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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2) (마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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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태복음 6장 9~13절
제목 /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2)

.9.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일상의 필요에 대해서 구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에게 큰 힘과 은혜가 됩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기도는 우리가 어떻게 생존의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를 믿고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신앙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의 필요를 채워가는 방식에 따라서 우리 삶의 클래스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아담의 후예로 태어나 삶에 결핍이 찾아오고, 자신의 힘으로 먹고살기 위해 땀 흘리며 죽도록 고생하지만 결국은 살기 위해 죽도록 일하다가 죽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로부터 공급을 받느냐에 따라 우리의 시선이 세상이냐 하나님이냐가 결정됩니다. 

이것은 생존의 문제, 일상의 필요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믿고 의지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 전반에 관련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결정하는 데에도 굉장히 중요한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오늘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이 기도는 욕망을 내려놓게 하는 기도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는 노숙자의 기도가 아닙니다. 먹을 것을 쌓아놓고도 한평생 먹고도 남을 것을 구하는 이 시대에 단 하루의 먹을 양식을 구하는 이 기도는 아주 비현실적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나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할 때가 많습니다. 한국 사회 안에는 대박 심리, 한탕주의, 단번에 일확천금을 벌고자 하는 도박심리가 곳곳에서 사람들의 심성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신자들 역시, 기도를 동원하여 내 야망을 성취하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욕망을 채워주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면 주십니다. 기도의 정석은 구하면 주시며 반드시 기도는 응답된다는 것이지만, 단 하나의 조건이 있습니다. 구해도 받지 못하고, 우리의 기도가 좌절되는 이유는 우리 안에 욕망의 문제 때문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3)」 

응답을 받는데 가장 결정적인 장애요소는 탐심의 문제, 욕망의 문제입니다. 기도는 엄청난 역사를 이루어냅니다. 우리는 기도의 능력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정욕입니다. 정욕의 문제만 잘 걸러낸다면 우리의 기도는 강력한 파워를 가지고 엄청난 역사를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욕심과 정욕이 들어가면 기도에 브레이크가 걸립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기 전에 검색대를 통과할 때, 소지하지 말아야 할 것을 넣고 통과하면 ‘삑삑’ 소리가 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검색대는 더 정밀하고 예민합니다. 우리의 기도에 정욕이 들어가 있으면 하나님의 초고성능 검색대에서 반드시 걸립니다. 아무리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의 뜻과 주님의 나라를 위한 것이라고 말해도 하나님은 우리 내면의 동기를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면 응답받는다고 말씀하시면서도 정욕에 관련해서는 왜 그렇게 까다롭게 대하십니까? 정욕이 기도 안에 있다면 모두를 불행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부족함이 아니라 넘쳐흘러서 불행한 것입니다. 결단코 부족하기 때문에 불행하지 않습니다. 지금 한국은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지만 자살률, 이혼율이 높고 우울증, 정신병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물질이 풍요로워지면서 욕망도 더 부풀어 올랐기 때문입니다. 더 많이 가지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 삶을 비극으로 몰아갑니다. 더 많이 가지면 행복할 것이라고 하지만 거짓입니다. 

과학의 발달로 문명이 첨단화되고 물질이 풍요로울수록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맘몬에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의지합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의 부족함이 없는 환경에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찾아들면서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목적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방법으로 이루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내가 구한 것을 다 얻으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한 것을 받아야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유명한 하워드 핸드릭슨 박사는 “내가 우려하는 것은 당신이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방법으로 성공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종종 하나님께서는 빨리 응답하시지 않고 시간을 끄실 때가 있습니다. 시간을 지체하시면서 우리 안에 있는 욕심이 드러나게 하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소원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비전인지 개인적 야망인지를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걸어놓고 사실상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유혹이 우리 안에서 날마다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도 마귀가 시험을 걸었습니다.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마귀 앞에 무릎을 꿇기만 하면 세상의 모든 영광을 다 주겠다고 부추겼지만, 주님은 현혹당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한 단계로 나가지 않으면 무엇이 나의 욕망이고 어떤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구별이 안 됩니다. 

