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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쌍히 여기는 마음 (삼하 7:1-14, 막 6:30-34, 5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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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히 여기는 마음 (삼하 7:1-14, 막 6:30-34, 53-56)


<쉬는 곳까지 찾아온 극성팬들>
     
어떤 임금님이 세상물정을 살피기 위해 평민복장을 한 채 민정시찰에 나섰습니다.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저녁을 들기 위해 한 주막에 들렸습니다. 그 때 임금님을 수행했던 신하가 깜짝 놀라 임금님께 말했습니다. “전하, 들켰사옵니다!”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린가?” 신하는 주막기둥에 적혀있는 글씨를 가리켰습니다. “손님은 왕이다.”
     
정치인이든 연예인이든 누구든지 간에 유명해지면 사생활이라는 것이 없게 됩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알아보기에 어디든 편히 쉴 곳이 없어집니다.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한 사람이 낮에 해가 뜨는지 밤에 달이 뜨는지도 모르는 채 불철주야로 일만하다가 오래간만에 휴가를 냅니다. 제 딴에는 설마 여기까지는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휴양지에 갔는데 거기서도 사람들이 알아봅니다. 그런 때에는 아무리 자기를 아끼는 팬이라고 할지라도 짜증이 날 법 합니다. 
     
오늘 봉독한 마가복음이 꼭 이런 실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막 6:30-34절은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사건 바로 앞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또 이 말씀 바로 앞에는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세례 요한의 죽음을 회고하는 식으로 삽입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이미 과거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적으로 본문과 연결되는 부분은 예수께서 12제자를 둘씩 짝 지워 세상에 파송한 이야기입니다. 막 6: 13절에 보면 그 때 제자들은 많은 일을 했습니다. 수많은 귀신들을 쫓아냈고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었습니다. 
     
이제 오늘 봉독한 30절 말씀에 보면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이 결과보고를 합니다.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보고했겠지요. 하지만 이들은 몹시 지쳐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휴식입니다. 충분히 쉬면서 재충전을 받고 기분을 일신하는 것, 제자들에게 가장 긴요한 일이지요. 
     
예수님 역시 이것을 잘 알고 계셨기에 31절에 보면 쉴 것을 권하십니다.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얼마나 바쁘게 돌아다녔던지 밥 먹을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스라엘에서 유명인사가 되었고,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이 많았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과 12제자들은 그동안의 피로를 씻고 푹 쉬기 위하여 아무도 모르는 한적한 곳으로 배를 타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 일행을 알아봤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쉬어야 하는 처지도 몰라주고 예수님 일행이 가려고 하는 곳으로 먼저 달려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오늘날의 유명한 아이돌 스타가 연상됩니다. 소녀 시대나 슈퍼 주니어와 같은 스타들은 어디 편안히 좀 쉬고 싶어도 도무지 쉴 수가 없습니다. 설마 여기까지는 팬들이 모르겠지 해서 어느 곳에 갔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거기에도 사람들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때의 그 난감함과 불쾌함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아마 성질이 급한 사람 같으면 짜증을 내고 화를 낼 법한 상황이지요.      
     
저도 한 때 CBS에서 방영하는 「성서학당」에 한 6개월 간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 TV에 나왔지만 간혹 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등산을 갔는데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서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은 어느 곳에 가도 사람들이 구름떼같이 몰려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유명세를 치른다는 말도 있는 것처럼, 인기가 있고 유명해져서 좋은 것도 있지만 불편한 일도 많습니다. 
     
지금 예수님 일행이 바로 이런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귀신도 쫓아내고 각종 질병도 고쳐주고, 그동안 전혀 들어보지 못한 매력적인 말씀도 들려주시니까 뭇사람들이 주목합니다. 그래서 어디 놀러도 못가고 마음대로 쉬지도 못합니다. 얼마나 불편합니까? 며칠 동안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녹초가 되었는데 또 사람들이 몰려와 휴식을 방해하다니. 충분히 짜증이 날 수 있는 상황이지요. 

<목자 없는 양들을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
     
그런데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예수님이 이런 상황에 어떤 반응을 보이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34절을 다같이 봅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예수님이 짜증을 내신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여기까지 알고 쫓아왔나.” 무리를 꾸중해서 쫓아 보낸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양은 이 세상에서 가장 미련하고 취약한 짐승입니다. 목자가 보호해주지 않으면 꼼짝 없이 죽어야 합니다.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든지 맹수의 밥이 되든지 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 일행이 쉬어야 할 휴양지까지 쫓아온 사람들이 꼭 그런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불쌍하다는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과 우리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쉴 새 없이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하루 24시간이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마땅히 쉬어야 하는 시간에도 예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기꺼이 도와주셨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휴식을 취하려고 배를 타고 도착한 곳에서 예수님은 또 다른 봉사의 사역을 하십니다. 
    
34절에 보면 여러 가지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35절로 44절에 보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여주셨습니다. 여기 예수님의 사역은 “가르치고,” “먹이시는” 사역 두 가지를 다 하셨습니다. 
     
