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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갈 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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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갈 3:1-14)

지난 주 샌디에고 교역자 협의회 주관으로 하계 수련회에서 창조과학 투어를 했습니다. 오전 10시쯤 샌디에고를 출발하여 Fresno에서 일박을 하였고 다음날 아침 요세미티 국립공원으로 갔습니다. 금년의 강수량이 평년의 3분의 일밖에 되지 않아 폭포의 물이 아주 약하게 떨어졌습니다. 그곳에 점심으로 도시락을 들고 Tioga Pass를 통해 해발 10000ft 되는 지점에 가보았습니다. 빙하가 지나면서 생겨진 초지를 걸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거기서부터 가파른 경사길을 따라 내려가니 Mammoth Lake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Bishop에서 하루를 묵고 수요일 오후에 샌디에고로 돌아왔습니다. 이번 투어는 성경에 나타난 홍수와 빙하시대의 흔적으로 직접 보며 배우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요세미티가 아름답고 그랜드 캐년이 웅장하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오랜 세월 침식을 통해 서서히 생겼다는 것이 진화론자들의 주장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성경은 격변설을 지지합니다. 

창 7:11-12절을 보면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지층은 오랜 세월 한 층씩 생긴 것이 아니라 엄청난 양의 물이 토사와 함께 밀려가면서 짧은 시간에 생겼습니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지층들은 노아 홍수 때에 생긴 것입니다. 1980년 시애틀의 Mt. Helen산이 폭발하면서 이 사실을 입증하였습니다. 불과 며칠 만에 지층이 생겼습니다. 작은 그랜드 캐년이라고 불리는 협곡이 생겼습니다. 

화석은 어떻게 생겨서 지층에 있습니까? 동물이 죽으면 박테리아에 의해 사체가 분해되어 시간이 지나면 다 사라집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생긴다는 지층이론으로는 화석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짧은 시간에 동물을 덮침으로써 화석이 생깁니다. 진화론은 과학이 아니라 사실 일부 과학자들이 가진 신념의 표현일 뿐입니다. 

과학은 이론과 실험으로 입증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확실한 증인이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진화론이 주도하는 세대입니다. 알게 모르게 진화론에 입각한 세계관의 영향을 받습니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성경을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진리에 제대로 서 있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어리석게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언제가 제일 좋았을까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였습니다. 그때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죄악이 관영하였을 때 이 땅은 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지금 경치가 좋은 곳이 많지만 대부분 심판의 흔적입니다. 심판을 받은 흔적이 이렇게 아름답다면 이전에는 얼마나 더 아름다웠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을 마다하고 엉뚱한 선택을 했을 때 이 땅에 죄가 들어오고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2000년 전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정말로 좋은 것, 가치 있는 것을 버리고 엉뚱하게 길로 가고 있습니다. 혹시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은 없는지요?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3:1)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갔을 때 전한 것이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복음이었습니다. 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습니까? 우리 죄가 사해질 필요가 있고 우리 옛 사람이 못 박혀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가 그들 눈앞에 밝히 보이는데도 유대주의자들이 가만히 들어와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할 때 그들의 가르침에 갈라디아 교우들이 속히 끌려가는 것을 보며 바울은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어리석은 자들’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어리석음이란 ‘생각이 짧거나 생각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생각하는 신앙생활’을 하기 원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신앙생활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분명히 증거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되는 것이라면 자기 스스로 알아서 하면 되는 것이지 그리스도가 죽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 진리를 밝히 깨달았던 적이 있었지만 그들의 눈은 다시 흐려졌습니다.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의 그릇된 가르침 때문에 미혹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갈라디아 교인들에 전한 이신칭의의 복음이 참되고 온전한 것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세 가지 증거를 제시합니다.  

1) 갈라디아 교인들의 성령 받음(3:2-5)

바울은 그들이 처음에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얻은 것인지,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은 선물인지를 되돌아보도록 합니다. 그 대답은 물론 ‘듣고 믿음으로’입니다. 그들이 바울이 전해 준 복음을 듣고 믿었을 때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 마음속에 임하였으며, 그들은 거듭나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라는 것은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라는 뜻인데, 이는 곧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반해 ‘듣고 믿음으로’라는 것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은 공로를 힘입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을 말하며, 이는 곧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자신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 하나님의 은혜임을 바울은 강조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을 받을 때에는 듣고 믿음으로 받았는데 능력을 행할 때에는 율법의 행위로 하는 것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을 때에도 듣고 믿음으로 받으며 능력으로 행할 때에도 듣고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듣고 믿을 때 성령이 우리 안에 계속 공급되어 역사하십니다. 바울은 5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성령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 때 사용된 동사가 ‘에피코레곤’인데 이 동사는 단순한 제공을 넘어서서, 풍성하게 제공하되 값없이 제공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더구나 이 단어를 현재형으로 사용함으로써 지금도 이 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의 사역을 통하여 성령을 풍성히, 값없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들 안에서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만일 그들이 지금까지 온 믿음의 길을 계속 간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역사가 그들 가운데 나타나 귀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일부 갈라디아 교우들은 믿음의 길을 끝까지 잘 가지 못하고 율법으로 돌이켰습니다. 그럼으로써 지금까지 당했던 모든 괴로움을 다 무효로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반문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2) 아브라함의 칭의 경험 (3:6-9)

