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의도 : 소명과 중생 (롬 8:2)

첨부 1


하나님의 의도 : 소명과 중생 (롬 8:2- )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사도 요한만큼 간결하면서도 직선적으로 말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요일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우리를 살리려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이땅에 오셔서 온갖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희생되심으로 하나님과 인류 사이의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고, 또한 죄로 인해 촉발된 우리의 육체적 정신적 문제까지 담당해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신적 장애와 정서적 장애 현상 또한 인간 타락의 심각한 결과 중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믿는 사람에게 구원이 찾아옴으로 이러한 결과들은 거꾸로 역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救贖, redemption)은 하나님과의 화목뿐만 아니라 정신적 병리의 치유도 포함합니다. 그렇지만 인간 타락의 결과가 너무나 심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확립되었다고 해서 그것들이 즉시 원상 복구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권면적 상담이론을 주창한 J. 아담스는 사람이 실제로 구원을 받으면 감정적 치유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는 죄가 인간 정신에 미친 무섭고도 영구적인 충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구원에서 일어나는 전격적인 변화를 인정함과 동시에 죄가 인간 정서에 미친 치명적 결과가 즉시 극복되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은 독생자의 대속사역을 통한 인류 구원에 있습니다. 성경은 이 구원을 우리에게 실제로 임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영감된 계시의 말씀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이 구원은 여러 단계로 진행되는데, 일반적으로 소명--중생--회심--칭의--입양--성화--견인--영화의 순서로 말하여집니다. 각 단계는 나름대로 우리가 겪고 있는 정서적 심리적 문제의 치유를 위해 의미하는 바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구원의 단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의도의 전반적인 의미를 짚어보고, 구원의 단계 중 소명과 중생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고찰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의도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부르셔서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통하여 밝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시고, 그들을 부르셔서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29절) 구원의 경륜에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에 대하여 신학자들은 ‘구속의 성취’와 ‘구속의 적용’으로 구분합니다. 구속의 성취(accomplishment)는 예수 그리스도가 2천 년 전에 이땅에 오셨을 때 우리의 구속을 단번에 이루신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구속의 적용(application)은 우리의 개인적인 구원의 경험과 관계가 있습니다. 아치볼드 알렉산더와 같은 과거의 신학자들은 이것을 ‘경험적 종교’ 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이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29번에 보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구속에 참여자가 되는가?”라고 질문하고 이렇게 답변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구속에 참여자가 되는 길은 그의 성령께서 그 구속을 우리에게 유효하게 적용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의 성취가 성육신, 사역, 십자가 죽음, 부활 등 여러 논리적 부분으로 나눠질 수 있듯이, 구속을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도 부분뿐만 아니라 전체의 관점에서 연구될 수 있습니다. 

구원의 경험을 이루는 구성 요소들에 대하여 연구하면 정서적 치유에서 기대할 수 있는 과정에 대하여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구원은 마음속에서 시작되지만, 성도가 영원한 삶을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영화롭게 될 때에 완성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과정은 광범위하고, 철저하며, 지속적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말을 빌리면 성령 하나님은 “구원의 적용을 이루시는 유일한 동인(動因)” 이십니다(9장 3항).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을 통해서 구원하십니다(딛 3:5). 

구원의 과정 속에서 성령님의 주된 역할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주요 요소들이 성령님에 의해서 발생됩니다.  

‘중생’은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고 하셨습니다.  

‘회심’(=돌이킴) 또한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고넬료 가정에 성령께서 임하신 사건을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다”(행 11:18)고 했습니다. 

‘믿음’은 또 어떻습니까?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전 12:3)고 하신 것은 믿음이 성령님의 은사임을 나타냅니다. 

‘칭의’는 일반적으로 성부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이해되고 있지만 성령님의 사역이기도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는 것(‘입양’) 역시 성령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4-15).

우리의 ‘성화’가 성령님에 의해서라는 사실은 놀랄 만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그의 독자들을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을 통해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지칭합니다(벧전 1:2).  

또한 성령님은 믿음 가운데의 ‘인내’(견인)와도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30에 따르면 성령님은 우리의 최후의 구속의 보증이십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도 여러분! 이처럼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의 전 과정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시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게 하십니다. 중생과 회심과 칭의와 입양과 성화와 견인의 과정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전폭적으로 순종하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소명(召命, calling) 

30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

이제 구원의 단계를 직접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 단계는 ‘부르심’ 곧 ‘소명’입니다. 소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점에서 그 소명은 우리에게 있는 응답할 수 있는 힘도 포함합니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은 ‘효력있는 부르심’(effectual calling)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먼저 본문 28절을 다시 봅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축복을 받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와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효력적으로 새 생명을 부여한 자들이며, 따라서 복음 초청에 대해 믿는 마음으로 응답할 수 있게 된 자들입니다. 

29~30절은 28절에 대한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0절의 ‘부르다’(에칼레센)라는 동사는 28절의 명사형(‘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동일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 모두가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 부르심이 효력 있는 부르심인 것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우리는 옵니다(we come). 효력 있는 부르심의 가장 생생한 예는 아마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 있던 예수님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죽은지 나흘 된 시체를 향한 예수님의 ‘부르심’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효력 있는 부르심을 통하여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불러내십니다. 주님이 불러내시면 우리는 나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적개심에 불타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할 때,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음을 거부한다 하더라도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고전 1:24)가 될 것임을 바울은 알았습니다. 