내 안에 있는 욕심을 걸러내지 않으면 기도는 늘 제자리걸음을 걷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도 내용보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기도에서 영적으로 민감하게 깨어있어야 합니다. 자동차도 정기적으로 필터를 갈아주고 오일도 바꿔주지 않으면 불순물이 많아 엔진이 상하고 나중에는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알고 내 안에 있는 인간적인 욕심을 제거하면 기도에 파워가 생깁니다. 오늘날 우리는 불만족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좀 더’ 병에 걸려 삽니다. 이 병에 걸리면 브레이크가 없습니다. 이 신의 부름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욕심은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5)」 

우리는 매일 일용할 양식을 구할 때마다 부풀어진 나의 욕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힘으로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교만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공급을 의지하는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용할 양식 앞에서 만족과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시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구할 때마다 우리 안에 한껏 부푼 욕망이 가라앉게 하시고 오늘 주어진 한 그릇의 식사 앞에서 온전히 감사할 수 있는 영성이 회복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둘째, 주기도문은 공동체적인 기도문입니다.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는 것으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입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이지,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가 아닙니다. 

오늘날 온 세계에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이 기도를 드릴 때, 이 기도가 모든 백성들 안에 성취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 신자는 나에 대한 관심으로 출발하지만, 점점 공동체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신앙이 성숙할수록 나의 관심에서 내 이웃과 공동체, 부산과 민족과 세계, 열방까지 확장될 때 우리는 성숙이라고 말합니다. 기도할 때 나만의 필요에 몰두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내 문제만 해결되면 행복할까요? 내 옆에 굶주린 사람이 있는데 내 배만 부르다고 만족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이 기도는 다른 사람의 필요에 대해서도 책임을 가진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공동체에 관심이 아주 많으십니다. 성경도 공동체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기도 응답을 받고 싶습니까? 개인기도제목보다 공동체적인 기도를 드려보십시오. 그러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나만 좋은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좋을 것을 염두에 두고 기도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얼마나 그 기도를 기쁘게 받으시는지 모릅니다. 

주기도문은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가 채워지기를 구하는 비이기적인 기도입니다. 나의 문제, 나의 필요를 해결하기에만 급급하다 보면 공동체를 의식하지 못합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 이상의 부분은 이웃에 대한 책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교회 안에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서로 나누었고, 가진 자들이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 놓았습니다. 공산주의가 이것을 흉내 내다가 실패했습니다. 공산주의가 ‘공사(死)주의’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공생(生)주의’입니다. 진정한 공동체 운동이었습니다. 이데올로기나 무슨 제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이 교회에 임하심으로 아가페의 사랑이 사람들 안에 일어나, 이기심이 해체되고, 나의 필요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가 눈에 들어오고,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놓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것을 팔아 사도들 앞에 내놓았고, 가난한 자들을 도움으로 모든 사람들의 필요가 채워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을 때 가장 뚜렷한 현상 중의 하나는 이기심이 해체되는 것입니다. 자기 필요나 손해 보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에 더 민감해서 기꺼이 나누는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개인의 야망은 점점 줄어들고 나누고자 하는 정신이 강화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나에게 주신 것 중에 잉여분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불필요하게 너무 많이 쌓아놓고 삽니다. 물건교, 구매의 신이 임한 것 같습니다. 사고 또 사고 나중에는 쌓아둘 곳이 없습니다. 광고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이 나왔다고 알립니다. 저것만 있으면 행복해질 것 같고 내 욕망과 맞아떨어지면 미치게 됩니다. 그러나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는 나에게 주신 것 중에 필요 이상의 것을 나누겠다는 결단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욕망은 길들여지지 않습니다. 단 하나의 방법은 적극적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나눌 때 욕망은 서서히 힘을 잃습니다. 움켜진 것을 반복적으로 내려놓아야 합니다. 

오병이어 사건에서 어린아이가 내놓은 도시락이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아이의 작은 헌신에 주님의 축사가 있었고 작은 나눔을 통해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주기도문을 드리는 우리의 심령 가운데에도 그 어린아이의 헌신을 요구합니다. 지금 세계적인 문제 중의 하나는 빈부격차입니다. 한쪽은 흘러넘치고 다른 한쪽은 너무도 빈곤하여 죽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 인구의 약 80%가 하루에 10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30억 명은 하루 2달러로 살아가고, 또 10억 명은 1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일 50만 명의 사람들이 가난 때문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부지런히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다양한 형태로 돕는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러브 부산 행사에서 러브상자를 만들어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도 너무나도 귀합니다. 일 년의 행사가 아니라 계속적으로 우리의 이웃을 향해 손을 내밀고 우리가 가진 것을 함께 나누는 정신을 살려 나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많은 일을 했지만, 더 많이 해야 합니다. 

