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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하는 삶 (마 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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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는 삶 (마 18:21-35)

영국의 유명한 윌링톤 제독의 이야기입니다. 자기가 데리고 있는 군인 가운데 행동이 불순한 부하가 있었는데 어떻게 하든지 사람되게 만들어 볼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무섭게 훈련을 시켜보기도 하고, 때론 달래보기며 하며, 온갖 방법들을 다 동원해서 사람을 만들어 보려고 했는데 효과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결정적인 실수를 해서 그에게 희망이 없다고 생각이 되어 "사형" 결정을 하려고 부관에게 그를 부르게 했습니다. 그러자 부관은 그 병사를 불러 왔고 윌링톤 제독이 그를 세워놓고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너는 더 이상 사람으로써 가치가 없는 놈이야 ! 너를 사형시킬거야" 

그말을 듣고도 조금도 겁내지 않았습니다. 
병사가 밖으로 나갔을 때 윌링톤 제독의 부관인 "윌슨"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하! 각하께서는 저 병사를 사람 만들려고 모든 방법을 다해 보셨다고 했는데 한가지 방법이 빠진 것 같습니다?" 너무 뜻밖에 말에 놀라한 제독이 부관에게 물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고 ? 

그러자 "각하? 그를 진정으로 용서해 보셨나요? 그를 진정으로 사랑해 보셨나요?" 이 말을 들은 제독은 자신이 그의 잘못을 진정으로 용서하고 사랑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지금까지 지은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그렇게 한 다음 그의 모습이 하루가 다르게 변화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자기 가장 든든한 부관이 되었고 영국 최고의 제독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한사람을 변화시켜서 위대한 제독을 만들 수 있었던 힘이 무엇입니까? 바로 "용서의 능력"입니다. 

이 세상에 "용서받지 않아야 할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인가? 알게 모르게 죄를 짓고 해를 끼치면서 살아갑니다. 단지 내가 그렇게 사는 것을 모르는 것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받아야할 죄인들입니다. 성경은 말하길 "의인은 없나니 한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어 "용서 받아야한다"고 했습니다. 

천국은 완전한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받은 사람이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은 이 "용서의 능력"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에게 용서하며 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용서의 비밀'을 깨닫고 용서하고, 용서받는 귀한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어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로 용서란 무엇인가?

용서란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탕감"이란 말과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던져버렸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 38:17절에 보면 "주께서 나의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고 하셨고 

사 43:25절에는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던져 버렸다는 말이나, 도말했다는 말은 완전한 용서를 의미 합니다. 한마디로 기억지도 아니하고 잊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용서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갖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감정을 누르고 억제하는 것을 용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감정이 언젠가는 다시 나타나게 됩니다. 이건 용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증오"가 됩니다.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상대방을 피하고, 만나지 않고 보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을 갖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역시 올바른 용서의 정신이 아닙니다. 여러분! 함께 살면서 피한다고, 만나지 않는다고 만나지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나게 되면 또 고통스러운 마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용서하기는 해야겠는데 먼저 내게 찾아와서 용서를 빌면 용서해 주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 주님이 가르쳐 주신 용서의 정신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상대방이 잘못을 빌든지, 안 빌든지 그런 것 상관하지 말고 무조건 용서해 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자기를 못박고, 조롱하는 무리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무엇이라고 기도하셨습니까?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저들이 지금 잘못을 행한 줄도 모르지만 그래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로마 군인들에게 붙들려 가고 십자가에 달리시자 그렇게 당당했던 제자들도 다 배신하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제자는 모른다고 부인했을 뿐 아니라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부활하셔서 그를 찾아 가셨습니다. 그들에게 왜 비겁하게 나를 두고 도망갔느냐고, 왜 저주하였느냐고? 책망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저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찾아와서 고기를 많이 잡게 하시고, 음식을 준비하여 저들을 사랑으로 맞이하여 주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용서의 정신'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런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믿음 안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두번째로 어떤 사람이 이런 용서를 실천할 수 있을까요? 

내가 먼저 하나님께 용서받는 감격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용서가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 설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의 용서가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 형제가 내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줄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몇 번이나 용서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상하게 삼 3번 용서해 주는 것을 크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번이나 용서해 주었는데 하면서 더 이상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세 번용서 한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도 진정으로 용서하여 그의 잘못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몇 번 용서해 주었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법으로 말하면 "집행유예"입니다. 그래서 이다음에 죄를 지으면 지금 용서해 준 죄까지 더해서 벌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닙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도 유대의 규례에 3번까지 용서해 주라는 규례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세번 정도는 용서해 주라는 것은 "하나님도 유대인들이 서너가지 죄를 범하면 책망하셨는데"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관대할 수 없다"는 잘못된 편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는 베드로는 일곱 번 용서해 주리이까? 라고 했습니다. 대단하게 인심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했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해 주라는 것은 횟수로 치면 "490번"입니다. 그런데 이 말의 의미는 '490번'이 아닙니다. 

'끝까지' 혹은 '죽을 때까지 용서해주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주님처럼 죽는 날까지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그런 용서를 먼저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빚을 졌습니다. 얼마의 빚을 졌다고 했습니까? 일만 달란트의 빛을 졌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6000만 데나리온입니다. 당시 일군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돈으로 계산해보면 약 3조원이 됩니다. 

