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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사로야 나오라 (요 11:3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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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로야 나오라 (요 11:33-44)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33-37)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8-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40-42)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43-44)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요11:45-46)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

예수님이 오셔서 부르신다는 소리를 듣고, 마리아는 밖으로 달려 나왔습니다. 집 안에 있던 사람들도 마리아가 무덤으로 가는 줄 알고 뒤쫓아 왔습니다. 그 때까지 주님은 喪家에 들어오지 않고 길에 서 계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립니다. 뒤따라 나온 조객들도 함께 웁니다. 유대 관습에 제4일에 크게 운다고 했는데 아마 그들은 큰 소리로 함께 울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보면서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33-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 구절은 성경에서 가장 짧은 절입니다. 세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물이 담고 있는 그 의미는 매우 큽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우시는 장면이 세 번 나옵니다. 첫째는 본문이고 둘째는 누가복음 19:41에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우신 것이고, 셋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셨습니다.(히5:7) 예루살렘 을 향해 우신 것은 유대 땅이 로마 군대에 짓밟힐 것을 내다보신 민족적인 울음입니다. 그 때에 주님은 소리 내어 우셨습니다.(κλαιω :weep) 겟세마네에서 우신 것은 전 인류의 죄를 홀로 지신 인류를 위한 울음입니다. 그 때에 주님은 통곡하셨습니다.(κραξω :crying) 

그런데 본문에서는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셨습니다.(δακροω :shed tears) 유대인들은 주님이 나사로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깊은 애도의 눈물로 생각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36-37) 

물론 주님은 마르다나 마리아의 처지에서 함께 눈물을 흘리셨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물을 애도의 눈물로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잠시 후면 자기 손으로 살려낼 사람인데, 슬픔의 눈물을 흘리실 필요가 없잖습니까? 주님의 눈물은 죽음에 대한 애통이 아닙니다. 다른 의미의 눈물입니다.
  
주님의 눈물의 의미는 33절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은 우는 사람들을 향해서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개역한글판에는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다”고 번역했습니다. 통분히 여겼다는 말은(ενεβριμησατο) 말(馬)이 거칠게 숨 쉬는 모습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심한 분노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영문 RSV 성경에는 이 말을 ‘마음이 깊이 움직이셨다’고 표현합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분노하시는 모습입니다. 민망히 여기셨다(εταραξεν)는 말은 마음이 혼란해 져서 동요를 일으키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무엇에 대해서 통분히 여기시고, 무엇에 대해서 민망히 여기셨을까요?  
  
첫째로, 주님은 죽음의 권세에 대해서 분노하셨습니다. 도대체 죽음이 뭐 길래 저렇게 사람들을 슬프게 하고 불행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드는가? 주님은 이들을 지배하는 사망의 권세에 대하여 분노하셨습니다. 둘째로, 사람들의 오해에 대해서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주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려 주시려고 오셨는데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라비의 죽음만 탄식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러 오신 주님을 몰라 봤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은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덮어 놓고 크게 울기만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주님은 마음은 민망해 졌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눈물은 인생들을 영원히 불행하게 만드는 죽음에 대한 통분의 눈물이요, 죽음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도 못하고 좌절에 빠지는 인생들을 민망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눈물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인생 죽음의 비극이 너무나 큰 것을 아시고, 주님은 늘 무거운 사명을 느끼셨습니다.
  
나사로 무덤 앞의 장면이 바로 인류의 비극입니다. 나사로는 무덤 속에서 썩어 갑니다. 유족들은 오라비의 죽음 앞에 낙심천만입니다. 많은 조문객들은 위로하려고 함께 크게 웁니다. 이 조문객들도 언젠가는 나사로처럼 무덤에 들어갈 운명입니다. 조문객의 처지에서 나사로의 처지로 바뀌는 것은 한 순간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처지를 깨닫는 것이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무덤 앞에서 주님의 첫 말씀은 돌을 치우라는 명령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38-39) 

유대 땅에는 암반이 많아서 그런지 동굴 무덤이 많습니다. 자연 동굴이나 사람이 파서 만든 수평이나 수직의 동굴에 시신을 안치합니다. 저도 예루살렘의 어떤 동굴 무덤에 들어 가 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파서 만든 동굴인데 좁은 입구로 들어갔더니, 그 안에 사람이 서 있을 정도의 공간이 나오고 거기에 다시 여러 방향으로 시체를 넣어 두는 큰 구멍들을 파 놓았습니다. 

