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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1) : 요나의 하나님 (욘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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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1) : 요나의 하나님 (욘 4:1-11)

성경을 볼 때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공시적(共時的, synchronic)' 방법과 '통시적(通時的, diachronic)‘ 방법입니다. 소쉬르라는 사람이 언어체계의 연구에서 구분한 것으로 국어학이나 문학에서 쓰는 방법입니다. 

공시적 방법은 시간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고 특정 본문을 깊이 묵상하는 방법입니다. 통시적 방법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고려하여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는 방법입니다. 

오늘부터 한 시대에 활동했던 성경에 나온 선지자들을 중심으로 역사에 개입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시리즈로 살펴보며 이 시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려고 합니다. 선지자에는 기술 선지자가 있습니다. 대선지서와 소선지서를 기록한 선지자들입니다. 그리고 일반선지자가 있습니다. 성경을 기술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대언한 자들입니다.

 다윗의 간음을 책망한 나단 선지자, 다윗의 인구 조사를 책망한 갓 선지자, 여로보암에게 북왕국 건립을 예언한 아히야, 예수님을 예비한 세례 요한 등과 같으신 분들이지요. 먼저 12명의 소선지서를 기록한 선지자들을 중심으로 말씀을 보려고 합니다. 오늘 첫 번째로 요나서를 보겠습니다. 

1. 요나가 활동한 시대적 배경

요나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어 있을 때입니다. 남 유다에서는 아마샤와 웃시야가 함께 집권하고 있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에서는 여로보암 2세가 집권하고 있었습니다. 이 여로보암 2세가 아주 강력한 왕입니다. 40년을 통치한 왕입니다(황하14:23). 주변 국가인 모압, 암몬, 에돔을 모두 정복하고 다윗 이후 최대의 영토를 차지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부강해지면 하나님을 멀리하듯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예배하지도 않았습니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까 우리나라가 지금 세계 7번째로 "20-50 클럽(1인당 소득 2만 달러-인구 5000만 명)이 되어 확실한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다는 신호라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경제적으로 부해지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나갑니다. 

성경은 그 당시의 영적 상태를 한 마디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왕하14:24)”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악행과 범죄 때문에 하나님은 아모스와 호세아를 통해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는 앗수르였습니다. 얼마든지 이스라엘을 칠 수 있는 힘이 있었지만 북방의 아라랏의 공격을 받고 있었고, 전염병과 일식현상으로 왕과 백성들을 마음이 약해지고 공포에 휩싸여 있었을 때입니다. 

2. 요나를 불러 사명을 주시는 하나님

이 때 하나님은 요나를 불렀습니다. 시대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구약을 이해할 때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시내산에 불러 언약의 말씀을 주었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모세 오경이라고 합니다. 모세 오경 중에 제일 먼저 기록한 말씀은 레위기입니다. 시내산에서 1년 동안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계시해 준 언약입니다. 

원리는 단순합니다. 아담과 하와로 말미암아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근원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 이미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왕되심을 인정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 언약을 지키면 복을 받지만 지키지 않으면 징계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언약을 붙들고 훈련하는 모습이 민수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명기는 이 언약을 새로운 세대에게 재해석해 주십니다. 창세기에는 이 언약을 체결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이 언약을 맺는 과정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역사의 기록인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삼상하, 왕상하, 대상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는 이 언약을 붙들고 어떻게 역사 속에서 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언약대로 사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언약을 지킬 때는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언약을 지키지 않을 때는 징계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징계할 때는 바로 징계하지 않습니다. 미리 경고를 합니다. 선지서 즉 예언서는 바로 언약을 지키지 않을 때 징계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선지자를 불러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시가서는 언약을 지킴으로 누리는 풍성한 복을 감사하고 고백하는 내용의 기록입니다. 

선지자 요나를 왜 불렀는지 보십시오. 1장 2절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고 말씀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인간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 보시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지극히 타락하였을 때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 나라인 앗수르에 가서 예언하라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당연히 망해야 할 나라,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나라라고 생각할 때입니다. 

