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 안에서 자랑하라 (고후 10:12-18)

첨부 1


주 안에서 자랑하라 (고후 10:12-18)

골프 재미에 푹 빠진 안수집사 한 분이 있었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화창하고 어느 주일날, 이 집사님은 골프가 치고 싶어 갈등하다가 결국은 예배를 드리지 않고 골프장으로 향했습니다. 이를 본 천사가 하나님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저 집사, 혼 좀 내줘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골프장에 도착한 집사는 1번 홀에서 힘차게 스윙을 했습니다. 그런데 볼은 무려 350야드를 날아가 그린 위에 떨어진 뒤 홀컵으로 쏙 들어갔습니다. 홀인원이 된 것입니다.

홀인원을 처음으로 경험한 집사는 흥분했습니다. 천사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항의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이것은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벌을 주셔야 하는데 홀인원을 하게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 하나님은 미소를 지으며 천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수 집사가 이 일을 누구에게 자랑하겠니? 자랑을 하면 주일에 골프 친 것이 들통 날 테고, 자랑하고 싶은데 자랑할 수 없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어디 있겠느냐.” 

여러분, 자랑하기 좋아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자랑하고 싶은 욕망이 다 있습니다. 그것은 남에게서 인정받고 싶고, 또 차별화된 사람임을 과시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외제의 좋은 자동차와 명품의 좋은 옷을 입는 것도 다 자랑하고 싶고, 나는 좀 다르다는 차별화를 위해서입니다. 자랑은 자신에 대해서 긍지를 갖는 것이고, 자신을 높이는 것이며,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런 세상적인 자랑은 다 헛된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 자랑은 거의 대부분이 육체적인 것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출세, 건강, 풍요, 자녀들의 좋은 학교 진학, 좀 더 나가면 지위나 명예, 권력과 같은 사회적 인정이나 자아실현 등일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것도 자랑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육체적 자랑은 자만으로, 자만은 교만으로, 교만은 타락으로 연결됩니다. 

솔로몬 왕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누린 왕입니다. 그러나 그는 향락에 도취되어 하나님을 잊고 우상을 섬기는 자가 되어 통일왕국을 지키지 못하고 남북으로 분열되는 원인 제공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십년 가는 권세가 없고, 인생을 나그네, 안개, 풀의 꽃 등으로 묘사한 성경은 인간적 자랑이 얼마나 무익한가를 단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17절 말씀에서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교사들에게 사도성에 대한 도전을 받았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성도들을 현혹하여 자신들의 잘못된 신앙이 옳은 것이라고 하면서, 사도 바울의 복음을 혹평하고,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를 자신들의 업적으로 돌리며 자랑하였습니다. 

본문 15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거짓교사들의 자랑이 자신들이 한 일이 아니라 남의 수고를 가로채어 자랑하는 것임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남의 수고와 터 위에 복음을 전하지 않고 교회를 세우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이 일에 철저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그에게 허락되어진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롬 15:20절에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는 말씀처럼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이 중요한 일이지만, 그러나 이렇게 귀한 하나님의 일도 규범을 따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이 이룬 일을 가지고 자신의 자랑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의 영역을 침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안의 거짓교사들은 사도 바울이 회심시켜 놓은 성도들로 세워진 교회를 인간적인 방법으로 도적질하고 빼앗았던 것입니다. 