이런 동굴 무덤에 시체를 장사를 지내고 나면, 시체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동굴 입구를 큰 돌로 막아 놓습니다. 주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신 것은 바로 이 무덤의 문을 열어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마르다는 이 말씀을 듣고 펄쩍 뛰면서 막았습니다.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 

죽은 지 나흘이 지나서 썩은 냄새가 나는데 뭘 보시려고 하십니까? 마르다는 주께서 나사로의 시체라도 보시려고 그러는 줄 알았어요. 우리도 그렇습니다. 임종을 지켜보는 것은 가까운 사람의 도리입니다. 만일 임종을 못 보았으면 죽은 屍身이라도 만져 보고, 그것도 아니면 관이라도 만져 봅니다. 주님께서도 평소에 나사로를 사랑하셨는데 임종 전에 못 보았으니 시신이라도 보려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냄새 나는 시체를 굳이 보실 필요가 없다고 말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들에게 무덤 문을 열라고 하셨습니다. 무덤을 여는 것이 바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주님은 우리가 무덤에 들어갈지라도 언젠가 다시 오셔서 우리 무덤 문을 여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의 명령을 듣고 사람들은 무덤을 열었습니다.  이때에 무덤 문을 연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조문하러 온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많은 이적을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37절의 말씀에 보면 그들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이적까지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이 사람들로 하여금 무덤의 문을 열게 하셨습니다.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은 무덤 문을 열면서 그 속에 누가 들어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바로 자기들의 손으로 수의를 입히고 묶어서 갖다 놓은 나사로를 재차 확인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을 때에 이 사람이 과연 나사로인가 의심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앞서서 소경이 눈을 뜨고 난 다음에, 어떤 사람들은 이 사람이 그 소경이었다고 증언 한 반면, 어떤 사람들은 그 소경과 닮은 사람이라고 말한바 있습니다.(9:9) 

주님은 무덤 문을 연 사람들로 하여금 분명히 자기들이 장사 지냈던 나사로요, 바로 그 무덤에서 살아났다고 증언하게 만드셨습니다. 또한 이들로 하여금 이 엄청난 사건을 보게 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좀처럼 믿지 않는 뺀들이 유대인들에게 직접 무덤 문을 열라고 하셨습니다. 무덤 문을 여는 것은 작은 노동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작은 노동이 위대한 부활 사건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 무덤의 문은 상징적인 의미가 큽니다. 나사로 무덤의 돌은 바로 모든 사람들이 안고 사는 절망의 뚜껑입니다. 사람마다 넘지 못하는 삶의 장벽들이 많습니다. 

요즘 애들은 “넘사벽”이란 말을 잘 씁니다. “넘지 못할 사차원의 벽”이란 뜻입니다. 무덤은 인간에게 “넘사벽”입니다. 결코 넘지 못할 벽입니다. 이 장벽 앞에서 사람들은 모든 것을 체념합니다. “이제는 다 끝장 났다!” 무덤 앞에서 소망을 가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덤 안에는 가망 없는 시체가 들어 있습니다. 이 시체는 우리 인생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무덤 안에 들어 있는 나사로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조만간 무덤에 갇힐 신세입니다. 무덤에 들어가는 순간 명성도 권세도 지식도 사랑도 재물도 다 끝장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 앞에 그 무덤의 문을 여시기 바랍니다.  
  
