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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의 올림픽 (히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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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올림픽 (히 12:1-3)

 
내 용 

토인비 박사의 역사관에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명과 문화는 종교가 기초이다.” 맞습니다. 이번주 금요일부터 영국 런던에서 올림픽 경기가 시작됩니다. 이 올림픽 경기도 종교행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B.C 776년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제우스 주신에게 바치는 종교 행사가 그 시작입니다. 그래서 올림픽 성화는 지금도 그리스에서 불을 붙여서 현장까지 배달함으로 시작됩니다. 

약 1천년동안 계속 되다가 1천5백년 동안 중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1896년에 다소 모양을 바꾸어서 다시 시작해서 그때를 제1회 대회로 아테네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금년이 아마 30회가 될 거 같습니다. 지금 지구상에 온 세계인이 참가하는 인류 축제의 가장 큰 규모와 관심은 단연 올림픽이 첫 번째 행사입니다. 세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아시아에서는 올림픽을 유치한 나라가 세 나라 밖에 없습니다. 일본, 한국, 중국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을 기록한 사람은 헬라 문화권에서 살았기 때문에 운동 경기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운동 경기와 신앙생활의 공통점을 비교해서 영적 훈련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올림픽에서 제일 중요하게 취급하는 문제가 국제올림픽위원회 IOC 기준 가운데 늘 정해져 있습니다. 올림픽 시작할 때부터 전광판에 이 글이 나오면서 올림픽이 시작되는데 “올림픽 대회의 의는 승리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다. 

참가하는데 목적이 있으며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성공보다는 노력이다. 이것이 올림픽이다.”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 이 올림픽은 거의 가 다 기록경기라서 올림픽 하기도 전에 누가 금메달, 은메달 후보인지 정해져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무슨 사고가 생기지 않는 한 그대로 됩니다. 어떤 사람은 기록상 꼴찌가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참가합니다. 그런 사람의 참가가 있으므로 올림픽이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쩌다가 일등병에 걸렸습니다. 

이 일등주의에 사로잡히면 불행한 일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얼마 전 제가 신문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어떤 엄마가 얼마나 극성스러운지 자기 자녀에게 “너는 전국에서 1등 해야 돼.” 이게 바로 일등병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스트레스를 주니까 견디다, 견디다 못해서 그 학생은 자기 어머니를 흉기로 살해해서 죽였습니다. 신문에 크게 기재되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정신병자입니다. 한 나라에서 어떻게 자기 아들이 일등이 됩니까?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한 나라에서 한 사람이나 되는 것인데 그 자리에 자기 아들을 꼭 가라고 날마다 스트레스를 주니까 아들이 견딜 수 없는 정신 고통에 시달리다가 이런 엄마는 죽여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그런 사고를 일으킨 거 아닙니까? IOC는 절대로 국가별 일등 기준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참가한 것만 따집니다. 국가들이 괜히 일등병에 걸려서 모두들 야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교회도 일등주의에 빠지면 피곤합니다. 