3. 요나의 소명 거부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1장 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얼굴을 피합니다.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어떻게 피하겠습니까? 인간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수 있을 것을 착각하는 것입니다. 일어나기는 일어났는데 어디로 갑니까? 사명의 땅이 아닙니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지금 말하면 이라크에 있는 땅입니다. 지중해로 가면 안 됩니다. 그런데 반대편인 욥바 항구로 내려갑니다. 그 배를 타고 아주 먼 곳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가 많지 않은 때 그 때 마침 잘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왜 요나가 사명을 피했습니까? 요나 스스로 입을 통해 무엇이라고 말씀하는 지 보시기 바랍니다. 4장 2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애가 크셔서 재앙을 내리지 않기 때문에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서 회개를 외치면 망해야 할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원수의 나라입니다. 그 원수의 나라는 망해야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잘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미움과 증오의 대상입니다. 자기가 도망가면 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의 배타적인 선민의식과 편협한 민족주의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집단의식이라고 합니다. 역사적 상황과 의식적 상황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시대마다 그 시대의 집단정신이 있습니다. 요나가 속한 공동체의 집단정신은 니느웨에 대한 미움과 증오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집단의식은 자본주의, 반공입니다. 이것을 거스르면 좌파, 용공, 친북이 되어 매도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민족을 괴롭히고 악을 일삼는 무리인 니느웨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를 바라는 것은 그 당시 시대정신에서는 당연한 것입니다. 사람은 자아의 주체적인 판단을 하기보다는 집단의 여론에 동화되어 버립니다. 지역적인 삶의 공동체의 영향과 시대적인 영향을 무의식적으로 수용합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사고들을 여과 없이 맹목적으로 추종합니다. 

심리학적 용어로 말하면 집단정신에서 개성화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융은 개성화를 위해서는 고난과 죽음, 부활 세 단계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사명을 받은 요나였지만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 믿어도 이 틀에서 벗어나는 것 쉽지 않습니다. 지역주의를 보십시오. 말투만 달라도 거부감을 갔고 비호감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극복하기 어렵습니까? 소수의 문제를 전 지역의 문제로 끌고 가는 ‘일반화의 오류’를 얼마나 많이 범하고 있습니까?

대통령도 경상도. 서울시장도 경상도 출신인 시절에, 전라도 지역 사람들이 모여 욕을 하고 있는데, 대문 밖에서 거지가 “밥 좀 주이소”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한 남자가 입에 거품을 물고 “너거들끼리 다 해 쳐 먹어라!”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진보와 보수를 보십시오. 신앙인도 정치에 들어가면 어쩔 수 없이 그 틀의 종이 되어 버립니다. 지난 주 신문을 보니까 "박원순은 사탄 마귀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설교한 어느 목사가 벌금 300만 원 선고받았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탈북자를 옹호하는 설교를 하면 '친북반미, 좌경' 목사라는 딱지를 붙여 버립니다. 교회 안에 매카시즘 바람이 얼마나 거셉니까? 시대의 집단의식으로부터 하나님의 마음을 보는 것은 쉬은 것이 아닙니다. 

4. 도피 계획의 실패

그러나 요나의 계획이 성공합니까? 아무리 도피하려 하여도 도피할 수 없습니다. 4절에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태풍을 불게 합니다. 배가 깨어질 상태가 됩니다. 사명을 거부한 요나를 태우고 가는 배가 위기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사명을 거부하고 가는 가정이, 교회가, 직장이 위기를 맞이한 것입니다. 
물질에 손해를 봅니다. 배에 있는 물건들을 바다에 수장시킵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합니다. 사공들은 두려워 자기들의 신을 부릅니다.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 잠을 자고 있습니다. 
선장의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자신을 찾게 만듭니다. 집단의식에서 개성화를 이루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내면의 음성을 듣게 만듭니다. 초월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기억하게 만듭니다. 9절을 보십시오. 자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선원들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요나는 바다에 던져져 재물이 되었습니다. 