무덤 문을 여는 것은 곧 우리의 절망적인 모습을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시체 그대로 드러내세요. 자신을 적나라하게 보이세요. 무덤의 뚜껑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불신앙입니다. 불신앙과 함께 편견, 선입견, 교만, 세상 자랑, 허망한 명성, 바람 잡는 지위. 이 모든 것을 다 열어야 합니다. 신앙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진실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썩은 모습이라도 그대로 주님 앞에 드러낸다면 하나님은 거기서부터 위대한 부활 역사를 시작하실 것입니다. 오늘 무덤 문을 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죽은 인생을 일으켜 주실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40) 썩은 냄새가 나는 시체를 뭘 보시려고 하느냐는 마르다의 말에 대하여 주님은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나님의 영광이란 바로 나사로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나사로의 부활 문제가 순전히 마르다의 믿음에 달렸다는 뜻일까요? 마르다가 믿으면 나사로가 부활하고, 안 믿으면 무덤에 영원히 있고 그렇습니까? 그런 뜻은 아닙니다. 마르다가 믿든지 안 믿든지 주님은 나사로를 살리십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말의 뜻이 뭐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나사로의 부활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봅니다. 신자든지 불신자든지 함께 나사로의 부활을 목격합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순전히 인간 세계에서 일어난 기적으로 볼 것입니다. “어! 별 일이네!” 반면에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부활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봅니다. “과연 하나님은 위대하시도다! 죽은 자를 살리셨도다!” 오직 믿음을 가진 자만이 나사로를 부활시키신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부활 사건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생활도 마찬가집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만사가 다 우연히 돌아가는 줄 압니다. 살아 숨 쉬는 것도 허파의 기능이 정상이고 심장이 뛰니까 그저 산다고 생각합니다. 돈을 버는 것도 우연이요, 병드는 것도 우연이요 죽는 것도 우연입니다. 인간의 성품도 우연이요 성공과 실패도 우연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20세기를 지배하는 삶의 정신은 실존 철학이요, 실용주의이며 그 바탕에는 언제나 과학 정신이 들어 있습니다. 과학이란 무엇인가요? 철저한 사실과 논리를 바탕으로 합니다. 태백산맥에 묻혀 있는 철광석이 저절로 튀어 나와서 철가루가 되고 다시 바람에 날려 다니다가 보니 소나타 승용차가 되었다고 하면 누가 그것을 믿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엄정한 인간의 삶을 모두 우연으로 돌리는 그것이 과학적입니까? 아무튼지 현대인들은 과학시대에 살면서 인생의 모든 것을 비과학적인 ‘우연의 학문’인 진화론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삶의 모든 순간마다 우리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허파와 심장이 뛰는 것도 하나님 손길이요, 빈부귀천이 다 하나님 소관이요, 성공과 실패, 건강과 병약함이 다 하나님 섭리임을 영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니 인간사의 모든 순간마다, 평탄할 때만이 아니라, 험난한 때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거기에 계심을 보고 알게 됩니다. 매순간 하나님 영광을 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믿는 사람은 인생 살이의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부활과 영생의 영광까지 볼 것입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먼저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41-42) 

예수님은 기도하지 않으셔도 나사로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으셨습니다. 그런데도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생애의 중대한 순간마다 기도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이적 앞에서, 십자가를 지시기에 앞서서, 나사로를 살리시기에 앞서서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머리터럭 하나 자라게 하지 못하면서도 기도는 전혀 하지 않습니다. 죽도록 노력할 줄은 알면서도 하늘을 보며 기도할 줄은 몰라요. 여러분, 성도로서 무엇을 하든지 항상 기도하고 행하시기 바랍니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사람들은 물속에도 들어가고, 불속에라도 들어갑니다. 어디든 가고 어디든 참여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만은 쉽게 양보합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누구도 생존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생존의 기반을 하나님께 두고 있습니다. 삶의 매 순간을 기도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보세요.  
  
첫째로, 주님은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41)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셨습니다. 앞서서, 마르다는 먼저 썩어 냄새 나는 나사로의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먼저 하나님을 우러러 보셨습니다. 마르다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불가능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라도 무엇이든지 이루시는 하늘 아버지를 보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東西南北만 살피지 말고 하늘을 우러러 보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우리를 위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세상을 보면 불가능만 보입니다. 죽음이라는 엄청난 절벽이 보입니다. 무덤이라는 공간적 제약이 보이고, 죽은 지 나흘이라는 시간적 한계만 보입니다. 

하나님을 보세요. 그러면 소망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바라볼 때에는 파도 위를 밟고 걸었습니다. 그러나 발아래 풍랑을 바라볼 때에는 물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둘째로, 주님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41) 무엇을 이루어 달라는 기도 이전에 감사를 먼저 드립니다. 감사가 앞서는 것은 지금 구하는 것을 이미 받은 줄 믿는다는 뜻이고, 구하는 것보다 이미 받은 것이 많다는 뜻입니다. 

41절의 말씀에 보시면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고, ‘항상 내 말을 들으신 것’에 대하여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언제나 응답해 주신 과거사들을 감사하면서, 동시에 지금 바라는 일도 잘 해 주시리라고 확신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기도하라면 무조건 요청부터 합니다. 언제 하나님께 맡겨 둔 적이 있습니까? 어째서 다짜고짜 하나님께 내 놓으라고만 하십니까?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님께 받은 것들을 생각하면서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날 먹고 입고 거한 것을 감사 하고, 죽을 번 한 환경에서 지켜주심을 감사하고, 성공적인 삶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금 구하는 바도 내가 바라는 것보다 훨씬 잘 될 것을 확신하면서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튼 우리는 보따리 내 놓으라는 요청보다, 물에서 건져 주신 것을 먼저 감사드리는 기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로, 주님은 자신의 형편보다 둘러 서 있는 무리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42) 

