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건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메시야이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이시기 때문에 하시는 것입니다. 
한 여자가 무리 중에서 음성을 높여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라고 말했을 때 주님께서 친히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누가복음 11:27~28을 통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니까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그 직분을 우리가 감당하는 것은 우리가 그런 직분의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직분으로 세움을 받았기에 그 일을 하는 것이요 그것을 주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내가 누구인가 어떤 직분의 사람인가를 증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의 모든 수고 가운데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과연 그 사람이 그 직분에 합당하다고 기뻐하심이 되도록 우리는 수고할 따름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형제들의 요구에 대해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직 자신을 나타낼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모든 표적은 자신이 메시야임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요 마땅히 메시야로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인데 아직 그 때가 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믿지 못하고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어린 아이의 깨닫는 것과 청년의 깨닫는 것 그리고 나이 먹은 어른이 깨닫는 것이 같지가 않습니다. 그 때에 맞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만물과 만사에는 다 때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심을 때 심어야 하고 거둘 때 거두어야 합니다. 심을 때 거두려고 한다면 심지 않은 곳에서 무엇을 거둘 수가 있겠습니까? 그 때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 때를 안다는 것은 곧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일꾼은 마땅히 맡겨진 일을 해야 합니다. 내가 맡은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일을 하기 위해서 지금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고 준비할 것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일꾼으로서 마땅한 도리를 다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자야 할 때인지 자다가 깰 때인지를 알아야 마땅하고 일을 하기 위해서 쉬는 것인지 일을 하기 위한 준비로서 쉬는 것인지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내가 지금 올라갈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라 지금 먼저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같이 올라가지 못하겠다는 것이요 또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도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때를 따라 하나님의 전에 예배하기 위해서 나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이때가 무엇을 위한 때인지를 바로 분별하는 것이 지혜요 그 하나님의 지혜로 먼저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여전히 수군거리는 사람들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였거니와 여기 백성들 가운데 수군거림이 많아서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수군거린다는 것은 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모르겠다면 좀 더 두고 지켜보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수군거리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수군거린다고 해서 모르는 것이 알아지는 것도 아니고 안 되는 것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더군다나 수군거린다는 것은 떳떳하게 공론화하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만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확신이 없으니 수군거릴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비난거리를 만들기 위해서 수군거리는 것은 비겁합니다. 결국 자기 뜻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여 알아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몸을 숨기시고 비밀리에 행하시니 사람들이 궁금해 하기 시작합니다. “이상하다. 어째서 예수가 나타나시지 않는 걸까? 저가 지금 어디 계신 걸까? 얼마 전에 이상한 말을 하더니 그 말에 스스로 걸려서 숨은 걸까? 저가 무리들을 미혹하다가 그만 본색이 드러나게 되니까 숨어 버린 걸까? 아니야 그분은 지금까지 한 일로 보아서는 결코 나쁜 분이 아니야.” 
