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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장자의 명분 (창 25: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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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명분 (창 25:27-34)

(창25:27-34)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1. 최근 숙명여자대학교 유진수 교수가 집필한 <가난한 집 맏아들>이란 책이 출간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다른 아이들은 모두 희생시키고 맏아들만 공부를 시켰는데 졸업 후 동생들을 이끌어 주고 부모를 봉양할 것으로 기대했든 여망을 저버리고 제혼자만 잘 먹고 잘 삶으로 인한 갈등을 파헤친 내용입니다. 

유 교수는 ‘가난한 집 맏아들’을 정부의 집중적 선택과 지원을 통해 성장한 삼성, 현대차와 같은 재벌기업에 대비시켜 “재벌 기업은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성장한 만큼 사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통속 드라마처럼 모든 불행은 장남이 탐욕에 눈이 멀어 자신의 성공을 뒷바라지한 동생과 가족들에 대한 부양 의무를 소홀히 하면서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국민 10명 중 7명이 ‘기업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한 이유라고 밝히기도 합니다. 유 교수는 ‘가난한 맏아들’ 이야기만이 아니라, ‘실패한 맏아들 이야기’와 ‘나쁜 맏아들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의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갈등 구조를 설명하고 그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먼저, 간단히 ‘가난한 집 맏아들 이야기 1,2’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가난한 집 맏아들 이야기 Ver.1.0>

“세 명의 자녀를 둔 가난한 부모가 시골에서 근근이 논밭을 부쳐 먹으며 살고 있었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 때문에 세 자녀 중에서 한 명, 맏아들만 대학 공부를 시켰다. 등록금을 내기 위해 애지중지 키우던 소까지 내다 팔아야 했다. 다행히 맏아들은 공부를 썩 잘했고 의과대학을 졸업해 의사가 되었다. 돈도 많이 벌어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대학에 가지 못한 둘째와 셋째는 가난을 이어받아 아직까지 어렵게 살고 있다.” 

이 이야기를 들어 여러 가지 경우를 질문합니다. 
1)돈을 많이 번 맏아들은 나중에 자신만을 바라보며 고생한 부모에게 어떻게 했을까?
2)가난하게 살고 있는 동생들을 위해 맏아들은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해야 했을까?
3)부모는 왜 하필 맏아들을 대학에 보냈을까?
4)둘째나 셋째가 대신 대학에 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5)맏아들만 대학에 보낸 부모의 결정은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6)맏아들을 대학에 보내면서 가난한 부모는 맏아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았을까?
7)성공한 맏아들이 동생들을 보살피지 않는다면 부모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가난한 집 맏아들 이야기 Ver.2.0>

“세 명의 자녀를 둔 가난한 부모가 시골에서 근근이 논밭을 부쳐 먹으며 살고 있었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 때문에 부모는 자녀들의 대학 등록금을 전혀 대주지 못했다. 그러나 맏아들은 머리가 좋았고 열심히 공부한 끝에 장학금을 받으며 의과대학에 다녔다. 모자란 돈은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벌었다. 결국 맏아들은 성공한 의사가 되었고 돈도 많이 벌어 부자가 되었다. 반면 둘째와 셋째는 그다지 공부 재능이 없는 터라 대학에 가지 못했고 아직까지도 어렵게 살고 있다.” 

여기 이야기에서 스스로 노력해 성공한 맏아들(Ver2.0)은 부모와 동생들에게 어떠한 도덕적인 의무가 있을까? 저자는 미(美) 하버드 대학 교수 마이클 샌델의 도덕적 책임 범주 세 가지에 대입하여 ‘첫째, 맏아들은 가족으로서 보편적으로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다. 둘째, 맏아들은 가족과 약속을 했을 경우 그것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가진다. 셋째, 맏아들은 돈을 많이 벌었다면 가난한 부모와 동생들을 도와야 하는 도덕적 의무를 갖는다.’고 말합니다. 

<가난한 집 맏아들>에서 유 교수는 기업에 대해 ‘사회와 국가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한국 사람들의 의식의 기원을 ‘가난한 집 맏아들’ 정서에서 찾고 있습니다. 어렵고 배고픈 시절 소 팔고 논 팔아서 장남을 공부시키면 출세한 장남이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한국적 성공스토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장자의 특권과 그에 따른 의무를 경제 이론으로 풀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맏 아들들’에게 도덕적 책임과 의무를 아무리 강조한다 해도 그들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아니하면 불가능한 이야기에 불과 합니다. 도덕적 책임과 의무는 고사하고 얼굴에 철판을 깔고 각종 불법과 탈세를 일삼고 있기 때문에 <가난한 집 맏아들>이야기는 소귀에 경 읽기나 다름 없습니다. 