바울은 또 다른 증거로서 아브라함의 경우를 언급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이것은 창세기 15:6의 인용인데, 여기서 ‘의로 정하셨다’는 것의 원어 상 의미는 ‘의로 여겨졌다’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여겨 주셨다’는 의미이며, 아브라함이 스스로 의롭게 되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따라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법정적인 간주의 문제지, 우리가 실제로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적 변화’의 문제는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도 우리에게 변화되어져야할 부분이 너무도 많습니다. 이를 통해 성경이 나타내고자 하는 바는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며 인간의 공로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핵심은 ‘아브라함의 자손’은 할례나 율법을 지킴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다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하면서 이방인들을 멸시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증거로 할례 받았다는 사실을 내세우면서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에 대해 ‘할례 받은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창 12:3을 인용합니다.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여기서 바울이 복음이라고 한 것은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 성경에 ‘너를 인하여’로 번역된 것은 원문을 제대로 살리면 ‘네 안에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이방이 ‘아브라함 안에서’ 복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할례 받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할례 없는 이방인들도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안에서’ 곧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복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자들은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3)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심(3:10-14)

바울은 10절에서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말합니다. 이것은 신명기 27:26의 인용인데, 여기서 핵심 되는 단어는 ‘모든’과 ‘항상’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모든’율법의 행위들을 다 지켜야 하며 하나라도 어기면 죄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을 ‘항상’ 지켜야 합니다. 곧 율법에 속한 자들은 항상 율법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며 한순간이라도 어기면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하지만 아담의 범죄 이후 타락한 인간으로서 율법의 모든 행위들을 항상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율법에 속한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으며 그 결과는 멸망입니다. 아마 갈라디아 성도들도 처음부터 율법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야겠다고 하면서 그들의 말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할례를 받고 안식일을 지키는 정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저 율법 한두 가지를 지켜서 되는 것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일단 율법의 원칙 아래 들어가면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않으면 저주 아래 있다고 합니다. 바울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사람은 없다고 말해줍니다. 하박국 2:4, 로마서 1:17, 그리고 갈 3:11에서 말하듯이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살 수 있었다면 왜 하나님께서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고 반복하여 말씀하셨겠습니까? 율법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막다른 궁지에 몰린 인간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셨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3:13)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주신 해결 방법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단번에 완전한 성인으로 만드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으셨습니다. 곧 우리를 ‘변화시킴’으로 문제를 해결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받아야 할 저주를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으심’으로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를 위하여’라는 말입니다. 헬라어의 ‘휘페르’라는 전치사는 ‘위하여’라는 뜻도 있지만 ‘대신하여’라는 뜻도 됩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으셨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이 의미를 깨달은 것이 바울의 인생을 바꿔놓은 결정적 전기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회심하기 전에는 그리스도께서 본인의 죄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들었을 때 그는 아마도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신명기 21:23의 말씀에 응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는 나무에 달려 죽었어. 그렇다면 그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 분명해. 왜냐하면 성경에 나무에 달려 죽은 자마다 저주받은 자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지. 예수는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거야.’ 바울은 이런 확신에 따라 나사렛 이단들을 박멸하러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살기등등한 바울의 확신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나무에 달린 것이고, 신명기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기는 받으셨지만 그것이 예수 본인의 죄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하여’라는 사실을 바울은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나무에 달리셨을 때 그분은 우리 모두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마셔야 할 저주의 잔을 마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마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동되어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을 증거하였습니다.(고후 5:14)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저주를 받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하며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복’과 ‘성령의 약속’은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복’이 참된 복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지 아니하고는 영생을 얻을 수 없으며, 이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복도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사람은 내세에 영생을 누릴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모든 일에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립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거저 주신 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 갈라디아 교인들은 쉬운 길, 지름길을 마다하고 굳이 힘든 길을 선택하여 힘은 힘대로 들고 구원도 얻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입니다. 종교개혁의 대표적인 구호중의 하나가 오직 믿음입니다. 본문에서 믿음과 연관되어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1) 믿음으로 서야 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의 시작은 좋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위하여 죽으셨고, 또한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그들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거짓 선생들에게 속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한 진리를 제해버리고, 그들의 구원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그들의 노력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노력으로 율법을 지켜서 스스로 구원하려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율법 아래서는 율법을 온전하게 지킬 때에만 하나님께 인정을 받습니다. 