우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금마한 연못에 개구리 한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개구리는 소원이 있었는데, 그것은 큰 강에 가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연못으로 큰 황새 한 마리가 날라 왔습니다. 개구리는 황새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다리에 끈을 매고 내가 그 끈을 입에 물을 터이니 나를 큰 강가로 옮겨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황새는 개구리의 간절한 부탁에 다리에 끈을 매고 큰 강가를 향하여 날았습니다. 황새가 들의 상공을 날아가고 있을 때, 들에서 일을 하던 농부들이 개구리를 달고 날아가는 황새를 보고 “야! 황새의 지혜가 훌륭하구나”하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때 입에 끈을 물고 매달려 가던 개구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제가 가르쳐 준 지혜입니다.”라고 말을 하다가 끈을 놓치는 바람에 높은 공중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개구리가 죽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황새의 힘으로 날아가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지혜로 날아간다고 자랑을 하다가 죽은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거짓교사들이 바로 이러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거짓교사들이 이렇게 판단하는 것은 순전히 자신들의 기준에 따른 판단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2절 말씀을 통해 거짓 교사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기를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선동하고 있는 거짓 교사들은 자기들이 정하여 놓은 기준을 가지고,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고 말하며 그가 하는 일들이 틀렸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바르고 선을 행한다고 주장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그들의 모습을 전해 들으면서, 그들은 그들 스스로 세워놓은 판단과 생각에 따라서 자기를 헤아리고 비교하는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어리석은 자는 자신들임에도 불구하고 거짓교사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알지 못하고 자신들의 지혜를 자랑하며 도리어 사도 바울을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어리석은 부자가 있었습니다. 이 부잣집에는 오리를 많이 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주인은 자기 집에 오리가 몇 마리가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고작 셈을 하는 방법이 두 마리씩 짝을 지어보는 것입니다. 짝을 맞춰 보아서 짝이 맞으면 그냥 맞나보다 했습니다. 이것을 안 종이 오리를 몰래 잡아먹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이 오리를 세어보는데 오리가 짝이 맞지 않아 모자랍니다. 주인은 ‘종이 오리를 잡아먹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인은 종을 불러 “네가 오리는 잡아먹었지?”라고 몽둥이로 때리면서 추궁했습니다. 처음에도 잡아떼다가 결국 종이 한 마리를 잡아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일 당장 한 마리를 갖다 놓겠다고 주인과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종이 주인이 오리를 셈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니 남은 한 마리도 잡아먹으면 되겠다고 생각을 하고는 한 마리를 잡아 배불리 먹고 편하게 잠을 잤습니다. 그 다음날 종이 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말씀대로 오리 한 마리를 갖다 놓았습니다.” 주인이 세어보니 짝이 딱 맞았습니다. 그러면서 종의 나쁜 버릇을 고쳤다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어리석음을 모릅니다. 도리어 자기가 똑똑한 줄만 압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거짓교사들은 스스로 기준에 의해 판단하면서 칭찬하며 자랑하고, 스스로 지혜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들이 가장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바울은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칭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여러분, 우리를 판단하시고, 인정하시고, 칭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우리 자신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돌아봄에 거울이요,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평가가 어떠할지 짐작할 수 있는데, 그것은 자신에게 관대한 마음이나 세상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이 기준이 되어 우리를 칭찬하고 또한 나무라고 징계하시기까지 한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덮고 알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은 여전히 자신들을 위하여 스스로 세운 판단 기준에 의하여 스스로 속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 1:10절에서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이기를 원하는 우리는 사람들의 인정함을 받는데 연연해 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 인정받는 일을 훨씬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다가 사람의 인정을 받기는 커녕 오히려 욕을 먹는다고 할지라도 이로써 실망할 것이 아니라,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해 나갈 줄 아는 여유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주안에서의 자랑, 참된 자랑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고후 12:9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고후 11:30절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자랑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이룬 업적이나 공로도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자랑은 자신의 연약함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지금까지의 모든 일은 자신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고백입니다.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우고 수많은 생명을 주께로 인도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고전 15:9-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연약함을 자랑하는 사람은 참으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에게 모든 것을 내어 맡깁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나 자신을 볼 때 문제투성이요, 부족함이 많지만 이것 때문에 고민하거나 낙심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우리 자신을 맡길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놀라운 변화를 입게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말하는 주안에서의 자랑, 참된 자랑은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 6:14절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을 비롯한 초대교회 사도들은 가는 곳 마다 십자가를 자랑하였습니다. 십자가야말로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오해합니다. 복음이 병 나은 것이라고 합니다. 능력이라고 합니다. 이 땅에서 많은 부를 가져다주는 부의 원천이라고 하고,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기쁨의 원천이라고도 합니다. 맞습니다만 그렇다고 그것이 복음의 핵심은 아닙니다. 

여러분, 왜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와 마귀와 사망에게서 자유를 얻었고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사건은 바로 나를 구원하기 위한 사건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이 일을 완성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다. 

여러분, 십자가 자랑이 왜 참된 자랑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모든 문제가 십자가의 열쇠로 다 해결이 되기 때문이고, 인생의 행복도 십자가로 말미암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 마음에 감격이 넘치고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오직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요, 우리의 삶속에 있는 은혜의 축복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자랑하는 성도가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