2. 오늘 본문의 야곱이 살던 당시 이스라엘에서 장자가 갖는 특권과 책임은 첫째,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정의 우두머리가 되어 집안의 대소사를 처리할 수 있는 통솔권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여호사밧 왕은 죽기 전에 장자 여호람에게 은, 금, 보물과 함께 왕위를 주었습니다.

(대하21:1-3) 여호사밧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그의 조상들과 함께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아우들 아사랴와 여히엘과 스가랴와 아사랴와 미가엘과 스바댜는 다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들이라. 그의 아버지가 그들에게는 은금과 보물과 유다 견고한 성읍들을 선물로 후히 주었고 여호람은 장자이므로 왕위를 주었더니

둘째는 유산의 두 몫을 분배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집니다. 비록 미움을 받는 아내가 낳은 아들이 장자일지라도 그에게 장자의 권리가 있기 때문에 두 몫의 재산을 분배받게 됩니다.

(신21:15-17) 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는 사랑을 받고 하나는 미움을 받다가 그 사랑을 받는 자와 미움을 받는 자가 둘 다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이 장자이면 자기의 소유를 그의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날에 그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삼아 참 장자 곧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보다 앞세우지 말고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셋째는 한 가정의 제사장 직분을 수행함과 동시에 언약 관계에서 영적 축복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책임도 뒤따르는데 그것은 부모의 노후나 사후, 그리고 가족들을 부양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장자권이 상실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장자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차자 야곱에게 장자권을 매도한 경우, 즉 장자 본인이 맹세로 직접 양도할 때, 그리고 중죄(重罪)에 대한 징계로 박탈당할 때 장자권을 상실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야곱이 죽기 전에 12아들들을 두고 각각 축복할 때 장자는 분명 르우벤이었지만 그는 아버지 야곱의 첩(서모)를 범하는 중죄를 범했기 때문에 장자의 명분은 유다에게로, 그리고 상속되는 기업의 두 몫은 요셉에게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창세기49:3-4, 역대상5:1-2을 보겠습니다. 

(창49:3-4)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대상5:1-2)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그리고 네 번째로 족장의 권한은 장자권보다 우선하기 때문에 족장 아버지의 직권으로 다른 아들을 선택할 때 합법적으로 장자의 명분이 옮겨지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임종에 이르기 전 장자 므낫세와 차자 에브라임에게 축복하도록 두 아들을 야곱 앞에 무릎을 꿀렸습니다. 장자의 축복을 상징하는 오른 손으로 장자 므낫세를 축복하도록 야곱 오른편에 앉혔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오른손으로 왼편에 있는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이 아버지의 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라고 했지만 아버지 야곱이 허락하지 않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창48:17-20) 요셉이 그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여 아버지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 하였으나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나도 안다.” 이 말은 야곱이 당시 육체적으로는 극히 쇠약했지만 영적으로는 밝히 깨어 있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는 수많은 연단으로 그의 영성(靈性)이 성화되었기 때문에 영적으로 깨어 있었던 것입니다. 장자권 문제에 대해 쓰라린 과거를 지니고 있는 야곱은 노령과 시력장애에도 불구하고 편애와 부주의로 인해 하나님의 작정된 뜻을 그르칠 뻔했던 아버지 이삭의 전철을 밟지 않은 것입니다. 장자인 므낫세가 축복의 계승자가 되기를 바랐던 요셉의 인간적인 기대와는 달리 야곱은 하나님의 계획된 섭리를 영안으로 밝히 보고 차자인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축복을 한 것입니다. 

족장 야곱의 권한으로 장자 므낫세의 장자 명분을 차자인 에브라임으로 옮겨 축복한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태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차자로 태어날 자신을 두고 하신 축복의 말씀을 그대로 시행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독생자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한 지 20년이 되었는데 자식이 없자 이삭이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의 간구를 들으시고 리브가가 쌍둥이를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들이 태중에서 서로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삭이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하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렇게 응답해주셨습니다. 

(창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그래서 야곱은 요셉의 차자인 에브라임을 두고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라고 장자의 축복을 행한 것입니다. 이렇게 비록 동생으로 태어났지만 장자의 명분을 차지하게 된 야곱에 대한 축복은 정확하게 다윗 왕 대에 이르러 성취되었습니다. 사무엘 하8:13-14을 보겠습니다.

