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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의 진리를 따라 (갈 2: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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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진리를 따라 (갈 2:11-21)

며칠 전 남가주기독교교회협의회 명의로 이메일이 하나 왔습니다. 21일(토) 오전 10시 30분 오렌지 카운티에 있는 구 수정교회에서 신천지 집회가 열리는데 성도들이 그 집회에 참석하는 것을 막아달라는 내용입니다.  신천지는 한국의 한기총과 각 교단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교회와 가정을 파괴하는 등 사회적으로도 많은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아니라 자기들의 교주 이만희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핵심 교리입니다. 

이만희는 6,000년 동안 감춰진 천국의 비밀을 처음으로 밝히는 보혜사요, 재림주요, 새 말씀의 아버지이며 신천지만 참된 교회라 주장합니다. ‘산 옮기기’라는 전략을 통해 주로 현재의 목사가 직접 개척하지 않은 50명 미만의 작은 교회를 선택하여, ‘이리 옷’을 입고 침투하고, 심방을 통해 교인을 확보하여 이들을 세력화하고, 그리고 담임 목사를 몰아내고 신천지 목사가 교회를 차지하게 하려고 합니다. 

어느 권사님이 한국에서 섬기던 목사님에게 그 교회에 있던 신천지 교인의 특징을 물어봤더니 헌금을 하지 않고, 성찬에 참여하지 않고, 목사와 사모를 계속 비방하고, 구역 식구들에게 자기가 준비한 교재를 사용하게 하고, 그 교회를 떠나서도 교인들에게 교회 문제점이 담긴 유인물을 계속 발송한다고 합니다. 진리의 말씀에 바로 서지 않으면 언제 어떤 식으로 미혹이 될 수 없기에 분별력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고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목사에게 문의해야 합니다.  

사탄의 역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도 가만히 들어온 유대주의자들이 ‘다른 복음’을 전파하면서 교회에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조건이라 선포하였고, 그들은 바울과 그의 메시지를 열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갈라디아를 떠난 지 얼마 후, 자신들을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자라고 소개한 거짓 선생들 곧 유대주의자들이 침투해서, 온전한 구원을 얻으려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외에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서 전해 받은 복음에서 할례와 율법의 의무를 제거하고 자기 마음대로 복음을 변질시켰다고 공격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적지 않은 교인들이 영향을 받아 교인들 사이에 사랑의 관계가 깨어지고 서로를 비방하는 상황으로까지 치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게 된 바울은 편지를 써서 다시 한 번 자신이 전한 복음을 정리하여 그들을 은혜 가운데 굳게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일어났던 일들이 21세를 사는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알고 있고,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구원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부족하였기에 거짓 가르침에 넘어가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했던 것처럼 자칫하면 우리도 그들과 같은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구원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구원 받은 자답게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바울이 전하는 구원의 복음이 무엇인가 살펴보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살 수 있는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2:1-10절에서는 바울이 자신의 복음과 사도직을 변호하면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과의 만났던 사건을 언급합니다. 예루살렘 회의가 개최된 이유는 안디옥 교회의 할례 논쟁 때문이었습니다. 이 논쟁은 바울과 바나바가 제 1차 전도여행에서 돌아온 직후 예루살렘 교회에서 내려온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개종한 그리스도인들도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으로 파송하였습니다. 오랜 논의 끝에 내린 결론은 이방인이라도 할례나 율법의 조건 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 안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든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결정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복음이 유대교라는 울타리를 넘어 인종과 종족을 초월하는 본격적인 이방 선교가 시작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회의는 이방인의 할례나 율법 준수의 문제 등 가장 기본적인 문제만을 다루었지 이에 관련된 세부 규정을 다 결정한 것은 아니었기에 이방인들과 어떻게 교제할 것인지를 놓고 안디옥에서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과의 식탁 교제 자리에서 떠났습니다