한푼도 쓰지않고 6000천만 날을 모아야 갚을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러니 누가 이 빚을 갚겠습니까? 아무도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의 몸과 처와 자식들, 모든 소유를 다 팔아도 갚을 길이 없습니다. 이것을 안 주인이 그를 불쌍히 여겨서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탕감받고 나오다가 자기에게 빛을 진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얼마의 빚을 졌느냐 하면 100데나리온의 빚을 졌습니다. 100데나리온 하면 일군이 100일 동안 일한 삯입니다. 우리 돈으로 계산을 해보니까 약 500만원 정도였습니다. 

물론 몇 만원이라도 빚을 졌으면 갚아야 하지요. 그런데 인정사정도 볼것 없이 끌고 가서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얼마 후에 이 소문이 온 동네에 퍼지게 되고, 그 소문이 끝내는 왕에게 까지 전해졌는데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준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서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인들에게 그를 다시 잡아 오라고 해서 '감옥'에 가두게 하였다는 얘기가 오늘 본문 비유의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같이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지은 죄를 무엇으로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죄를 탕감 받았는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형제의 조금마한 잘못도 용서해 주지 못한다면 하나님도 그 죄를 다시 묻겠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용서의 감격으로 용서하며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미국의 강철왕이었던 카네기의 성공비결은 그의 넒은 마음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이렇게 관용하는 넓은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동기가 있었습니다. 젊어서 회사에 입사해서 한동안 회사 공금을 전달하는 일을 하게 되었답니다. 

한번은 엄청난 거금을 가방에 담아 물품재료를 사기 위해서 기차를 타고 갔는데 사람도 만원이고 몸이 피곤해서 열차난간에 앉았다가 그만 졸다가 돈가방이 창밖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너무 놀란 카네기는 기관실로 달려갔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한참을 지나서야 기관실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기관사에게 자기의 사정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회사 사활이 걸려 있는 문제인데 한번 멈춰서 기차가 후진으로 가게 할 수 없느냐고 사정을 했습니다. 

얼마나 간절하게 애원을 했던지 난생처음 기차가 멈춰서 한참동안 후진을 해서 돈가방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그 돈가방을 찾는 순간 중요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동안 누가 나에게 결정적인 실수를 해도 일부러 한 일이 아니라면 용서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겠다"는 각오를 갖게 되었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미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업가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려움을 당해본 사람이 어려움을 아는 것처럼, 용서받은 감격을 아는 사람이 용서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세번째로 우리가 왜 용서하며 살아야 할까요? 

나에게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용서하며 살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나에게 유익이 되고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내 자신입니다. 남에게 검은 것을 묻히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가 먼저 검은 것을 묻혀야 합니다. 그래서 용서하지 못한 사람은 항상 자신이 어둠속에 살아갑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평안도 없습니다. 그러니 한마디로 매일 매일이 지옥입니다. 

어느 동네에 아이들에게 매를 맞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하도 때리니까 자기를 괴롭힌 사람을 복수하려고 궁리 끝에 자기 몸에 다이나마이트를 꽁꽁 묶고 다녔습니다. 건드리면 터져버리게, 그런데 어떻게 이 소식이 친구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무서워서 아무도 가까이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친구들에게 안맞아서 좋다 싶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자기혼자만 다니니까 너무 고독합니다. 뿐만 아니라 혹시 어디에 부디쳐서 터지면 어떨까? 늘 혼자 불안하게 살아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죽 힘들었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용서하지 못하고, 증오하게 되면 자기자신이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용서의 사람으로 말한다면 구약에 요셉이란 사람"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형들에 미움으로 구덩이에 빠지고 나중에는 애굽에 노예로 팔리는 불행을 겪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디발 아내의 누명으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한 번도 형들이나 보디발의 아내를 원망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요셉을 그렇게 미워했던 형들이나 보디발의 아내가 축복받고 잘되었다는 말은 성경에 한곳도 없습니다. 반면에 요셉은 성경에 가장 귀한 믿음의 사람으로 축복받는 사람이 되어짐을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먼저 용서하면 손해보는 것처럼, 지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손해보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용서하는 자가 이기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화가였던 네오나르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빈치가 예수님과 12제들의 마지막 만찬의 모습을 그리면서 두 사람을 그리는데 가장 크게 고심을 했답니다. 다빈치가 직접 제자들의 모습을 보지 않았기에 영감으로 그려야 하는데 제일 그리기 힘든 사람은 예수님과 예수님을 팔았던 가롯 유다였습니다. 먼저 가롯 유다를 그렸는데 평소에 자기를 가장 괴롭혔던 사람을 모델로 가롯 유다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11제자들을 그렸는데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고민하다가 수도사를 찾아가서 자신의 심경을 고백 했습니다. 제자들의 특성을 따라 이렇게 그렸는데 가롯 유다는 이런 마음으로 그렸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수도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친구에 대한 원한을 풀고 진정으로 용서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에 대한 영감을 얻지 못할 거라고. 수도사의 충고로 그를 찾아가 용서를 빌었고 돌아와서 영감을 얻어서 작품을 완성했다고 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한 마음을 갖고 산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용서하는 것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분노의 감정이란 밀가루 속에 넣은 누룩과도 같습니다. 오래 품을수록 마음은 점점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빠를수록 좋습니다. 

지금 우리 안에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다시 회복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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