그런데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다 지키다가 그 중의 한 개라도 어기게 되면 율법의 저주 아래 떨어지게 됩니다. 율법을 지킴으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율법은 사람으로 죄를 깨닫게 하고 그로 하여금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유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 말씀을 토대로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태초부터 하나님의 계획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모든 나라가 그를 통해 복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을 통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모든 이방 나라들이 다 포함됩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모든 나라들을 위한 복음을 주셨음을 뜻합니다. 율법이 있는 나라나 없는 나라나 모두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의를 얻는 진리는 이미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이 진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아브라함에게나 우리에게 똑같이 적용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며, 이는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모든 것들을 얻게 됩니다.  

2) 성령의 기름부음이 계속 있어야 합니다

자동차를 자꾸 사용하면 배터리 속에 있는 전기 용량이 자꾸 떨어집니다. 그럴 때 배터리는 발전기나 외부에서 재충전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자동차는 길거리에 서게 됩니다. 성령의 능력은 우리 속에 항상 충만하게 있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를 보면 그가 오순절에 성령을 한번 받고 만 것이 아니라 사역하는 동안 수시로 성령 충만을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 속에 성령의 역사가 약해지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기쁨이 없어지고 신경이 예민해집니다. 불평이 많아집니다. 가족이나 교인 등 주위 사람들의 결점이 자꾸 눈에 들어옵니다. 모든 것을 안 된다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에게 경고하십니다. 

마 7:2-3,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성령의 감화력을 잃어버렸기에 그런 상태에서 누가 잘하고 잘못했느니 따져봤자 서로 상처만 주고받습니다. 반면에 성령이 충만하면 기쁨이 충만합니다.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성령은 기름 같아서 윤활유 역할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 충만을 지속적으로 받을수 있습니까? 

첫째로 회개할 때 성령이 임하십니다. 행 2:38-39,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다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는 약속합니다. 회개하지 않은 죄들이 있을 때 성령 충만하지 못하고 능력이 없습니다. 죄악 된 삶을 청산하고 주님께로 돌아올 때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합니다. 

둘째로, 기도할 때 성령의 능력이 회복됩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셋째로, 말씀을 들음으로 성령이 임합니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행 10:44-46).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증거할 때에 말씀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넷째로, 순종할 때에 성령이 임합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행 5:32). 

때로 힘들지만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으로 알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낙심 중인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위로하시고 믿음을 주시고 그를 축복하셨던 하나님, 삼손 앞에 생수를 터뜨려 그를 회복시킨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삶의 현장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치유하고 회복시키기 원하십니다. 회개하면서, 기도하면서, 말씀을 들으면서, 순종하면서 다시 한번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주신 사명 감당해야 합니다.  

3) 말씀을 보는 눈이 떠져야 합니다. 

율법이 구약 성경에 있으므로 율법을 무시하고 은혜와 믿음을 강조하는 바울은 구약을 무시하는 것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가르치는 율법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바울의 가르침이 구약성경에 부합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율법을 지키라고 강조한 구약이 이미 율법의 조항을 다 지킨다고 해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 아님을 암시하고, 그로 인한 저주에 대하여 말하면서도 그 저주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에 대해 이미 예언했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지키는 것 같았지만, 사실상 구약성경의 메시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셈이었고, 바울은 구약성경을 반대하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 그 메시지를 새롭게 전달한 셈입니다. 

신구약 전체를 흐르는 ‘믿음을 통한 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성경을 보는 자세를 새롭게 가져야 합니다. 성경의 어느 한 가르침에만 빠지지 않고 성경전체의 메시지를 듣도록 해야 합니다. 시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말씀은 우리의 인생을 이끌고 성공적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므로 우리 모두 말씀의 기초 위에 든든히 서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율법적이 되어 그리스도의 은혜를 흐리지 않게 해야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 함을 받았다하여 함부로 행동함으로 경건의 모습을 잃지 않도록 균형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삶은 자기의 죄악된 욕심을 주님 앞에 내려놓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은 성령의 지혜와 능력으로 채움 받아 주의 일에 힘쓰는 삶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성령이 주시는 능력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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