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막 2:1-12)

첨부 1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막 2:1-12)


[며칠이 지나서,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다. 예수가 집에 계신다는 말이 퍼지니,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서, 마침내 문 앞에조차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셨다. 그 때에 한 중풍병 환자를 네 사람이 데리고 왔다. 무리 때문에 예수께로 데리고 갈 수 없어서, 예수가 계신 곳 위의 지붕을 걷어내고, 구멍을 뚫어서, 중풍병 환자가 누워 있는 자리를 달아 내렸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율법학자 몇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한단 말이냐?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나님 한 분 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곧 바로 마음으로 알아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중풍병 환자에게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걸어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말하기가 쉬우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려주겠다.” 예수께서 중풍병 환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집으로 가거라.” 그러자 중풍병 환자가 일어나, 곧바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리를 걷어서 나갔다.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라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는 이런 일을 전혀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 말세의 징조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무더위에 지친 우리의 몸과 마음에 가득 하기를 기원합니다. 한 주간 동안 얼마나 기뻐하며 사셨습니까? 얼마나 자주 생명의 신비에 놀라셨습니까? 낯선 인사인가요? 날이 무척 덥습니다. 제 사무실 뒤꼍에 있는 라일락나무에 찾아와 쉬다 가곤 하는 직박구리가 요즘 무더위에 멘붕상태가 된 것 같습니다. 가끔 수조에 엎드려 물을 마시곤 하는데, 가만히 다가가도 흘낏 쳐다보고는 저를 아예 무시해버리고 맙니다. 하늘과 땅과 나무와 동물들은 우리 마음을 상쾌하게 해줍니다만, 인간 세상의 풍경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제주 올레길 피살 사건이나, 통영에서 일어난 어린이 살해 사건을 보면서 사람들은 ‘어떻게 인간이 저럴 수 있나?’ 탄식합니다. 

디모데후서가 말하는 말세의 징조를 다시금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세가 되면 사람들은 무정하며, 원한을 풀지 않으며, 비방하며, 절제가 없으며, 난폭하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딤후3:1-5). 막스 베버는 사람들이 더 이상 삶의 의미에 대해 묻지 않고 또 생각하지도 않는 시대, ‘영혼 없는 전문가’, ‘가슴 없는 향락자’가 등장하는 시대를 예고하면서 그들을 일컬어 ‘말인末人’이라 했습니다. 그들은 일종의 좀비 같은 존재입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 어려운 시대에 우리를 불러주신 뜻은 사람의 사람다움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사실을 삶으로 증언하라는 명령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자꾸만 되새겨 보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 우리의 모어母語처럼 익숙하고 자연스러워져야 우리 삶이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막1:15)라는 선언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은 악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시고, 많은 병자들을 고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고 있음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런 소문이 널리 퍼지자 예수님은 동네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 곳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가운데 벌어진 아주 놀랍고 기이한 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무리 때문에

오늘 본문은 ‘며칠이 지난 후’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저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기 위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가버나움의 어느 집에 들어가시자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로 인해 그 집은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속에 있는 목마름을 알아차리시고는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마가는 그 내용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삶에 대한 가르침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복잡하고 정교한 신학적 언설이 아니라, 단순하고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언어를 통해 잘 전달하셨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가슴에 어떤 따뜻함이 배어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때 일단의 사람들이 중풍병 환자 한 사람을 데려 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마가는 그 까닭을 ‘무리 때문에’라고 말합니다. 평범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무리’라고 번역되는 단어 ‘오클로스oklos'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군중, 즉 힘없는 민초를 일컫는 말입니다. 밟으면 밟히고, 뺏으면 빼앗기는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김수영 시인의 말대로 하자면 바람이 불면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이 지나면 또 다시 몸을 일으키는 ‘풀’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늘 선하지도 않고, 늘 악하지도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그들의 처신은 달라집니다. 

그들은 통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나쁜 사람들에게 가장 이용당하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통념에 입각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수용하기도 하고, 자기들의 기대에 맞지 않을 때는 배척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풍병자에게 무리가 장벽이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가 죄인임을 입증해준다는 통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풍병자가 예수님과 만나려면 무리들의 통념이 해체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지붕을 뜯고라도

무리로 인해 길이 막히자 그를 데려온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어지간하면 포기할 법도 하건만 그들은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 올라 지붕을 걷어내고 중풍병 환자를 예수 앞에 달아 내렸습니다. 놀라운 열정입니다. 엘살바도르의 순교자인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는 사방이 가로막혀 있을 때 위를 바라보는 것이 초월이라고 말했습니다. 중풍병 환자와 그를 데려온 이들이 어떤 관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와 환자를 기어코 대면시키겠다는 그들의 열정은 놀랍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들은 ‘무리’라는 장벽, 곧 사회적 통념이라는 장벽에 도전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남다름은 무엇입니까? 절박함입니다. 절박함이 있었기에 그들은 길 없는 곳에 길을 냈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들은 모두 그런 열정으로 사는 이들입니다. 우리의 실천과 사랑은 대개 장벽 앞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고 자위하며 현실을 수긍하곤 합니다. 하지만 중풍병 환자를 데려온 이들은 포기할 줄 몰랐습니다.