주님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가게 됩니다. 주님은 낮아지라 하셨고 겸손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항상 꼴찌다. 우리 교회가 꼴찌다.’ 그렇게 생각하고 신앙생활 자체를 행복화 해야지 물량주의 사업 원리에 빠져서 일등주의 속에 살면 신앙생활이 잘못 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남보다 우월해 보여야 한다는 일등주의 교인 때문에 항상 그 교회에 시험거리가 생기고 문젯거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올림픽 경기의 몇 가지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우리 신앙을 점검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이 경기장에는 환경이 있습니다. 군중이 많다는 것입니다. 지난 서울 올림픽 때도 개회식 입장권 암표가 4천 달러까지 올라가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구할 수 없었습니다. 빈자리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인기 종목 경기장은 보통 부지런하지 않으면 입장권 구하기 너무 힘이 듭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운동 경기장은 항상 구름떼같이 사람들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어느 경기장이나 경기장 구조의 특징은 원형이나 타원형으로 되어 있어서 어디에서나 운동선수를 잘 볼 수 있는 건축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수만 명, 때로는 십만 명 이상 그 많은 눈동자들이 1초도 눈을 감지 않고 운동선수들의 동작 하나하나를 그야말로 뚫어지게 바라봅니다. 그런데 관중들보다도 더 세밀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판들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고 지나가는 것도 심판들은 아주 틀림없이 지적하고 경기 규칙을 지킵니다. 신앙생활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구름 같이 둘러싼 많은 사람이 나를 지켜본다는 의미를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뒷받침할 수 있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의 순교기록장입니다. 그 기록 가운데 보면 이미 하늘나라에 가 계신 예수님이 지상에서 순교 당하고 있는 스데반을 내려다보고 계신 기록이 나타납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그렇게 신앙고백을 하는데 스데반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우리가 한번 해석을 하면 스데반이 순교당하는 것을 주님이 응원하시기 위해서 앉아계실 수가 없어서 일어나서 “스데반아! 순교 당해라. 나와 똑같이 해라.” 스데반이 그것을 영적으로 보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순교를 예수님과 똑같이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십자가 발언을 하면서 순교를 당합니다. 예수님과 먼저 가신 구름떼 같은 신앙의 선조들이 하늘나라에서 나의 신앙 경주를 바라보고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마치 운동 경기장에 모인 관중이 운동선수를 바라보듯 같은 의미가 있다고 지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때 운동선수가 넘어져서 피를 흘리고 다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관중들은 아주 안타깝게 쳐다봅니다. 어떤 선수가 넘어졌다가 다시 정상적으로 운동경기에 임하게 되면 관중들은 뜨거운 격려와 박수를 보내주는 것과 똑같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나의 신앙경주를 보면서 “넘어졌을 때는 일어나라. 순교를 당할 때는 피하지 말고 순교를 당하라. 끝까지 참고 견디라.” 그리고 주님과 하늘나라에 있는 성도들은 나를 응원하고 계신 것을 우리가 이 말씀 가운데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운동 경기자의 준비가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것을 다 버려라.” 운동선수들은 첫째 조건이 몸을 가볍게 해야 합니다. 최소한의 옷만 입고 운동을 해야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축구선수가 넥타이를 매고 합니까? 마라톤 선수가 두루마리를 입고 뜁니까? 다 벗어버려야 합니다. 

얼마나 옷을 간편하게 입느냐 하면 요즘에는 보기에 민망스러울 만큼 간편하게 입습니다. 입었는지 말았는지 분간이 안 되는 과학적인 옷들을 입고 경기를 합니다. 가장 작은 장애도 받지 말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머리카락까지 운동에 장애가 된다고 짧게 깎아서 스포츠머리라는 것이 생겼지 않습니까? 경기장에 나가는 여자선수가 예쁘게 보이려고 미용실에 가서 파마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똑같습니다. 얽매이기 쉽고 무거워 보이는 것은 다 버려야 합니다. 우리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내 마음의 행복도 주지 못할 것을 얼마나 많이 신경을 쓰고 가지고 있는가?’ 평생 그렇게 살다가 끝나지 않습니까? 버릴 것은 버리고 간편하게 살기 운동을 해야 오히려 나한테 행복합니다. 나이가 젊을 때는 이것저것 많이 소유해야만 좋은 줄 생각하고 가져봤는데 그것들 때문에 내가 행복하게 못살았습니다. 부담스럽고 무겁고 얽매이기 쉽고 괜히 그것만 없으면 훨씬 더 편하게 잘 살 것을 괜히 쓸데없는 것을 너무 많이 말을 해놓고 그것을 지키느라고 힘만 듭니다. 

얼마 전에 저는 심방을 좀 늦게 하고 밤 10시 쯤 들어갔더니 도둑이 들었습니다. 그 아파트는 그 날 똑같은 시간에 다섯 집이 털렸습니다. 누가 경찰서에 보고를 했는가 봅니다. 경찰 서장님이 직접 오셔서 이필재 목사님이 사는 아파트에 도둑이 들었다고 해서 오셨습니다. 제가 경찰서에 여러 번 가서 예배드리고 설교했었기 때문에 경찰 서장님과 잘 압니다. 그런데 밤 11시에 서장님까지 직접 오셔서 목사님 집에 도둑이 들었으니 면목이 없다고 하시는 겁니다. 

