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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떤 때에 하나님이 도우시는가? (삼상 7: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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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때에 하나님이 도우시는가? (삼상 7:5-14)

  
이스라엘 역사에는, 이가봇(דוֹב󰗇-יאּ)시대와(삼상4:21), 에벤에셀(ר󰖂󰘠󰕗-ן󰔫󰔟)시대가 있었다(7:12). 이(יאּ, 아니다) + 카보드(דוֹב󰗇, 영광)는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외면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에게 넘겨져,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그러나 에벤에셀 시대는 다르다. 에벤(ן󰔫󰔟, 돌) + 에젤(ר󰖂󰘠,도움)으로,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심으로, 그들을 도와주어,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래서 영광스런 모습이 되었다. 지금 우리는 이가봇인가? 에벤에셀인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살펴보자. 
그리고 하나님이 어떠한 때에, 우리를 돕는지 깨닫고, 매순간 승리의 삶을 살기를 바란다. 엘리는 나이가 많은 제사장이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에게, 제사장의 업무를 맡겼다. 엘리는 몸만 늙은 것이 아니다. 마음은 더 늙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 하게 되었다. 

자신이 기도하지 않으니까, 한나가 성전에 올라와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 술 취한 줄 알고 한나를 꾸짖었다. 이처럼 엘리는, 기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조차 희귀했다. 그 때에 제단은 있었지만, 기도가 없었고, 말씀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까, 이가봇 사회가 되고 말았다. 더군다나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행실이 대단히 나쁜 사람이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몰랐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 드릴 때, 중간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빼앗기까지 했다. 심지어는 성막에서 봉사하는 여인들과, 동침까지 했다. 

그러니 하나님이 어찌 그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시겠는가? 하나님이 블레셋을 들어, 이스라엘을 치셨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맞아 싸울 때,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나아갔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렸는데, 하나님의 언약궤를 들고 간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결국 이스라엘은 싸움에서 패했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고, 하나님의 언약궤마저, 뺏기고 말았다. 그 소식이 엘리 제사장에게 전해졌을 때, 엘리는 충격을 받고,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비참하게 종말을 맞게 된다. 그때 엘리의 자부, 비느하스의 아내는 임신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비극적인 소식이, 전해졌을 때 갑자기 해산의 고통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죽어가면서, 아이를 낳았고, 그 이름을 이가봇이라 불렀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날 때, 비극이 있고,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만 있다. 불행과 비극이, 계속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분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이가봇 시대를 마감하고, 하나님이 돕는 에벤에셀 시대를, 새롭게 열기 위해 신실한 일꾼을 미리 예비하셨다. 그가 바로 본문의 사무엘이다. 

엘리 제사장이 죽은 후, 그 뒤를 이어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새 지도자가 되어, 전국적으로 회개의 운동을 일으켰다. 모든 이방신들을 제거하고, 오직 참되신 하나님 여호와만을, 온전히 섬기게 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족속들이, 미스바에 모여,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는 운동을 일으켰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였다는 소식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들어갔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치려고 모였다고 오해하고, 철병기로 무장한 군대를 일으켜, 미스바로 올라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로 모인 이유는, 전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성회를 열기 위해서였다. 

거기다 그들은 금식까지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의 말발굽소리를 듣자,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무엘에게 나아와, 여호와 하나님께 자신들을 위해, 쉬지 말고 부르짖어 달라고 간구했다. 사무엘은 어린 양을 취해, 온전한 번제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었다. 
하나님은 사무엘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큰 우레가 블레셋 사람들의, 진 사이에 일어나게 하셨다. 블레셋 사람들은 갑작스런 뇌성벽력에, 혼비백산해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뒤를 추격해서,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사무엘은 미스바와 센 사이에, 승전비를 세웠다. 

그 승전비의 이름은 ‘에벤에셀’이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우실 때, 큰 승리가 있었다. 오늘 이런 승리가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 어떤 때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우셨는지 살펴보자. 

1.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모였다(5).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스바로 모이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6)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과 뜻이 하나가 되어, 일사불란하게 미스바에 다 모였다. 