예루살렘 회의 이후 베드로가 안디옥을 방문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음식법과 정결법을 보면 유대인은 할례를 받지 않았거나 율법을 알지 못하는 부정한 이방인과는 함께 식사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전제가 있어야만 합니다.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에 따라 이방인들도 할례 없이 신자가 될 수 있었지만 대다수의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는 자기들만이 참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는 의식을 여전히 갖고 있었기에 이방인 신자들을 자신들과 동등하다거나, 같이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동등한 권리를 가진 것으로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런 예루살렘 교회의 분위기로 볼 때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 격인 베드로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식사하며 교제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비록 베드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교제하는 문제에 대해 열린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야고보에게 속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온다는 소식에 비난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이방인들과의 자리를 피했습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합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식탁 교제 기피 행위는 이방 신자들에게 “유대인처럼 살도록 압력을 행사하는”일이기 때문입니다. 안디옥 사건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신앙만 가지고는 안 되고 유대인들의 삶의 패턴을 받아들여 유대교 울타리 안에 들어와서 유대인들처럼 살아야 합법적인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보수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에 근거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볼 때는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진리를 무너뜨리는 위험스러운 것이며 유대교 율법이나 관습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을 의롭게 할 수 없다고 인정한 예루살렘 회의 정신을 위배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베드로가 바울에게 개인적으로 신앙의 선배였고 바울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지만 복음의 진리대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 삼고 베드로의 행동을 위선으로 보았습니다. 어쨌든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한 바울이나 연륜으로나 교회적인 위치로 볼 때 바울의 책망을 순순히 받아들인 베드로나 대단한 분들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당시 중세 교회는 교회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나 형식과 의식 중심의 신비적 종교로 전락해가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구원이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공로가 연합하여 완성된다는 신인협동의 구원을 주장하였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전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원리를 왜곡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변질된 구원관은 당시 사람들에게 공로사상을 부추겨 여러 가지 미신적인 종교행사와 신비주의가 난무하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노력과 공로가 구원의 수단이었고, 그 결과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개념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중세 교회의 모습은 갈라디아서 2장에 등장하는 바울 당시 유대주의자들의 모습에 이미 나타났습니다. 믿음 이외의 인간적인 것을 구원의 수단으로 강요하고, 행위를 자신들의 의와 공로로 삼으려 하고, 그것으로 남을 판단하여 신앙적 우월감에 사로잡힌 교만의 모습들이 비슷합니다.

한국교회도 중세교회를 비판하며,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것이라고, 그리고 어떤 행함의 요소를 앞세워 의를 주장하거나 공로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도 어느 샌가 공로주의 사상이 배어들었습니다. 

바울의 구원론을 너무 협소하게 이해함으로 믿음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신앙과 행위가 이원화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교인들의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으나 이에 상응하는 성숙한 교인들이 같은 비율로 증거하지 못하였습니다. 

기독교인이 전 국민의 20% 가량 된다고 하지만 사회에 미치는 거룩한 영향력은 여전히 약한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믿음으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상급 받으니 상 받기 위해 선을 행하자”고 외치면서 하나님의 상급을 많이 받기 위하여 남들보다 더 많은 선한 행실을 하고 교회봉사를 열심히 하라고 하였습니다. 혹시 우리에게는 이런 모습이 없습니까? 

헌금을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주일 성수하고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순수한 응답입니까? 아니면 교회에서 인정을 받아 직분을 받고 더 나아가서 훗날 천국에서 주어질 상을 기대하는 투자입니까? 성경은 절대로 행함과 분리된 믿음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참된 믿음은 행함으로 증거가 나타나야 한다’는 교훈은 성경 전체에 나타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했고, 예수님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어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행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구원의 표시가 선한 삶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서신도 언제나 행위와 생활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로마서 12장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11장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구원의 도리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12장부터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하면서 구원 받은 성도의 삶이 산 제물이 될 것을 권면합니다.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거저 구원받은 사람이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하고 고마워서 보답하는 마음으로 자원하여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명령하고 있지, 행함이 인간의 공로가 되거나 상급이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훗날 하나님 앞에 설 때 상급이 있는 줄 확실히 믿습니다. 그러나 그 상급은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다기보다는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신학의 핵심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이 16절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 성도의 신분: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 칭의   