“살다보면 도둑 들 수도 있는 거지요. 도둑맞을 때도 있고 손해 볼 때도 있고 사기 당할 때도 있는 겁니다. 괜찮습니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오히려 제가 도둑 선생님께 너무 미안하다 말입니다. 무엇을 가져가야 되는데 아무 것도 가져간 게 없으니 말입니다. 그 사람이 제 집에 들어오느라 얼마나 생명을 걸었겠습니까? 도둑이 저희 집 문을 따고 들어와서 문을 다시 만들었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숨겨둔 것을 찾기 위해서 온통 집 안을 다 뒤졌는데 하나도 못 가져갔단 말입니다. 

저는 사실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서 최고로 비싼 것이 제가 이 교회 부임할 때 여러분이 사주신 이 시계입니다. 그런데 제가 차고 다니니 가져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 외에 저희 집에는 보석이고 돈이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중에 경찰서 서장님께 연락이 왔는데 도둑이 잡혔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도둑을 잡았는데 만나보시겠습니까?” “아닙니다. 나는 만나면 야단맞습니다. 목사님 집에 돈 좀 두고 다니세요. 그렇게 말하면 나는 어떡합니까?” 저는 만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아주 편안합니다. 사람이 불필요한 것들을 너무 많이 소유해도 힘듭니다. 그래서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도둑이 뚫지도 못하고 좀도 먹지 못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 쌓는 것이 제일 현명하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불필요한 명예 욕구로 회장 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필요하면 그런 것도 우리가 할 수 있는데 마치 그것 못하면 사람 구실 못하는 것처럼 욕심을 냅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거 다 필요 없습니다. 간편하게 살아야 합니다.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낮추라 하셨습니다. 옛날에 제가 시내산에 올라갈 때 여행 정보를 보니까 시내산이 영하 4~5도가 되기 때문에 춥다고 하면서 거기 가서 괜히 감기 걸리면 큰일 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캘리포니아 기후에 항상 살았기 때문에 겨울옷이 없었습니다. 제가 모처럼 시내산에 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좋은 외투를 하나 사야겠다.’ 생각하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외투를 마음먹고 장만했습니다. 제가 구입한 외투가 속에 털도 들어서 그 외투를 입으면 명동 신사처럼 멋있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짐 속에 넣어서 ‘시내산에 올라갈 때 모세와 같이 거룩하게 이 옷을 입고 올라가야지.’ 생각하고 가져갔는데, 땀이 펄펄 났습니다. 그러니 무슨 외투가 필요합니까? 

정상에 올라갔는데도 입을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괜히 사왔구나!’ 생각하고 “이 옷을 내가 버리려고 하는데 누구 가지실 분 계신가요?” 제가 현지 사람에게 드리려고 그곳에 계신 분들 중에 가지실 분을 막 찾았습니다. 사실 그 옷이 굉장히 비싼 옷이었습니다. 제가 돈 주고 구입한 옷 중에는 마음먹고 장만한 외투였습니다. 그래서 찾았더니 옆에 있던 친구 목사가 “이 목사! 왜 그래?” “나 이거 버리려고 그래!” “아니, 미쳤어? 나 줘!” “그래? 아니, 이걸 뭐하려고?” “나 필요해!” “그럼, 가져!” 그래서 제가 그 옷을 친구에게 주었습니다. 