자기의 유익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들의 기도는 수백 년이 흘러도 나와 내 집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내 건강, 내 신앙, 내 자녀, 내 직장, 내 사업, 내 가정, 내 지위. 만사가 나를 중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애초부터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무덤 앞에서 우는 마르다와 마리아, 믿음 없는 유대인들, 그리고 썩어 냄새 나는 나사로. 이 모든 사람들이 진정한 신앙을 갖게 되기를 구하셨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타적인 기도를 드림으로써 주님은 한 번도 거절당함이 없는 응답을 받으셨습니다.  
  
넷째로, 주님은 아버지와의 내면적인 교제 속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앞선 여러 가지보다 가장 중요한 기도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모습 없이 기도하기 때문에 응답 없는 공허한 기도자가 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여!’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주님은 단 한번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신 외에는, 성부에게 ‘하나님’이라고 부르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신 적도 없습니다.  언제나 ‘나의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평소에 아버지와 친밀히 교제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기도자는 마땅히 하나님과 깊은 내면의 교통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는 만큼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살아야 됩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든 상관도 하지 않고 살다가, 무슨 일을 당하면 덮어 놓고 내 뜻만 이루어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세상의 기도자들입니다. 천 마디 만 마디의 말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이방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만 자기들의 신이 듣는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부께서는 은밀한 골방의 기도 소리를 들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과 서로 교통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무덤 앞에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셨습니다. 감사로 기도드렸습니다. 남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와의 깊은 교제 속에 기도하셨습니다. 이 모든 기도가 나사로에게 영광으로 응답되고 있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주님은 마지막으로 나사로를 부르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43) 이 말 속에는 세 가지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로, 주님은 죽은 자를 산 자처럼 부르셨습니다. 마치 잠자는 자를 깨우듯이 나사로를 부르셨습니다. 주님께는 잠자는 자를 깨우는 것이나 죽은 자를 일으키는 것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둘째로, 주님은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작은 소리로 하셨어도 나사로는 일어났을 것이요, 마음으로만 생각하셨어도 나사로는 살아났을 겁니다. 그런데도 큰 소리로 외치신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에 많은 마술사들이나 신접자들이 마술로 사람들을 홀릴 때에 많은 주문을 외웠습니다. ‘수리수리 마수리’ 하면서 중얼거립니다. 

이사야서 8:19에 보면,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은 마술이나 눈속임이 아닙니다. 데이비드 카퍼필드가 만리장성을 뚫고 나오고 자유의 여신상을 옮기는 것은 마술입니다. 일종의 눈속임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은 눈속임이 아니라, 진정한 부활이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사람들이 듣도록 분명하고 짧은 말로 명령하셨습니다.  
  
셋째로, 주님의 말씀의 위력입니다. 주님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능력이 있습니까? 그 말 한마디에 파도가 멈추고, 귀신이 쫓겨가고, 죽었던 야이로의 딸이 살아났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흥미로운 말을 했습니다. “만일 주께서 ‘나사로야 나오라’ 하지 않으시고 ‘죽은 자여 나오라’ 하셨더라면 모든 죽은 자들이 다 일어났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 한마디에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것은 주님의 신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인간의 교훈 정도로 들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어야 됩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삶에 진정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주님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무덤 속에 있던 나사로가 일어나 나왔습니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44) 

온 몸에 壽衣를 걸친 채로, 유대식으로 온 몸을 좁은 천으로 칭칭 감은 채로 나사로는 나왔습니다. 이때에 나사로의 양 발이 따로 따로 묶여 있었다면 제 발로 걸어 나왔을 것이고, 한데 묶여 있었다면 그가 무덤을 나온 것도 일종의 이적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앞서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들 스스로 이 사람이 분명히 죽었던 나사로라는 것을 확인 하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 나사로를 바라보면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구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서 장차 우리에게 일어날 일을 내다보고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장차 주님은 무덤 속에 들어간 우리에게도 똑 같은 명령을 하실 것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하지 않으시고, 내 이름을 부르십니다. ‘아무개야 나오너라’ 그 때에 우리는 나사로 처럼 나오게 됩니다. 

우리는 이 소망 때문에 예수님을 믿습니다. 이 믿음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 않고 오늘을 살아갑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너희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15:35-38,42-44)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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