세상에서는 법을 잘 지키고 도덕적으로 선하고 양심대로 살면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런 삶을 살지라도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율법의 공로로는 절대 의롭게 되지 못하며 의롭다 함을 받을 육체가 없습니다. 율법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모습을 비춰 보는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어디가 더러운지 알 수 있지만 들여다본다고 깨끗하여지지는 않습니다. 더러운 부분을 씻어야 비로소 깨끗하게 됩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며 우리의 죄를 고백할 때 죄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율법을 지키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건 신약 시대건 단 한 번도 율법을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주신 적이 없습니다. 바울 서신 전체에 선포된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롭게 된다’는 말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공로와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만한 것이 못됩니다. 사람의 공로가 드러나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가려집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십자가의 용서를 믿는 믿음으로만 살면 자칫하면 방종하는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예수님이 우리를 죄짓게 하는 분이시냐? 그럴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박합니다. 십자가를 믿어 참된 구원을 얻는 사람들은 자유 함으로 얻었다고 자기의 삶을 아무렇게나 세상에 내맡기며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삶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회심한 이후로 율법을 잘 지켜서 의로운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포기하였습니다. 율법을 따라 살면 우리는 다시 죄인이 됩니다. 바울은 그것을‘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표현합니다. 자기의 것을 포기하고 오직 자신을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이제는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하나님을 향하는 사는 삶”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들이며, 이제 새로운 메시아 시대에 하나님을 향해 사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할례나 음식법이나 안식일 그리고 율법 준수 같은 ‘율법의 행위들’은 더 이상 새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과 행위를 지배하는 원리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옛 시대를 지배하던 율법은 새 시대에 그 효력과 타당성을 이미 잃었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새로운 신분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믿음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2. 성도의 행함: 믿음으로 삽니다 - 성화  

바울이 말하는 신자의 구원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칭의적인 특면과 성화적인 측면입니다. 먼저 ‘칭의’란 우리가 흔히 구원이라 부르는 것으로 사람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무죄하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재판자적 행위를 지칭합니다. 이 칭의는 사람의 ‘신분'(status)의 변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의 신분이 결정되면 반드시 그 신분에 걸맞은 행위가 따라야 합니다. 

신자들도 자신이 받은 구원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를 해야 하고 그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의 진리는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만 말하지 않고 이제 하나님의 백성답게 ‘믿음으로 살아야 할’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측면인 성화입니다. 

성화는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신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면서 삶 속에서 우리의 죄 된 본성을 변화시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바울이 말하는 구원이란 ‘칭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재림 때에 완성될 ‘성화’도 포함합니다. 

그래서 구원에 관해 언급할 때 바울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세 가지 시제를 모두 사용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그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모습이 선한 행실로 삶 속에 나타나야 합니다.   

갈 2:20은 가장 많이 암송되는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믿음의 성도들이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아도 좋은 구절입니다. 같이 읽어볼까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믿는 자의 삶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이기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입니다.

1)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자기포기를 의미합니다

우리 안에서는 날마다 치열한 영적 전쟁이 벌어집니다. 성령은 성령대로 육체는 육체대로 우리를 주장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열심 속에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를 나타내고자 하는 욕망이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 안에 얼마나 무서운 죄성과 교만이 있는가를 발견하며 우리가 죄인 됨을 깨닫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악한 기질, 부정적인 생각, 죄 지으면서 살아온 부끄러운 과거를 전부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간 왜 예배를 드립니까?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며 감사와 찬양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와 함께 나의 부끄러운 생활, 남들은 모르지만 내 안에 깊숙이 박혀 있는 죄성과 교만을 낱낱이 찾아내어 버리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채움 받기 위함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옛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는 자들은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더 이상 죄에 종노릇하며 살지 않아야 합니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해야 하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가야 하는 것이 보통 사람의 모습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사 55:8) 다를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자기의 뜻과 생각을 먼저 내세우지 않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뜻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며 세상으로 향하는 나의 의지와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자기의 뜻과 생각을 하나님의 것에 맞추어 재조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뜻이요 자기 포기를 의미합니다. 보다 큰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의 것을 내려놓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믿음의 인물들이 자기 포기에 성공하였습니다. 왕의 허락을 받지 않고 왕의 앞에 나갔다가 왕이 기뻐하지 않으면 왕비라도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에스더는 자기 민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왕의 앞에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삼일을 금식 한 후에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고백을 하며 왕의 앞에 나아갔습니다. 에스더가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철저하게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행동하였습니까? 