5. 위기 속에서 요나의 기도

요나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그 때 상황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고난 속(욘2:2), 스올(음부)의 뱃속(욘2:2), 깊음 속에서(욘2:3,5),) 쫓겨난 곳에서(욘2:4), 산의 뿌리까지 내려가 빗장으로 막힌 곳에서(욘2:6), 영혼이 피곤할 때(욘2: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절박한 상황, 막장에서 무엇을 합니까?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2장 9절을 보십시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구원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하나님은 어떻게 해 주십니까? 응답하셨고(욘2:2), 그의 음성을 들으셨고(2), 그의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고(6), 그의 기도가 주께 이르고 주의 성전에 미치게 하셨습니다(7). 기도 응답을 받은 요나는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감사제를 드리며 서원을 주께 갚겠다고 하였습니다(욘2:9). 하나님은 그의 항복 선언을 들은 것입니다. 그리고 물고기를 명하여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였습니다. 고난에서 풀어 주신 것입니다. 깊은 수렁에서 건져 주신 것입니다. 

6. 사명을 감당하는 요나

다시 요나에게 하나님은 사명을 주십니다. 3장 2절을 보십시오. 요나서는 1-2장과 3-4장이 대칭으로 되어 있습니다. 1장에서 사명을 주었듯이 3장에서 또다시 사명을 줍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사명에 순종하여 하루 동안 다니며 외칩니다. 아주 단순한 말씀입니다. 히브리어로 다섯 마디입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자신을 적이라고 잡아 죽이지 않습니다. 싫은 소리를 한다고 감옥에 가두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 단순한 말에 의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합니다. 왕부터 시작하여 모든 백성이 회개를 합니다. 짐승들도 금식을 시킵니다. 

7. 요나의 하나님

요나서를 통해 하나님은 요나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시고 있습니까?
편협한 민족주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종속된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끝까지 용서하시고 참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니느웨에 재앙을 내리지 않는 모습을 보고 요나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1절을 보십시오. 싫어하였습니다. 이 말은 "어떤 물건을 조각조각 내다. 갈길갈기 찢다.”는 뜻을 가진 단어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극심한 슬픔이나 근심 시기심 등을 말합니다. 

노하다는 말은 "불타다"는 뜻을 가진 단어로서 감정이 몹시 상하여 맹렬히 화를 내는 것을 가리킵니다. 요나가 단순히 불만스럽게 느낀 정도가 아니라 극렬한 분노의 감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을 알아주어야 하는데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입니다. 죽을 각오하고 전했습니다. 그런데 죽지 않고 살아납니다. 자신의 목적이 성취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많은 일을 하고도 요나처럼 "싫어하고 노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하기 싫은 일 장로기 때문에 집사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자기의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다 바쳐서 봉사하고 충성합니다. 그런데 일을 마치고 나면 사탄이가 찾아와서 살금살금 시험합니다. "그 봐 열심히 해 봐야 별 수 없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잖아, 칭찬도 안해 주잖아, 다른 사람 좋은 일만 시키잖아."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슬며시 화가 납니다. 요나처럼 되는 것입니다. 영적침체가 오는 것입니다. 두고 보라 아무것도 안할 것이라고 다짐해 버리는 것입니다. 요나처럼 그러나(욘1:3,5,13)를 반복하면 병이 도지는 것입니다.

부당하게 대우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불공평하고 불공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이스라엘의 적국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재앙을 내려야 하는데 오히려 회개하고 구원받은 것입니다(3:10; 4:2). 

남한 사람이 북한 정권이 망하기 바라는 것처럼 앗수르 나라는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적대관계에 있는 강대국입니다. 722년에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것도 앗수르라는 나라입니다. 많은 이웃나라들이 조공을 바쳤습니다. 니느웨라는 도시는 어느 도시보다 화려하고 웅장했습니다. 