오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복음을 힘써 가르쳐야 합니다. 하지만 먹이고 고치고 섬기는 봉사의 사역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온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 무지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배고픈 사람들을 먹여주셨습니다. 가르침과 섬김이 항상 함께 가는 교회, 주님이 보여주신 교회의 사명인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무리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이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마음의 감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하지만 마음의 감동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불쌍한 마음이 들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도와주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휴양지까지 알아내서 예수님 일행이 도착하기도 전에 미리 와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고서는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냥 마음속으로 “참 안됐구나.” 이렇게 생각으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으로 도와주셨습니다. 가르쳐주시고 먹여주셨습니다! 오늘 봉독한 53절로 56절을 보면 예수께서 어느 마을 어느 도시, 어느 농촌에 가시든지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구체적인 봉사의 행위로 나타내셨다는 것이지요!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세상의 고통을 보고서도 울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신이 밟고 다니는 흙보다도 못한 존재다. 흙은 씨앗과 뿌리, 줄기, 이파리, 그리고 꽃에 영양분을 주어서 자라나게 하지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메말라서  그 어떤 열매도 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If a man has not yet wept at the world’s pain, he is less than the dirt he walks upon, because dirt will nourish seed, root, stalk, leaf, and flower, but the spirit of a man without pity is barren and will bring forth nothing.) 
     
실제로 어떤 사진작가가 길을 걷다가 숨이 막혀 쓰러진 채로 신음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때 사진작가는 기가 막힌 작품소재를 만났다며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래서 사진 주제까지 생각했습니다. “절박한 도움이 필요한, 외로운 사나이.” 사진작가는 가방에서 카메라를 비롯한 촬영도구를 꺼내어 사진 찍을 준비를 했습니다. 숨이 막혀 쓰러진 사나이는 자기를 도와줄 줄 알았던 사람이 전혀 도움의 손길을 펼치지 않자 불평했습니다. 하지만 사진사는 사나이의 손을 잡고서는 흑백이 아닌 컬러로 찍어야 더 좋을 것이라고 떠벌렸습니다. 고통당하는 사람을 알아차린 뒤 그 어떤 도움의 손길도 펼치지 않는다면 이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알베르 카뮈가 쓴 소설 「전락」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불란서에서 명망 높고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한 변호사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인 클레망스 변호사는 선행을 베풀기를 좋아하고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습니다. 하지만 이 변호사는 어느 날 암스테르담의 한 술집에서 과거를 회상합니다. 
     
옛날 한 여인이 세느강에 몸을 던져 자살을 했을 때 얼마든지 도울 수 있었지만 도와주지 않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 이 변호사는 자신의 명성과 덕행이 모두 위선이요 가면이라는 사실을 두고두고 고민한다는 줄거리입니다. 주인공인 클레망스는 자신의 도움을 간절히 필요한 사람을 얼마든지 도울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클레망스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오 젊은 여인이여, 당신과 내 자신 모두를 구원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얻도록 다시 한 번 물에 빠져보시오!”(O young woman, throw yourself into the water again so that I may have a second chance of saving both of us!).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될 차례>
     
오늘 우리는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돌보느라고 예수님이나 제자들이나 다 녹초가 되었습니다. 음식 먹을 겨를조차 없이 바쁜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이제는 좀 쉬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외딴 곳으로 배를 타고 가 휴식을 취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 일행이 이 외딴 곳으로 간다는 사실까지 알아내고 아예 그곳까지 뛰어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일행이 도착하기도 전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상황이 되면 누구든지 짜증이 나고 역정을 부릴 법 한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이 긍휼이 여겼습니다. 그래서 측은한 마음으로 먼저 무지한 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배고픈 자들을 배불리 먹여주셨습니다. 마음과 몸이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말, 영어로 “compassion”은 “suffer with,” “함께 고통을 나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불쌍한 사람들을 만나면 기꺼이 함께 고통을 나누셨습니다. 웃는 자들과 함께 웃으셨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셨습니다. 단지 마음으로만 동정심을 품은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구체적인 행동으로 도우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 주님의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저런 모양으로 상처받고 신음하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기꺼이 보살피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한 교회 교인들이 폭격 맞아 무너진 예배당을 다시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 때 부서진 예수님의 조각상도 다시 복원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부품들을 다 찾아서 복원했는데 예수님의 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교인들은 장시간 격론을 벌인 끝에 예수님의 조각상을 손이 없는 채로 두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조각상 밑에다가 이런 글씨를 새겨놓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손 이외에는 다른 손이 없다.”(Christ has no hands but our hands.) 
     
옳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상처받고 신음하는 우리의 형제자매들에게 긍휼의 손을 펴야 합니다! 혼란과 무질서 속에 신음하는 이웃에게 평화를 전하는 발걸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 오늘 봉독한 엡 2: 14-19절 말씀을 함께 읽으시므로 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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