그 친구는 그 옷을 가지고 다니느라 혼났습니다. 그 옷은 캘리포니아에 가서는 평생 못 입습니다. 불필요한 것을 괜히 욕심내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내 신앙생활 자체를 행복화해야 그것이 진짜 지혜로운 사람이고 잘 사는 사람이고 편안하게 사는 사람이고 마음 편한 것입니다. 바울은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꼴찌이다. 죄인 중에 괴수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다.” 그렇게 제일 아래에 자신을 놓고 사니까 항상 행복했지 않습니까? 여러분! 바울 서신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최고의 고생을 하면서도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니라.” 이 말입니다. 왜 기뻐했습니까? 삶의 방법이 다릅니다. 얽매이기 쉬운 거, 무거운 거, 쓸데없는 것을 잔뜩 머리에 지고 있는데 그것을 다 벗어버려야 합니다. 간편하게 살면 훨씬 기쁩니다. 신앙 장애 요소를 다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 다음에 운동선수들은 훈련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코치가 시키는 대로 절대 복종합니다. 지금까지 올림픽 선수 가운데 최연소 금메달리스트는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 체조경기에서 우승한 루마니아의 코마네치였습니다. 14살 소녀였습니다. 그때는 온 세계가 코마네치만 비추어주었습니다. 그 몸이 허공을 선회할 때 “이것은 인간의 몸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예술 작품이다. 이것보다 더 극치는 없다.” 이렇게 찬양해서 1976년 세계에서 제일 유명해진 사람은 코마네치였습니다.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기술을 배울 수 있었느냐?” 그녀는 사실 몇 번 죽으려 했습니다. 너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거 안하면 못사나? 이렇게 해서 내가 무슨 영광을 얻겠다고….” 사실 몇 번 그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견딘다는 말은 쉬운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씨를 다 뿌렸지만 길바닥에 떨어진 씨는 새들이 먹어버렸고, 돌짝밭에 떨어진 씨는 흙이 깊지 않아 잠시 견디다가 쓰러졌고, 가시떨기 밭에 떨어진 씨는 찌르는 고난을 견디지 못해 쓰러졌다. 옥토의 씨만이 30배, 60배, 100배로 결실했다.” 

그러니까 쓰러진 사람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옥토가 4분의 1정도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하다가 조그만 시험거리 만나거나 조그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쓰러지는 경우를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 수요일마다 야고보서를 보는데 이번 수요일이 마지막 시간 아닙니까? 야고보서 1장에 “참는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시험을 만나거든 이것을 하나님의 큰 영적 축복이 너에게 오는 사인이니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렇게 격려하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마귀 시험을 만났고 제자들도 다 순교 당했습니다. 열두 제자 훈련할 때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셨습니다. “사도적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의 고난은 필수이다. 그것을 이겨라.” 이렇게 격려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지막 운동선수는 목표가 분명합니다. 오늘 이 자리의 신앙생활을 뭐라고 했습니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 목표를 정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여러분에게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IOC에서 올림픽 경기 때마다 제일 좋아하는 것이 있습니다. 뭔지 아십니까? 신기록입니다. “인간의 한계점이 향상되었다. 여기까지 인간이 갔다.” 그래서 신기록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이 여러 개의 메달을 딸수록 좋아합니다. 마크 스피치, 마이클 펠프스는 7개, 8개를 땄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인간의 한계성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여기까지 도달했다.” 이것입니다. 옛날에 북한 선수 한 명은 사격에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런데 기자회견을 잘못해서 금메달을 박탈당할 수순까지 갔습니다. 뭐라고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 “어떻게 금메달을 땄습니까?” 그랬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일성 수령님께서 교시하신대로 원수의 심장을 쏘는 마음으로 쏘았기 때문에 성공했습니다.” “이것은 올림픽 정신의 정반대이다. 메달 박탈!” 북한 선수단이 공식 사과해서 무마되었습니다. 올림픽 목표는 세계 평화입니다. 평화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집안이 모여서 이렇게 좋은 게임을 함으로 말미암아 다 한 식구가 되자.” 이게 목표입니다. 우리 신앙 목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인 평화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려는데 우리 신자의 삶에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가장 소중하고 영원한 평화의 영생의 나라를 우리는 목표로 하고 지금 그 나라를 향해서 열심히 경주하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옛날과 지금이 조금 달라진 것이 옛날에는 우승한 선수에게 월계관을 씌워주었습니다. 바울은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을 줄 것이다.” 우리나라 황영조 마라톤 선수는 마라톤에 우승하는 날 우승 지점을 통과한 후 조금도 더 가지 못하고 운동장에 쓰러졌습니다. 