나훔서 3:1에 보면 "사람을 죽인 피로 얼룩진 니느웨 도성은 멸망하고야 만다! 도성 전체가 온갖 거짓으로 가득 찼고 폭력과 불법이 온통 들어차 있다. 사람을 끌어다 죽이는 일이 하루도 끊이지 않고 있다.(현대인의 성경)" 이것이 앗수르의 니느웨 백성의 단적인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람취급도 하지 않는 이방인들, 살인과 불법으로 얼룩진 니느훼성, 그들을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일이었습니다. 늦게 교회에 등록한 사람이 앞서 일하는 것,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안수집사가 되는 것 불공평한 것입니다. 개 취급하였고 지옥의 땔감으로 취급하였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 대듭니다. 

3절을 보십시오. 죽여 달라는 것입니다. 저들이 잘 되는 꼴 보며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났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이런 것입니다. 남 잘되는 꼴을 못 보는 것입니다. 순전히 은혜로 된 것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나는 용서받아야 되지만 원수는 용서받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다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사람입니다. 그곳에서 회개하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고 살아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니느웨가 회개하고 용서받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분을 내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 배신자입니다. 도망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다시 받아 주십니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죽음의 죄에서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제 원수의 나라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용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용서해 줄려면 차라리 자신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4절을 보십시오.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라고 말씀합니다. 성의 성내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요나가 어떻게 합니까? 5절을 보십시오. 어디 두고 보자, 잘 되는 꼴 보자하는 식으로 성이 잘 내다보이는 동편에 초막을 짓고 성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되기를 보고 있겠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처럼 다 불타 버리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나는 용서받도 다른 사람은 용서받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그 대가를 받아야 속이 후련한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박넝쿨 기적을 보여 주십니다. 박넝쿨로 햇빛을 가리우게 하니까 요나가 박넝쿨로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습니다.(6) 박넝쿨로 금방 화가 풀리고 즐거워하는 요나에게 하나님은 벌레로 잎을 먹게 하고 햇빛이 내리자 요나는 다시 원망합니다. 8절 죽여주십시오. 차라리 이렇게 살려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났습니다. 

9절 하나님이 이 박넝쿨로 인하여 성내는 것이 합당한 것이냐? 정당하냐?고 물어 보십니다. 그 때 요나는 성내어 죽을 지라도 옳다고 말합니다. 우리 같으면 참겠습니까? 인간 같으면 당장 요절을 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참으십니다. 평생을 뒷골목에서 불량배생활을 하며 술주정꾼으로 살다가 늦게 회개하고 이제는 전도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전도 여행을 하던 신앙인이 한 마을에서 미치광이로 취급받으며 쫓겨나게 되었답니다. 그는 바위에 엎드려져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더 이상 어떻게 참아야 합니까. 어떻게 이런 생활을 계속해야만 합니까." 그 때 주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에 대하여 그 동안 50년을 참았었노라" 

참을 뿐 아니라 용서해 주십니다. 문제 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빌 2: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십자가에서 백성들이 조롱합니다. 군병들이 옷을 나누어 가집니다. 따르는 사람도 다 배신하고 떠나 버립니다. 그 때 예수님은 "저들은 저들의 죄를 알지 못합니다." "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라고 말씀하십니다. “(벧후3: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라고 말씀합니다. 징계하시는 하나님은 참고 참으십니다. 소돔 고모라 성을 멸망시킬 때도 참고 참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봅니다. 노아 시대도 120년 동안을 기다립니다. 