(삼하8:13-14) 다윗이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팔천 명을 쳐죽이고 돌아와서 명성을 떨치니라.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되 온 에돔에 수비대를 두니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에돔’은 동생 야곱에게 붉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넘긴 ‘에서’에게 붙여진 별명입니다. 그 ‘에서’의 후손이 야곱의 후손 다윗 왕에 의해 정복되어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어 섬기게 된 것입니다.” “(창25:23)...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는 축복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지극히 존귀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십니다.

(삼상15: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이 아니시기 때문에 약속하신 말씀, 축복을 예언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 되신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약속된 축복들을 소중히 여기며 사시기 바랍니다. 


3. 이처럼 ‘장자의 명분’은 영육간에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 ‘야곱’이 형 ‘에서’의 피곤하고 배고픈 것을 이용해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고 했을 때 ‘에서’가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하면서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야곱에게 팔아버렸습니다. ‘에서’는 영적으로 가장 귀한 것을 세상적으로 가장 값싸게 팔아 버린 치명적인 어리석음을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에서’의 그러한 행위를 두고 ‘망령된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히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망령되다’는 말은 ‘거룩하지 못하다.’, 혹은 ‘세속적이다.’는 뜻으로 영적인 면보다는 현세적인 것에 더 치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림으로 현세적인 것을 위해서 하늘의 참된 복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고 내던져 버리는 자의 모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에서’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장자에게 주시고자 했던 축복에 대해 믿음을 가지지 못한 것으로 이는 하나님께 대한 배신, 배교에 다를 바 없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심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4. 그러면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어떤 관계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하시고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12:2-3입니다.

(창12: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여기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는 축복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의롭게 여기시고 그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을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를 갈라디아서 3:8에서 “하나님이 믿음으로 이방인들을 의롭게 하실 것을 미리 내다보고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는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갈3:9)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 곧 장자의 명분을 가진 한 분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갈3:28-2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곧 야곱의 자손들을 두고 “내 아들 내 장자”라고 했습니다.

(출 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예수 믿음으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자손된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장자입니다.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의 장자되신 여러분의 이름이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었다고 했습니다. 

(히 12:23)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첫 열매’이며 ‘장자의 명분’을 가진 상속자로서 비록 지상에서 생활한다 할지라도 그 이름은 하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을 ‘첫 열매’, 다시 말해 ‘장자’가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셨다고 했습니다.

(약1: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성도 여러분은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낳으신 하나님 나라 장자들이십니다. 여러분에게는 영적 장자인 유다에게 주어진 축복과 경제적인 장자인 요셉에게 주어진 축복들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영적 장자인 유다에게는 약속된 축복은 이렇습니다. 창세기49:8-12입니다.

(창49:8-12)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유다 지파는 훗날 유다 지파의 후손 다윗이 명실공히 이스라엘의 왕위를 차지함으로써 다른 형제 지파 후손들이 그 앞에 복종하게 되어 존경과 찬송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사무엘하5:1-2입니다.

(삼하5:1-2)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말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골육이니이다 전일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한 자는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그 유다 지파에서 다윗이 나오고 그 다윗의 계보에서 온 인류 구원을 위한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성도 여러분을 두고 “왕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부르며, “왕 같은 제사장들”로 부르신 목적을 우리를 거룩하신 하나님의 장자로 낳으신 믿음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유다에게 약속된 축복 가운데 마지막에 있는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는 것은 장차 누리게 될 성도들의 평화롭고 풍부하며 건강한 삶을 뜻합니다. 영적 장자이신 성도 여러분에게 항상 변함없는 믿음으로 평화롭고 풍부하며 건강한 삶의 축복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경제적 장자인 요셉은 누구보다 족장 야곱으로부터 아낌없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축복은 이렇습니다. 창세기49:22-26입니다.

(창49:22-26)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으나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네 아비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열매가 풍성히 맺히듯 가문이 항상 번창하게 될 것이라는 축복입니다.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는 말씀처럼 요셉 당시 요셉의 형제들이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을 통해 기근 중에 구원을 받아 풍족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요셉의 후손들은 자신의 축복을 통해 그 형제들에게 함께 구원의 풍족한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요셉 지파 후손들은 어떠한 대적들이 나타날지라도 반석이시며 목자가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받은 바 축복들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샘물의 복과 많은 자녀와 짐승을 기르는 복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내 아들, 내 장자’라고 부르십니다. 변함없는 믿음으로 항상 하나님께서 낳으신 장자의 명분을 그 어느 것보다 가장 소중히 여기며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변함없는 믿음으로 장자에게 주어진 축복의 약속들을 가장 소중히 여기며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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