그래서 우승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황영조 선수는 태극기를 들고 한 바퀴 돌지 못한 것이 한입니다. 운동선수가 경기가 끝난 다음 남은 힘을 어디다 씁니까? 죽을힘을 다해서 골인 지점까지 가서 골인하고 쓰러져도 괜찮습니다. 우리 인생은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세상에서 마지막 내 인생의 지점까지 있는 힘을 다 쏟아서 무엇을 더 내가 해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 수고할 것인가? 달려갈 길을 끝까지 주님을 만나는 그 골인 지점에 쓰러져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이게 운동선수이고 이게 신앙의 경주이지 않습니까? 무엇을 많이 하나님이 주셨는데 인생이 얼마 남지 못했는데도 하나님의 나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덜컥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예수님의 비유 설교 가운데 신랑, 신부 열 처녀 비유가 있습니다. 신랑은 예수님이고 신부는 성도들 아닙니까? 우리 인생의 마지막 시간에 우리는 마치 웨딩드레스를 입고 희망의 예식장을 들어가는 신부 같은 심정으로 그 지점에서 기다리는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요 주님은 그동안 눈물의 순례자의 길을 걸어온 나를 맞이하기 위해서 거기에서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 문에서 만나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2004년 올림픽 때 이 예화는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기억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1968년 10월 20일 멕시코 올림픽이 끝나는 날입니다. 그때는 마지막 경기가 마라톤이었습니다. 마라톤 선수가 들어오면 바로 그 자리에서 폐막식을 했습니다. 그날 멕시코 대통령도 폐막식을 위해서 거기에 나와 있고 모든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이제 뛰고 나간 마라톤 선수가 들어와서 그 사람들 메달 행사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폐막식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어떤 마라톤 선수 한명이 들어오니까 십만 명이 넘는 그 관중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일등인가?’ 아닙니다. 꼴찌였습니다. 1등, 2등, 3등은 벌써 들어와 다 끝났습니다. 그런데 올림픽 정신에 현역 선수가 경기 진행하고 있는 것을 강제로 멈추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 선수 때문에 그 올림픽 폐막식이 늦어졌습니다. 방송합니다.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아쿠와리 선수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어느 지점을 달리고 있습니다. 

이 선수가 들어와야 폐막식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 운동장에 들어올 때 그는 피투성이였습니다. 넘어져서 무릎이 깨져서 피를 절절 흘리고 있었습니다. 절뚝절뚝거렸습니다. 그래서 박수를 쳐준 것입니다. 골인 지점까지 무사히 들어왔습니다. 신문기자들이 달려들었습니다. “꼴찌라는 것을 알았습니까?” “네, 꼴찌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넘어질 때부터 알았습니다.” 사실 그날은 로마와 동경에서 두 번이나 금메달을 받은 에티오피아 아벡의 선수도 10마일에서 넘어져서 포기했습니다. 

“그러면 이 고통스러운 다리를 이끌고 피를 흘리면서 꼴찌인데 왜 끝까지 뛰었습니까?” “나의 조국 탄자니아는 나를 믿고 7천마일이나 되는 멕시코에 보냈습니다. 나는 금메달을 가지고 조국을 찾아갈 수는 없으나 나의 조국을 부끄럽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튿날 멕시코 신문에 톱뉴스로 기재되었습니다. “올림픽 정신을 가장 빛낸 선수가 이번 경기에서 나왔다.” 자기 나라로 돌아갔을 때 대통령이 마중 나왔습니다. “네가 이 아프리카 탄자니아를 온 세계에 빛냈다. 

장하다. 탄자니아의 아들아!” 여러분! 우리는 나름대로 지금 뛰고 있습니다. 꼴찌할거 같습니까? 피도 나고 쓰러지고 다리 아픕니까? 그러나 끝까지 가십시오. 주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몸과 그 어려움을 가지고 여기까지 달려오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느냐? 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우리 신앙의 경주입니다. “꼴찌해도 괜찮다.” 내 삶의 모든 내용을 행복화 할 수 있는 신앙생활! “일등병에 걸리지 않아도 괜찮다. 얽매이기 쉬운 것, 무거운 짐, 다 벗어버려도 괜찮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힘 있게 달려갈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이 주간부터 올림픽이 열리는데 우리가 경기를 바라보면서 나를 볼 수 있는 은혜를 내려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까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나도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경주의 마지막까지 갈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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