소명은 하나님께서 ‘허물로 죽은’(엡 2:4-5) 사람들의 마음속에 구원의 역사를 개시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 여러분! 소명의 교리는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을 통제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상기시켜 줍니다. 하나님은 자녀로 입양한 모든 이들의 삶에 개인적으로 그리고 친밀하게 관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관련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 어린 통제를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외부 환경과 상황, 대인 관계, 인간 신체, 두뇌 화학 작용 그리고 속사람(마음)을 포함합니다. 사람 삶의 모든 측면에 대한 하나님의 통제에 성도는 안심하고 반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제에 순응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두 가지 표현은 모두 인생에 하나님이 온전히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감정과 행동을 절제해야 함을 가리킵니다.  

절제력(self-control)과 자아력(ego strength)이라는 용어는 기본적인 감정과 행동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물론 타락과 함께 인간들은 주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습니다. 세계와 역사 그리고 부패와 죽음에 처한 자신의 육체에 대하여서 뿐 아니라 개인적 감정과 생각 그리고 의지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면 성령님이 우리 각자의 속사람에 내주하며, 건강한 자기 절제력을 이루기 위하여 역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제를 인정할 때, 성령님이 우리 안에 역사하여 결국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기게 되는 절제력을 갖게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고전 1:9).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딤전 6:12), 거룩한 삶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살전 4:7).  

그러므로 주님의 부르심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지금의 악한 세상과는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분리하도록 하는 다른 종류의 삶을 살도록 촉구합니다. 
 

3. 중생(重生, Regeneration) 

구원의 두 번째 단계는 ‘거듭남’ 또는 ‘중생’입니다. 중생이란 성령께서 인간에게 오셔서 일으키시는 마음의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구약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으며, 그때에야 비로소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들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30:6에는 우리의 영적인 갱신을 ‘마음의 할례’라고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중생이라고 부르는 것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  

선지자 에스겔도 이와 유사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중생에 관한 대표적 논의는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입니다. 밤에 조용히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어떤 행동을 취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니고데모나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나야 하는 성령의 역사를 설명하고 계십니다.

요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5=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거듭나야(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은 명령형이 아닌 직설형(indicative)입니다. 이 구절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에 대한 선언적 진술입니다. 중생은 하나님 나라를 보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적 출생에서 사람은 전적으로 수동적인 것같이 중생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중생은 하나님의 능동적인 사건입니다. 

니고데모는 더 이상 자신의 거듭남의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됨과 그 나라의 영적인 실체들을 바라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일꾼들은 모두 중생의 체험을 확신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영국의 유명한 전도자 썸머 휠드 박사에게 어디서 탄생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더볼린과 리버풀에서 탄생했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두 군데서 탄생하실 수 있습니까?” “오! 그것은 그럴 수 있지요. 육체는 더불린에서 났고 거듭나기는 리버풀에서 났으니까요” 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기자들이 무디 선생에게 그의 일생의 간단한 기사를 써 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손에 붓을 잡고 <두와이트 엘 무디, 육신으로는 1837년 출생, 영적으로는 1856년 출생, 언제 육신이 죽을 것인지 모르나 영혼은 영원히 산다>고 써주더라는 것입니다.

위대한 복음전도자인 화잇필드는 <너희는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제목으로 3000번 이상이나 설교 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의 친구가 “왜 당신은 그 제목으로 그렇게 자주 설교합니까?”라고 물으니, 그는 대답하기를 “왜냐하면 당신은 거듭나야 하기 때문이요”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중생의 역사는 어느 정도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일어납니다. 이 특별하고 한번 밖에 없는 성령의 역사는 우리에게 확신을 가져다 주며, 예수님에게 우리 마음을 헌신하도록 준비시킵니다. “그(성령)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성령님은 중생의 역사 안에서 우리가 자신을 더 인식하도록 해 줍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우리의 부족한 관계에 대하여 의식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의로움에 대한 필요 그리고 미래의 심판에 대하여 의식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제대로 반응할 수 있으려면 중생을 통하여 이러한 사실들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중생에서 시작된 변화는 회심 후에 계속되며, 남은 생애동안 계속됩니다. 이 과정을 보통 성화(sanctification)라 부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뒤 ‘성령 안에서’ 생활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더 닮을 필요가 있는 마음의 특정 영역을 차차 자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자신에 관한 진실에 대해 열려져 있는 것(openness)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속적인 특징이 되어야 합니다.  

거듭난 후 우리의 자기의식(self-awareness)은 이전보다 더 커져야 합니다. 비록 새신자들은 때로 자신에 대한 진실을 개방하는 데 주저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아시고 받아들이신 것을 개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중생의 교리와 복음의 본질은 성도가 자신에 대한 진실에 더 정직하고 더 넓고 깊은 개방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숨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께 그분과 더 친밀한 관계를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실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 될 것입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구원과 관계된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은 죄인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을 통하여 구원하신다” 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논리적 순서는 소명-중생-회심-칭의-입양-성화-견인 그리고 영화의 단계로 표현됩니다. 

모든 단계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지만, 우리의 이해를 위해 각 단계별로 정서적 치유와 관계되는 핵심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오늘은 부르심과 중생의 단계를 살펴보았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함축되어 있는 하나님의 통제를 인정하고 신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통제에 더 잘 순종하도록 해 주는 절제력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기억합시다. 

중생에서 시작된 변화는 남은 생애 동안 계속되어야 하는데, 그리스도인은 자신으로부터 숨는 삶을 청산하고 자신에 관한 진실에 대해 주저없이 개방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부르심과 중생의 은혜에 더욱 감사하고 하나님의 의도에 전폭적으로 순종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