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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삶으로 예배드리는 사람들 (시 50: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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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예배드리는 사람들 (시 50:14-23)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도둑을 본즉 그와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동료가 되며 네 입을 악에게 내어 주고 네 혀로 거짓을 꾸미며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머니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편 50편 14-23절】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이 문구까지 가르쳐주신 기도문에 이 사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가장 큰 바람이 무엇일까요? 돈을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신앙생활을 잘 하고,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고, 가정생활이 원만하며 행복하고, 아이들을 낳아 잘 키우고….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런 말이 됩니다. 

“잘 살았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관심은 삶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지신 가장 큰 관심은 우리 삶입니다.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삶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삶이 복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결국 잘 살자고 하는 일입니다. 
무엇이 ‘잘 사는 것’이냐 하는 것은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어쨌든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대로 잘 사는 것이 우리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하늘 아버지의 뜻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삶을 돌아보세요. 잘 살고 있습니까? 스스로 생각할 때 ‘요즘 나는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누가 “어떻게 지내십니까” 하고 묻는다면 “예, 요즘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할만 합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물으신다면 어떻겠습니까?
“얘야, 요즘 어떠냐?”

시편 50편이 담고 있는 몇 가지 주제 중 하나가 삶입니다. 시편은 사실 그 전체가 우리 삶에 대하여 아주 깊고 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시편의 저자들은 삶의 현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불평도 하고 원망도 합니다. 자기를 공격하는 사람을 땅에서 끊어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하기도 합니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내용이 시편에 많습니다. 시편에는 신앙이 좋은 척, 고상한 척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삶의 고뇌와 고민과 분노와 슬픔, 기쁨과 감사와 찬양과 희망을 있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물론 그 안에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이 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

시편 50편에 그리스도인에게 잘 알려진 구절이 있습니다. 14-15절 말씀입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 50:14-15)

제사를 드린다는 말은 요즈음 표현으로 하면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누가 감사로 제사를 드릴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 말하는 감사가 감사하는 척한다거나 거짓으로 감사한다는 것은 물론 아니겠지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감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참된 감사가 우러나온다는 것은 실제 삶이 그렇다는 것을 뜻합니다. 매일의 삶이 기쁘고 감격스럽지 않다면 어떻게 마음에서 감사가 우러나올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사람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는 게 어떠냐는 것입니다. 삶이 문제입니다. 삶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삶이 복되어야 합니다. 삶이 그럴 때 거기에서 기쁨과 감사가 나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 곧 삶에서 기쁨과 감사를 체험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삶에서 기쁨과 감사가 솟아나도록 그렇게 사는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거꾸로 말한다면, 매일의 삶 그 현장에서 기쁨과 감사를 체험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가능성이 많다는 얘기가 됩니다.

기쁨과 감사 가운데 일시적인 것이 많습니다. 기쁨과 감사인 것 같았는데 조금 지나고 보니 아닌 것도 있습니다. 모조품이지요. 짝퉁입니다. 어떤 때는 아예 대놓고 위조해서 만든 감사에 속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과 감사에는 그런 것들이 많습니다. 말초감각에서는 금방 느껴지는데 정신과 영혼까지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술과 담배와 마약이 대표적입니다. 일시적으로는 기분을 좋게 하지만 갈수록 사람을 망가뜨립니다. 몸도 망가뜨리지만 정신과 영혼까지 썩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기쁨과 감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삶의 기쁨과 감사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갈수록 그 맛이 더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기쁨과 감사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기쁨과 감사는 그런 것입니다.

이런 기쁨과 감사를 누리면서 그런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환난 날에도 건지십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은 언제나 대답하십니다. 그런 사람은 환난을 당해도 결국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삶을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압니다. 그 사람의 삶 자체가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삶이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 14-15절에 있는 말씀이 시편 50편의 마지막 구절 23절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 50:23)

행위를 옳게 한다는 것은 삶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렇지요, 또 한 번 강조하지만 삶이 어떠냐가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을 평가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력서를 보는 것, 그 사람이 쓴 글을 읽어보는 것, 그 사람에 대한 다른 사람의 평가를 듣는 것, 그 사람이 남긴 작품이나 업적을 보는 것. 그러나 가장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실제 삶을 보는 것입니다. 아예 같이 살아보면 가장 잘 알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삶을 보고 우리를 평가하십니다.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아름답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삶이 아름다운 것 말입니다.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삶이 행복한 것 말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과 반대쪽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악인입니다. 16절부터 20절에 그 사람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여기에 나오는 표현이 아주 중요합니다.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도둑을 본즉 그와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동료가 되며 네 입을 악에게 내어 주고 네 혀로 거짓을 꾸미며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머니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시 50:16-20)

악인이 하나님의 율례를 전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입에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가르치고 설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의 삶에서는 말씀이 상관없습니다. 말씀을 뒤로 던져버리며 거짓말을 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어울리며 이웃을 미워합니다. 입에서 악한 말이 나오고 혀는 거짓말 하는 데 사용하여 이웃을 해칩니다. 이 점이 다릅니다!
그렇습니다. 삶이 어떠냐가 문제라는 말입니다.

16절 말씀은 목회자나 헌신적인 성도들에게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경계를 주고 두려움을 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많으냐,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기술적으로 잘 가르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신학적 지식의 깊이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성경 지식과 신학적 식견과 가르치는 기술의 탁월함 등 모든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그것 하나에 다 걸려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서지 않으면 다른 것들은 전부 허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삶입니다. 삶의 변화요 신앙 인격의 성숙입니다.

마음에서는 순수한 동기를 갖고 하는데 결과적으로 잘못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괜찮습니다. 자신은 열심히 하고 잘 하려고 하는데 능력이 부족해서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질책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중적인 마음을 갖고 있는 경우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책망하십니다. 자신의 자의식에서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하면서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지속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면서, 사사로운 개인의 이익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과 주님의 복음보다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더 중요하게 판단하면서 하는 일은 하나님이 크게 심판하십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생각해야 합니다

악인들이 이렇게 살 때 하나님이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치게 하셔서 징계하시면 좋겠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악인들이 잘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시편 50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21-22절을 보세요.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시 50:21-22)

지금 시편 50편에서 말씀하고 있는 대상이 하나님의 율례를 전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입술에 두고 있는 사람들이란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합시다. 22절은 그들을 가리켜 이렇게 부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이 가장 큰 문제요, 가장 큰 죄입니다. 다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사역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상급과 복이 있는지를 알고, 동시에 말씀의 사역을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해먹으려 들 때 거기에 내리는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 그분의 아들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와 같이 계시는 하나님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의 임재가 얼마나 놀랍고 복되고 위대한지를!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관된 일이 얼마나 진지하고 엄위하고 엄중한지를! 하나님과 연관된 모든 사역은 삶의 고백으로 하는 것이며 삶으로 살아내야 하는 것임을!

그리스도인이란 삶으로 예배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삶이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삶이 복된 사람들입니다. 삶으로 하나님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말하는 것과 사는 게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로 살아내는 사람들입니다. 삶으로 말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참으로 아름다운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와 연관된 것은 모두 귀중합니다. 교회의 예배뿐 아니라 건물, 물건들, 땅, 행사 등 교회에 속한 모든 것이 소중하고 귀중합니다. 이 모든 것은 삶의 변화와 성숙에 연결돼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비전을 갖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거룩한 리더십으로 그리스도인의 삶과 세계를 변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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