이렇게 사람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져서 서로 말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말이라도 혹시나 유대인들의 귀에 들어가서 그것이 자기들을 옭아매는 구실이 될까 봐서 드러나게 말하는 자는 없었다고 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람들만큼 이기적인 동물도 없습니다. 조금만 자기에게 유익이 된다 싶으면 와 하고 몰려들다가도 그것이 자기에게 조금만 해가 될 것 같아도 슬금슬금 그 자리를 피해 버리곤 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습니다. 물론 우리들 가운데는 그런 분들은 한 분도 안 계시리라고 믿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이렇게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를 메시야로서 믿기까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예수의 지금까지 한 일로 보아서 그가 결코 나쁜 분일 리가 없다”고 하는 무리들과 “아니다 저는 요상스러운 일들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아주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 무리들 이렇게 두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이해할 수 없을 때는 거두절미하고 부인해 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진리는 엄연히 살아 움직입니다.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진화론이 어쩌고저쩌고 해도, 우리의 조상은 저 조그만 박테리아로부터 시작이 되어서 원숭이를 거쳐서 오늘의 사람이 되었다고 주장을 해도, 그 어디에도 그렇게 진화가 되었다고 하는 증거가 없습니다. 하지만 다윈이 발표했던 진화론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의심 없이 정설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참된 진리인 하나님이 세상을 각기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믿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단이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로 입증되지도 않은 것을 왜 믿으려고 하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진화론 역시 사실로 입증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단지 가설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쪽 가설은 진리라고 믿고 이쪽 진실은 오히려 거짓이라고 우겨대는 그것이 바로 세상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모든 행적을 곰곰이 살펴보면서 그분이 결코 나뿐 분일 리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반면에 예수는 어디까지나 무리들을 미혹하는 사기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있어서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 모두가 한결같이 예수가 어디 계신가 궁금해 하면서 찾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 가운데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는 분들이 계실 줄 압니다. 반면에 아직도 온전한 믿음 안에 있지를 못하고 진가 민가 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그분이 진실로 어떤 분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지난 번 부흥회를 통해서 나를 만나 주신 예수님이라는 주제로 고난 가운데 만난 주님에 대한 귀한 간증들을 들었거니와 다음 달 그 주님 안에서 어떻게 고난에서 복된 삶으로 바뀌게 됐는지를 다시금 듣게 될 것입니다. 

이 시간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나를 만나 주신 주님에 대해 깊이 묵상하는 시간들이 되시기를 바라고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우리들 가운데 예수가 누구신지 자세히 알지 못했던 분들이 혹시나 계시다면 바로 깨닫게 되는 귀한 시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진리 가운데 사시는 분들이라면 더 깊은 은혜의 체험을 하는 시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쨌든 수군거림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건 마음의 상처뿐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당당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궁금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이건 제가 잘 깨닫지를 못하겠습니다. 주님이 성령의 지혜로 나를 깨우쳐 주세요.” 사람 앞에서도 당당해지십시오. 사람들 앞에서 수군거리기보다는 조용히 그 사람을 만나 “이건 이렇고 저건 저런 것이 아니냐”고 하여 이해 못한 것이 있다면 이해를 하고 잘못된 것이 있다면 바로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수군거림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자칫 비판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예수를 찾았지만 수군거리기만 할 뿐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고 했습니다. 비난 받을까봐 두려워하고 그로 말미암아 내게 화가 닥칠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뒤에서만 수군거립니다. 
하지만 이젠 당당해지시기 바랍니다. 

속으로만 앓지 말고 하나님께 당당하게 아뢰십시오. “하나님 내겐 이런 것이 필요합니다. 저런 것을 알기 원합니다. 이런 것을 갖고 싶고 저런 것을 주고 싶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지혜를 주시어서 알게도 하시고 방법도 알려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형제와 불화한 것이 생각나면 먼저 그에게로 가서 그와 먼저 화해하도록 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온전치 못한 것이 생각나거든 곧바로 그 삶을 온전한 것으로 바꾸는 지혜를 얻는 것이며 다른 사람의 불의한 것을 보게 될 때 조용히 그와 만나 그를 바로 잡아주는 것이 참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군거림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모든 것을 바로 세워나가는 믿음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느 수전노가 목사님께 “내가 죽으면 전 재산을 빈민구제에 쓰라는 유언을 분명히 해 놓았는데도 왜 사람들이 나를 수전노라고 손가락질하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돼지와 소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돼지가 소더러
“네가 우유를 주듯이 나도 고기를 주는데 왜 나는 너처럼 사람들에 인기를 얻지 못하지?” 
소가 한참 생각하다가
“그것은 나는 살아서 우유를 주니까 그러는 게 아닐까?” 하더랍니다.
사랑과 용서도 때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마찬가지로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지금 무엇을 위해서 내가 여기에 있는지를 항상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한 일을 행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고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거두시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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