출34:6에는 하나님을 이렇게 말씀합니다."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으신 하나님으로라" 벧후3:9에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는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시기를 원하시느니라". 우리는 끝까지 참으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어제 인터넷 신문을 보니까 60~70대 부부 '황혼의 전쟁'이라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노년에 심각한 갈등 가운데 있는 부부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아내들이 남편의 젊은 날 언행에 대하여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갈등을 풀지 못하고 각방을 쓰며 평생 원수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런 유머가 있지 않습니까? 하도 사이가 안 좋은 부모님을 사이좋게 만들게 하기 위해 방송국 퀴즈프로그램에 아들 며느리가 보냈답니다. 천생연분 이라는 단어를 빨리 설명하고 맞히는 문제가 주어졌답니다. 할아버지가 "우리와 같이 사이가 좋은 걸 뭐라고 하지?" 할머니- "웬수!" 할아버지-"아니 두 자(字) 말고… 네 자로 된 단어로는?" 그러자 할머니가 정답이라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평생~ 웬수~!"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마술사가 할아버지를 나오라 하더니 “여러분, 지금 내가 이 할아버지를 사라지게 해 보이겠습니다." 잠시 후 할아버지가 무대에서 사라져 버렸답니다. 방청객들이 환호를 하였답니다. 환호가 잦아들자 마술사가 다시 이야기했답니다. "자 이제 사라진 할아버지를 다시 나타나게 하겠습니다." 그러자 큰 목소리로 할머지가 소리쳤답니다. "아니, 그 정도로 충분해요."

2)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훈련시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십니다.
사람은 달아날 수 있지만 숨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훈련시켜 사명자로 사용하는 사랑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요나 선지자는 네 가지 훈련을 받습니다. 

첫 번째 훈련은 풍랑을 통한 사명자 훈련을 받았습니다. 요나는 자신이 사명자인 것을 알았으나 사명자로서 절대 순종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가 탄 배를 풍랑을 만나게 함으로 사명자는 불순종하면 자신도 망하고 타인에게도 막대한 피해가 오는 것을 배웠습니다.

두 번째 훈련은 물고기 뱃속의 고난훈련을 받았습니다. 요나는 사명자였으나 니느웨에 가서 회개하라고 외칠 강인한 믿음, 용기 있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고난과 죽음, 부활과 같은 밀도 높은 훈련을 받았습니다. 완전히 생각이 바뀐 것입니다. 인생관이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무시무시한 니느웨 성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는 부활의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고난은 사명자를 강하게 합니다.

세 번째 훈련은 요나는 니느웨 성 안에서의 전도훈련을 받았습니다.
요나는 실제로 니느웨에 가서 회개하라고 외쳤고 니느웨 성이 40일후면 소동과 고모라 같이 된다고 외치는 전도훈련을 하였습니다. 니느웨는 요나의 외침을 받아들여 회개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요나는 아직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박넝쿨 밑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담게 만드는 사랑의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를 회개시키었으나 니느웨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습니다. 의무적으로 전도는 하였으나 진정 영혼에 대한 사람이 없는 요나에게 박넝쿨의 훈련을 통해 하나님은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신앙은 안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훈련이 되지 않으면 무너집니다. 아브라함을 그냥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25년 동안 훈련을 시키십니다. 모세를 그냥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40년 궁중 교육과 40년 광야 훈련을 시켜 사용하십니다. 요셉을 훈련시켜 국무총리가 되게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사랑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끝없이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훈련을 시켜 결국 구약에서 가장 큰 부흥의 역사를 이방 땅에서 이루어내었습니다. 재목이 되는 나무는 하루아침에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 시대를 가리켜 인재 전쟁의 시대(The war of for talent)라고 말을 합니다. 모든 나라가 경제 전쟁을 하고 있는데 그 핵심은 인재에 있다는 말입니다.

어느 나라가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미래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기업도 마찬 가지라고 합니다. 우수한 인재의 발굴 및 유지가 기업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핵심 사안이라는 것입니다. 탁월한 기업이 되려면 전략, 기술, 시스템이 탁월해야 하지만 결국 전략을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기술을 만들어 내는 것도 사람이고,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도 사람이기 때문에 인재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세계 초 인류 기업이라고 하는 마이크로소프트(MS)사는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300여 명으로 구성된 '캔디데이트 제너레이터(Candidate Generator)'라는 인재 발굴팀을 운용한다고 합니다. 만약 꼭 필요한 인재가 있는데 회사에 대한 신뢰나 다른 이유로 이직을 꺼려하면, 아예 그가 속한 회사를 사버린다고 합니다. 가장 유명한 사례가 빌 게이츠의 기술자문 겸 소프트웨어 기술자인 아눕 굽타를 영입하기 위해 굽타가 다니는 회사를 통째로 인수한 일이라고 합니다. 꽃꽂이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재를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부족해도 부름받은 사람들 끝까지 훈련시키십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밧세바를 간음했을 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갔을 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을 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사기치고 도망했을 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배신하고 저주까지 하며 도망갔을 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찾아가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훈련시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십니다.