이 모습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임은, 육신의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 모이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회개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내놓고 미스바에 모였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모이는 일에 힘써야 한다. 모이면 역사가 일어난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하나님 앞에 함께 모일 때에, 나도 살고 너도 살고, 우리 모두가 살게 된다. 아무리 활활 타오르는 불이라도, 따로 떼어놓으면, 불길이 금방 사그라지고 만다. 그러나 함께 모아놓을 때는 힘이 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신앙의 부흥운동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함께 모일 때 일어났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백 이십 명의 성도가 함께 모여서, 간절히 기도했다. 그때 오순절에, 성령의 역사가 뜨겁게 일어났다. 모두가 큰 권능을 얻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힘써 모이는 성도들이 되자. 그런데 뭐가 그리 바쁜지, 요즈음의 교인들은 모이기에 힘쓰지 못하고 있다. 어떤 집사님은 “목사님, 죄송합니다. 요즘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교회 일에 충성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눈과 코는 뜨고 살아야 한다. 죽은 사람은, 눈과 코를 뜨지 못하지만, 산 사람은 눈과 코를 뜨고 산다. 정말 세상일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가, 하나님이 ‘이가봇!’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영원토록 눈과 코를, 감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기 전에, 주님을 위해 모이기에 힘쓰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엘리 시대에는 이가봇 시대였기에, 이런 모임이 없었다. 그러나 사무엘 때는, 하나님 앞에 모이자, 에벤에셀의 역사가 나타났다. 우리가 모여야 된다. 어떤 여자 집사님은, 일주일 내내 스케줄이 꽉 찼다. 

월요일은 달월(月)이기에, 초승달처럼 날씬한 몸매를 가꾸기 위해, 테니스 치는 날로 정해놓았다. 화요일은 불화(火)자이니까, 요리 강습하는 날이다. 수요일은 물수(水)자이니까, 수영하는 날이다. 목요일은 나무목(木)자니까, 꽃꽂이하는 날로 정했다. 
금요일은 쇠금(金)자니까, 매듭을 만들어서 금속에 붙이는 날로 정했다. 토요일은 흙토(土)자니까, 땅에 앉아서, 붓글씨 쓰는 날로 삼았다. 주일날 하루 남았는데, 그 날은 밀린 집안일도 하고, 친구도 만나야 된다고 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들어가실 틈이 없다. 

이런 사람에게, ‘이가봇!’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테니스 치다가 허리를 삐끗하면, 병상에 드러누울 수밖에 없다. 성도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강압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들기 전에,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보면서 살아야 한다. 
우리가 섬기야 할 교회는, 다운교회다. 하나님이 다운교회를 섬기라고, 이런저런 직분을 주셨다. 집사, 권사, 장로, 목자의 직분도 주셨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직분에 충실하지 못하고, 자꾸 교회 울타리를 벗어나서, 다른 곳에 기웃기웃 거리면 되겠는가? 

그것도 기독교가 인정하지 않고, 문제 있다고 판단한, 그런 모임에 자꾸 가서 되겠는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교회 울타리 안에서, 하나님 앞에 함께 모이기에 힘쓰고, 함께 모여 기도하고, 함께 모여 찬송 부르고, 함께 모여 성경공부하고, 봉사하고 교제해야 한다. 
자꾸 교회 울타리 밖으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옳지 못하다. 사탄이 이런 사람을 아주 좋아한다. (욥1장)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사탄에게 물으셨다. (7) “사탄아, 너 어디 갔다 왔느냐?” 사탄이 대답했다. (7)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이렇게 교회 울타리 밖으로, 자꾸 돌아다니는 것은, 사탄이나 하는 행동이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동물의 왕국을 보면, 아무리 힘이 없고, 약한 짐승들도, 무리를 지어있으면, 사자가 감히 공격하지 못한다. 그러나 잘난 척하면서, 무리에서 벗어나, 풀 뜯는 짐승은, 영락없이 사자의 밥이 되고 만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방주 안에 있을 때에는, 안전하다. 그렇지만 마귀는, 주님을 떠나도록 만든다. 누가 보혜사다. 어머니이다. 이렇듯 교회에서 인정하지 않은 곳을, 기웃거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구원의 방주는 예수님이요, 우리가 섬겨야 할 교회는, 바로 다운교회이다. 교회 울타리를 벗어나지 말자. 교회 안에서 하나님 앞에 모이기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기 바란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 

2. 사무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8).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스바에 모였다. 그런데 그 소식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이스라엘을 치기 위하여 미스바로 올라왔다. 블레셋 사람들은 철병기로 무장한 군대다. 이스라엘 백성은 싸우기 위해 미스바에 모인 것이 아니다. 성회를 열고 있다. 그들에게는 무기다운, 무기가 없었다. 

