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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영광(3) (마 3: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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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영광(3) (마 3:13-17)

우리가 가진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됩니다. 물론 구약과 신약 사이에 약 400여 년 간의 간격이 있습니다. 이것을 교회사에서는 중간사(中間史)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성경을 구약, 중간사, 신약 이렇게 구분하지는 않습니다. 구약성경은 말라기까지입니다. 

예수님의 33년 간의 지상 생활을 사생애(私生涯)와 공생애(公生涯)로 구분합니다. 사생애와 공생애의 구분은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때를 공생애의 시작으로 봅니다. 
지난번에 그리스도의 사생애(私生涯)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이어서, 

Ⅱ. 예수님의 공생애(公生涯)의 시작에 나 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1) 세례 요한으로부터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본문 3장 1절에 『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시작을 준비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사야의 예언(사 40:3-5)에 따라 출생한 자입니다. 

출생에 있어서 그는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회개와 임박한 천국 도래(到來)가 주제였습니다(마 3:2). 그 천국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이러한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구체화 되었습니다. 마침내 천국은 예수와 그의 말씀과 그의 표적과 그의 사활(死活)과 함께 도래(到來, 어떤 시기나 기회가 닥쳐옴)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왔고 그의 몸된 교회는 장차 나타날 영원한 하늘나라의 모형입니다.
세례 요한은 선지자 이사야가 이미 예언했습니다. 본문 3장 3절에 『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야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와서 사역하시는 데 미리 준비하는 선구자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예비한 길(도리 나 방법)을 따라 오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영원한 천국을 예비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는 주의 길을 평탄케 한 자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물리적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성취하기 위한 정의로운 질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의 세례 요한의 몫이었다면 지금은 이 땅에 살아가는 성도들이 감당해야 될 사명인 것입니다. 

요한은 분명히 신약의 사람인데도 그의 생활양식은 구약의 선지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구약의 선지자를 잇는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입니다. 
본문 3장 4절에 『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입는 것과 먹는 것과 생활하는 터전이 구약의 선지자와 같았습니다. 이것은 오직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명분을 분명히 하고자 함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의 주라는 사실을 분명히 예고했습니다(마 3:7-10). 
세례 요한 자신의 세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란 것을 전파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능력과 권위에 있어서도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본문 3장 11절에 『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흉내를 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의 뜻과 그의 의를 성취하는 도구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지해서 목사는 물세례를 베풀고 성도 역시 그 이름에 의지해서 물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양식이 믿는 자들 같아야 합니다. 

입는 것(모양)이 성도들 같아야 합니다. 먹는 것(취하는 것)이 성도들 같아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믿는 자들 같아야 합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언행일체가 믿는 자들 같아야 합니다. 
이 땅에 있는 유형무형의 일체의 것을 수용하는 일체의 법칙이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과는 달라야 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나타난 그의 영광입니다. 

본문 3장 16-17절에 『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요한은 집요하게 만류했다고 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예수님이 세례 받기 위해 내게로 오시느냐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허락하라고 했습니다(마 3:15). 그래야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셨습니다(마 3:15). 

세례 요한이 예수께 세례 베푸는 것이 모든 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요한과 함께 그 뜻에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그의 의를 이루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의 사생애를 마감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의 공생애에 들어가기 위함이었습니다. 
세례를 통해 메시야의 사역이 시작되었음을 선언했습니다(요 1:31-34).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렸습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말은 이 땅에서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첫 번째 증거가 예수께서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라고 한 것입니다(마 3:16).
여기 사용된 직유법은 비둘기와 성령을 분명하게 관련시키고 있습니다. 불같은 성령이라고 하지 않고 비둘기 같은 성령이라고 한 것은 예수님의 거룩한 사명의 성격을 묘사하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사역은 우리를 대신하여 극도로 낮아지시고 고난당하시는 사역이기 때문에 온유하고 유순한 비둘기로 상징된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2-3절에 『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자신 위에 성령이 임하신 것은 시편 45편 7절에 『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 』 나타난 말씀의 성취입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함과 동시에 하늘로서 소리가 들린 것이 하늘이 열렸다는 두 번째 증거입니다. 