3)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아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십니다.

결론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10-11절 말씀입니다. 
"너는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우지도 않았고 그저 하룻밤 사이에 나타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사라진 저 박넝쿨 한 포기에 슬퍼하고 있느냐. 그렇다면 저 성에는 12만명 이상이 있고 수많은 가축이 있는데 내가 어찌 슬퍼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 땅까지 온 세계를 다스리시고 통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19:5-6)”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모두가 주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롬11:36)” 

온 세상 사람들 모두 어떤 죄를 범했든 은혜의 대상이요 긍휼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좁은 시야로 하나님을 한정짓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나의 도구로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만 아니라 온 인류의 하나님입니다. 아담은 유대인의 시조가 아닙니다. 온 인류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온 인류를 구원하기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나는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는데도 그 사랑을 깨닫지도 못하고 실천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품지 못하는 편견과 아집, 고정 관념, 종교적 우월감을 버려야 합니다. 지방이 다르다고, 출신이 다르다고, 성이 다르다고, 나라가 다르다고 인종이 다르다고 편 가르기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요나처럼 심히 싫어하고 노하지 말아야 합니다.

딤전2:4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복을 전하길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1904년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는 구세군을 창설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 복지혜택을 준 윌리엄 부드를 왕실로 초청해 격려했답니다. 왕은 격려 끝에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왕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주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그는 겸손한 목소리로 대답했답니다. "국왕 폐하, 제가 바라는 것은 한 명의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저의 희망이요, 야망입니다. 그리고 최대의 기쁨입니다" 

제가 2008년에 대만 선교지를 방문하였습니다. 해발 800미터에서 사는 원주민 마을입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마을 중앙에는 교회가 잘 지어져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돈 9억을 들여 온 교인들이 힘을 합하여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건축했다고 합니다. 모두 돌로 되어 있고 강대상은 큰 나무 뿌리로 되어 있었습니다. 교회 앞에 낯익은 글자가 있었습니다. 한글로 기념패가 붙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오셔서 23년 동안 선교한 한 선교사님을 기리는 기념패였습니다. 그분은 영어 교사를 하시다가 선교에 부름을 받고 대만 원주민 마을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셨다고 합니다. 

그 원주민은 글이 없어 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몰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를 만들어 주고 그 언어로 신약 성경 전부를 번역하고 완성한 것입니다. 무려 23년 동안 그곳에서 선교하면서 그들의 글을 만들어 주고 신약성경을 완전히 그들의 말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 글을 보면서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국 선교사 한 분의 밀알이 떨어져 참으로 많은 열매를 맺히게 되었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생명을 사랑하는 복음 전하는 사명을 주었습니다. 사람낚는 어부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훈련시켰고 유언의 말씀으로 생명을 구원하라고 누누이 강조하였습니다. 바울(행9:15)을 부르실 때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생명 구원의 사명을 가져야 합니다. 가정과 지역, 세계를 향해 생명 구원의 사명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이루지 않으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9:3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전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자 권리이고 의무입니다. 대상자를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복음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시간도 들이고, 물질도 드리고, 재능도 드려야 합니다. 사랑의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와 목자와 구역장, 교사가 희생하는 사랑을 가지지 않고는 하지 않고 생명의 역사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문둥이가 된 성자]에 나오는 다미엔을 보십시오. 나병 환자들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자 자신이 나병에 걸립니다. 그 때 그들은 감동합니다. 온 섬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로 변합니다. 교회는 유람선이 아닙니다. 전투함입니다. 

나의 니느웨는 어디입니까? 요나같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10, 12절을 잃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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