거기다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금식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무엘에게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라고 요청했다. 

(9)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사무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에 응답해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먼저 철저히 회개했다.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를 바르게 맺었다. 그리고 사무엘은 조국을 위해, 하나님께 생명을 걸고 부르짖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이 그 기도를, 왜 들어주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응답해주셨다(10-11).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싸움에서,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할 때, 때로는 말없이 기도할 수도 있다. 그리고 조용히 대화를 나누듯이, 기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때로는 사무엘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를 드려야 될 때도 있다. 
예수님도 부르짖어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피땀을 흘리며 애써 간절히 기도하셨지 않았는가? 심한 통곡과 눈물을 흘리면서(히5:7), 부르짖는 기도를 드렸다. 우리도 부르짖을 때는, 부르짖어야 된다. 

(시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은 응답하신다. 이것을 믿기 바란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면, 혼자 고민하지 말고, 하나님께 부르짖기 바란다. 하나님이 응답하여, 우레를 발하여,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우셨을 때, 이스라엘에 어떠한 결과가 나타났는가? 

(1) 블레셋이 굴복했다(13).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2) 잃었던 땅을 회복했다(14上).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3) 평화가 유지되었다(14下).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3. 사무엘은 온전한 번제를 하나님께 드렸다(9).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사무엘은 부르짖기만 않고, 온전한 번제를 드렸다. 

번제는 다 태워드리는 제사로, 헌신을 뜻한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께 온전한 번제를 드리지 않은, 이가봇 시대였다. 그러나 사무엘은, 온전한 번제를 하나님께 드렸다. 그때 에벤에셀의 역사가 나타났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를 바란다. 
하나님을 향하여, 전심으로 기도하고, 찬송할 때도 전심을 다해, 찬송하고, 예물을 드릴 때도, 내 마음을 다해서 최상의 예물을 드릴 때, 하나님이 기뻐 받는다. 예수님은 (마6:24上)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고 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한다. 

신앙이 있을 때, 온전히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신앙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 예수님은 무엇을 보든지, 늘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셨다. 공중에 나는, 참새 한 마리를 보시면서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셨다. “내 아버지는 저 하찮은 새들도, 다 먹이시는구나!” 
예수님은 들에 있는 들풀을 보면서도, 그냥 무심히 보지 않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셨다.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는 구나…” 또한 예수님은, 아름다운 꽃을 보면서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셨다. “내 아버지께서 저렇게 아름답게 입히셨구나! 

우리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였다. 예수님의 시선은, 늘 하나님을 바라보고 계신 것이다. 우리도 무엇을 보든지 간에, 늘 그것을 통해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을 향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다윗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다윗은 자신을 향해, 이런 말을 했다. (시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이다. 아침에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저녁에도 바라보고, 형통할 때도 바라보고, 고난당할 때도 하나님을 바라보자. 

기쁠 때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슬플 때도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책임지고 도와주신다. 온 마음을 다하여,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되기를 원한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탈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모이기를 힘쓰는, 우리가 되기 바란다. 혼자서 고민하고 괴로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기 바란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에벤에셀의 역사가 있다. 

결론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이는 일에 힘써야 한다.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고, 하나님께 내 마음을 드리고, 또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 온전한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 된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지켜 주고, 모든 대적을 물리쳐 준다. 
잃었던 것을, 회복시켜 주고, 잃었던 땅도 회복시켜 주고, 잃었던 건강도 회복시켜 주고, 잃었던 기쁨도 회복시켜 주신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붙들고 있기에, 참된 평화가 마음에 넘치게 된다. 슬픔이 바뀌어 기쁨이 되고, 불평이 바뀌어 감사가 되는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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