무리와 그들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중풍병 환자를 죄인이라는 사회적 통념의 틀 속에 가두지 않습니다. 그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의 고통과 외로움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회적 비난과 손가락질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이게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대목에서 마가는 아주 놀라운 말을 들려줍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5)

먼저 언어적인 부분을 따져보고 싶습니다. ‘이 사람아’라고 번역된 헬라어 테크논teknon은 실은 부모가 자식을 부를 때 사용하는 말로 ‘얘야’ 혹은 ‘아들아’라고 번역되어야 하는 말입니다. 30대 초반의 예수가 이런 단어를 사용한다는 게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마가는 의도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성경 번역자는 그게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느꼈던지 다소 밋밋하게 ‘이 사람아!’라고 번역했습니다. 조금 아쉬운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처음 보는 그 중풍병 환자에게 가장 친근하고 다정한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를 사회적 통념을 따라 죄인이라고 생각했더라면 이런 표현을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말미암아 좌절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셨기에 그를 측은히 여기셨습니다. 역시 공감입니다.

예수님은 다정한 호칭에 이어 놀라운 선포를 하십니다. “네 죄가 용서받았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가 아닙니다. 여기서 용서하는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말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셨던 것일까요? 세상이 뭐라 하든 그대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풀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믿음을 인정받은 사람은 환자 본인이 아니라 그를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이고, 그들의 믿음 덕분에 중풍병 환자는 병을 치유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아내의 믿음이 좋다고 해서 남편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머니의 믿음이 좋다고 해서 자식들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 그 말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회적 통념에 구애받지 않고 한 사람의 생명을 온전하게 고쳐주고 싶은 ‘그들의 믿음’이, 즉 그들의 간절함이 구원 사건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마가는 강력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환자 본인의 믿음이 있었느냐를 가지고 논쟁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 존재에게 온전한 삶을 안겨주고 싶은 우리의 간절함은 하나님을 움직입니다. 진실한 믿음, 진실한 사랑은 주변에 구원이라는 파장을 일으키는 법입니다. 

• 아, 답답한 사람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영 불편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성경에 대해 전문가라 자부하는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보다는 문자에 더욱 집착하는 이들입니다. 

“‘이 사람이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한단 말인가.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나님 한 분 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7)

구원의 사건이 벌어지는 현장에서도 그들은 ‘구원론’과 ‘사죄론’에 집착합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바울 사도가 했던 촌철살인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고전8:1b) 그들은 율법, 자기 민족의 전설, 신화, 민담, 역사를 사람들에게 풀어 설명해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머리만 클 뿐 공감의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마비된 몸으로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나 그를 돕기 위해 사랑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그들은 법과 전통을 따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똑똑한 사람들 같으나 실상은 바보입니다. 생명을 살리지 못하는 지식은 죽은 지식일 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생명의 주인이라 고백하면서도 짓눌렸던 생명이 회복되는 현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합니다.

말로는 사람을 속일 수 있지만 몸은 진실을 말하는 법입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의 불편한 마음을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책망하듯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8b) 그리고는 그들이 듣고 더 혼비백산 할 수밖에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알려주겠다.”(10)

이 말씀은 물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권능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이 말 속에 담긴 속뜻도 분명히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단죄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용서하고 풀어내는 일에는 미숙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불균형을 깨뜨리고 계십니다. 

죄에 매어 있는 사람을 풀어주고, 이런저런 삶의 질곡에 붙들려 옴짝달싹 못하는 못하는 이들을 구해주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임해주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후에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20:2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궁극적으로 죄의 문제를 푸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우리도 이 땅에서 죄의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 

예수님은 중풍병 환자에게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집으로 가거라”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본문은 “중풍병 환자가 일어나, 곧바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리를 걷어서 나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치 중풍병 환자가 스스로 일어난 것처럼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은 그가 ‘일으켜 세워졌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가자 마비되었던 그의 몸과 마음이 풀렸고, 맥없던 두 다리에 힘이 채워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창조의 아침에 울려퍼졌던 하나님의 말씀과 다를 바 없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던 것처럼, 주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무기력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다”(4:12)고 말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기독교인은 주님의 말씀을 모어로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만나지 못해 우리는 나른하고 혼곤한 무기력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들어가자 중풍병 환자는 일으켜 세워졌습니다. 일찍이 아모스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날이 온다. 나 주 하나님이 하는 말이다.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보내겠다. 사람들이 배고파 하겠지만, 그것은 밥이 없어서 겪는 배고픔이 아니다. 사람들이 목말라 하겠지만, 그것은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이 아니다.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말라 할 것이다.”(암8:11)

지금이야말로 말씀이 사라진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많지만 가슴으로 배로 발로 듣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귀에 달콤한 것만 가려서 듣습니다. 그러니 말씀으로 인한 변화사건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만나 생명이 회복된 중풍병자를 본 사람들은 크게 놀라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구원 사건은 이처럼 사람들 사이에 기쁨과 감사의 기운을 불러일으킵니다. 그 순간 환자와 예수 사이에 장벽처럼 서있던 ‘무리들’의 가슴에도 작은 문 하나가 열렸습니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 하나를 돕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 기적을 이루었고, 그 기적은 작은 파문이 되어 사람들의 가슴을 녹여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필요한 사람들은 중풍병 환자를 예수 앞으로 이끌었던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 무더운 여름에 우리의 정성과 사랑이 사람들 사이에 시원한 바람처럼 불어가고, 우리의 발걸음이 머무는 곳마다 주님을 찬양하는 노랫소리가 울려퍼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