히 11:19,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이삭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아들인데 설령 이 아이를 번제로 드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다시 살릴 것이라는 확신하였고 그 확신에 따라 아들을 죽여 번제로 드리려 하였습니다. 포기를 했더니 이삭을 잃기는커녕 이삭도 얻고, 아브라함의 씨로 말미암아 천한 만민이 복을 얻는다는 약속도 받았습니다.

자기 포기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고민하여 죽을 정도까지 되었다면서 자신의 마음에 휘몰아치는 격랑을 제자들에게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하나님을 설득하며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것이나 자신의 사정을 하나님에게 통고 하려는 것은 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몇 시간 후면 십자가의 고통을 겪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육신의 고통보다도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죄인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고통이 예수님에게 있어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삶이었고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사명을 완성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개인적인 욕망을 희생하는 자기 포기의 기도를 드립니다.

내가 포기해야 할 욕망이 무엇입니까? 남들은 모르지만 은밀하게 즐기고 있는 죄스러운 습관들, 포기하지 못한 채 고집하고 있는 욕망들이 있습니까? 나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기를 원한다면 그런 것들이 먼저 비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걸림돌이 자존심과 포기하지 못한 자기의 자랑.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 막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는 훈련, 자기를 완전하게 부인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붙들리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2)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은 성령님이 주관하시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을 사는 성도는 마땅히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빛의 자녀들처럼 지혜있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지혜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충만하심을 받아 악한 세상을 본받지 않고 헛된 것이 우리의 가진 것을 낭비해서는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말씀했습니다. 술에 취하게 되면 술기운이 나를 주장합니다. 반면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성령이 시키는 대로 살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주관하시게 되면 이 세상의 어두움의 일과 멀어지게 됩니다. 

다른 성도들과 함께 찬양하고 예배하며 주의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더욱 사모하며 즐거워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자는 다른 성도들 관계에 있어서도 덕을 끼치는 지혜로운 성도가 됩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무엇을 하기 전에 먼저 필요한 것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움 받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염려가 있습니까? 염려 대신 성령의 능력으로 채워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미움이나 질투가 있습니까?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 대신 성령의 능력으로 채워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침체되고 눌리는 것이 있습니까?   두려움이 엄습합니까? 사사기를 통하여 보니 성령이 임하시면 비겁한 자가 용감해지고, 미련한 자에게 통찰력이 생기고, 힘없는 자가 강해집니다. 

불확실한 세대에서 이길 수 있는 힘은 성령의 능력에 있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주님과 교제를 가지면서 우리 자신이 변화되고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문법적으로 완료형입니다. 

전에 못 박혔고 지금도 못 박혀 있습니다. 자기 의를 내세우고 자기중심적이던 과거의 사울은 죽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주인이 되시고 삶의 주관자가 되신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의 어떤 것이 나를 자신을 지배하려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언제든지 성령이 임하여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구원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칭의의 근거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순종의 성격을 가지기 때문에 믿음과 행함은 결코 나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행함이란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에게 당연히 나타나야 할 열매지 결코 공로나 자랑거리나 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행함의 문제를 가지고 우월감에 빠져 서로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바리새인적인 모습도 고쳐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포기하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뜻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며 세상으로 향하는 나의 의지와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성도들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임합니다. 성도들을 통해 은혜의 복음이 이 땅위에 힘 있게 전파되며 하나님 나라가 날마다 확장되는 귀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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