본문 3장 17절에 『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산의 영광을 보고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겠다고 했습니다. 
이때 마태복음 17장 5절에 『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처음부터 영원 전에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인데 이제 그 사실이 선포되시는 것뿐이란 사실입니다. 
양자론자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이 세례 받을 때부터 양자로 삼았다고 하는 이단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말이 이유 있다고 한다면 『 이는 지금부터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라고 해야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선포는 하나님 아들이신 사실을 예수 자신에게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그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제부터 공적으로 메시야직을 세상에서 이루실 것을 하늘에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의 의미는 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②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 ③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④ 전지하신 하나님의 아들 ⑤ 불변하신 하나님의 아들 ⑥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아들 ⑦ 메시야직 하나님의 아들 ⑧ 화육(본체) 관계의 하나님의 아들 ⑨ 윤리적, 도덕적인 하나님의 아들 ⑩ 언약 성취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내용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3) 예수께서 시험받으실 때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마태복음 4장 1절에 『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라고 했습니다. 
여기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갔다는 말은 예수의 광야 길이 수동적이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자와 성령의 유기적 사역에 의한 능동적이며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의한 자발적 순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십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셨다고 했습니다. 
모세도 시내산에서 40주야를 먹지 않고 금식했습니다.

출애굽기 24장 18절에 『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사십일 사십야를 산에 있으니라 』고 했습니다. 

신명기 9장 9절에 『 그 때에 내가 돌판들 곧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돌판들을 받으려고 산에 올라가서 사십 주야를 산에 거하며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더니 』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도 광야에서 40주야를 먹지 않고 여행했습니다.
열왕기상 19장 8절에 『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40주야 금식이 일반인들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40일 금식 기도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금식하면서 배고픔의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은 40일 금식하고 난 뒤에 비로소 주리신 것을 느꼈다는 점에서 일반인들과 차별화되고 있습니다. 

금식한 후에 주리실 때에 마귀로부터 온 첫 번째 시험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4장 4절에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라고 했습니다. 

인성을 입으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금식 기도로 극도로 주리신 것이 분명합니다. 시장한 사람이 음식을 먹고 싶은 것은 죄가 아닙니다. 절대로 식욕 자체는 윤리적, 도덕적으로 부정적인 가치를 지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정욕으로부터 나오는 욕심은 많은 죄악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13-15절에 『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고 했습니다.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이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고 했습니다. 

기록하기를 『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라고 했습니다(마 4:6). 
이것은 시편 91편 11-12절의 『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의 인용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4장 7절에 『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라고 했습니다. 
마귀의 이 시험은 간악한 것입니다. 이적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사욕대로 악용되도록 유혹했습니다. 
마귀는 성경을 믿는 자들에게 성경을 교묘히 악용하여 시험에 빠지게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귀는 예수를 데리고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이면서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마 4:8-9). 
예수님은 마태복음 4장 10-11절에 『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고 했습니다. 
만국의 영광에 대한 탐심을 조장시켜 예수를 엎드려 경배케 하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만국의 영광을 얻지 못하는 일이 있어도 마귀에게 머리를 숙이지 아니하시는 예수님의 충성은 곧 그의 영광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1절에 『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고 했습니다. 
경배와 영광은 하나님께만 드릴 것인데 마귀는 이것을 자신이 빼앗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권위 앞에 마귀는 물러났습니다. 마귀가 물러가고 천사들이 수종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례 요한으로부터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은 그는 예수의 길을 예비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을 위해 영원한 천국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영광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성취하는 도구로서의 영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 되심이 그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 된 것이 우리의 영광입니다. 
40일 금식 기도 후에 주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식욕을 정욕화 하지 않은 것이 그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정욕을 위하여 교묘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악용될 때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한 그의 능력이 그의 영광이자 곧 우리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성경해석의 원리가 개혁주의라야 하고 신앙전통 또한 개혁주의가 되어야 합니다.
썩어질 세상의 명예를 얻기 위해 아무 곳에서나 아무것에나 자신의 갈급한 욕구를 채우기 위해 타협하거나 경배하거나 절하지 마십시오. 

제가 자주하는 말 가운데 이 세상이 교회보다 크게 보이면 그 사람은 이미 깊은 침륜(沈淪, 본질이 없어지고 보잘 것 없이 됨)에 빠진 자라고 한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과학문명의 만세 소리와 황금만능주의의 승리 앞에 하나님을 떠나서도 인본

주의적(humanistic)인 유토피아 건설이 가능하다는 착각을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떠나서도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건설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들의 착각이 창궐(猖獗, 전염병이나 못된 세력 따위가 걷잡을 수 없이 퍼짐)하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십시오. 

우리 모두가 명심해야 될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은 하나님의 자기 피로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성도) 외에 용납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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