자기 욕망에 기초한 소비중심의 삶에 익숙해져 버리면 나눌 줄 모르는 기형적 삶으로 굳어져 버립니다. 그러면 자신의 삶을 나눌 수 없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되고, 개인이나 공동체 모두가 불행해집니다. 고통 하는 이웃에 대한 무관심은 언젠가 이웃의 고통이 나의 고통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진 것을 적극적으로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선한 사업에 부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한 자가 진정한 부자라고 말합니다(딤전 6:18~19). 

성경은 부자의 기준을 가진 것으로 말하지 않고, 얼마나 나누느냐로 기준을 삼습니다. 내가 나눌 수 있을 때 나누는 만큼 돈의 통제와 지배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만약 나누지 않는다면 나는 물질의 노예가 되어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 먹을 것에 감사한다면 부요한 자일 수 있고, 돈을 많이 가지고 있을지라도 움켜쥐고 나눌 줄 모르는 삶을 산다면 가난한 자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과 더불어 행복을 누리는 삶을 지향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소외되고 고통 받는 연약한 이웃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잊지 않는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은 그 기도를 기쁘게 받으실 줄 믿습니다. 


셋째,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내일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는 기도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염려에서 자유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염려에서 해방되지 못하면 불행합니다. 욕심의 문제를 영적으로 잘 다루지 않으면 염려를 제거할 수 없습니다. 염려가 있으면 믿음의 삶이 불가능합니다. 삶이 주눅 들어 있고, 물질에 대한 염려에 사로잡혀 나누는 삶이 불가능합니다. 염려는 내 삶의 책임을 자신이 지고자 할 때 찾아옵니다. 그러나 신자가 가지는 축복은 염려가 없는 삶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공급에 대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돈이라고 하는 것은 늘 돌고 도는 것입니다. 돌고 도는 것을 끊임없이 쫓아가다 보니 도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진 물질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놓치면, 물질이 사라질 때 삶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은 언제나 불안정한 삶을 살게 됩니다. 돈이나 재산이 좀 있다 해도 하나님께 매일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태도를 잃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베풀어주셔서 살아갑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나를 먹이셨습니다.”라는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물질이 많거나 적거나 우리의 초점은 물질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공급을 신뢰하고 그 신뢰가 깊어져 갈 때 돈이 있든지 없든지 늘 안정된 삶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물질은 불안정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는 공급자가 되십니다. 어떤 경우에는 믿음 생활에 문제가 없고, 기도를 열심히 해도 물질 문제가 당장 풀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하나님이 내 영혼을 더욱 정결하게 하셔서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시고,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끈을 놓지 않고, 순수한 신앙을 가지게 하셔서 정금같이 빚어내시고, 물질의 궁핍이 아니라면 도무지 얻을 수 없는 믿음의 세계에 대한 비밀을 얻게 하신다면 승리하는 것이고 더욱 축복인 것입니다. 오늘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입니다. 

실제의 삶 속에서 아버지의 공급을 온몸으로 체험하게 될 때, 내 생사가 하나님에게 있으며, 이 땅의 어떤 환경에서도 기죽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이 있는 마태복음 6장 후반부를 보면 주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몇 차례나 강조하십니다. 나는 너희의 아버지이며 너희의 있어야 할 것을 다 안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내일은 우리의 날이 아닙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내일이라는 시간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지금까지 살게 하신 것과 오늘도 나의 삶을 책임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역사하신 하나님이 내일도 역사하실 것이라는 그 신뢰가 내일에 대한 안정감의 근거가 됩니다. 

신앙은 신뢰입니다. 신자가 되었어도 우리는 앞길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만 놓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신뢰를 기뻐하시고, 우리의 앞길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신뢰하는 만큼 주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지시며 내가 모든 것을 내어 맡길 때 염려는 떠나게 됩니다. 오늘 그런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신뢰가 흔들리면 불안, 초조, 두려움과 긴장으로 매일 불안합니다. 

염려 없는 삶이 가능할까요? 오늘 주기도문에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삶을 살며, 오늘 나에게 주신 것을 누리고 감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먹을 양식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염려는 초점을 잘못 맞출 때 찾아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하는 의식주에 관심을 집중시키면 당장 염려가 찾아옵니다. 무엇을 많이 쌓아놓으면 염려가 없어질까요? 

오늘날 돈을 쌓아두고도 수많은 사람이 강박증 불안증 같은 정신불안증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신뢰해야 할 것을 신뢰하지 않고 엉뚱한 것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안하니까 더 움켜쥐고, 움켜쥘수록 더 불안해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것이 초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우리의 관심이 오늘의 필요에 급급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심을 완전히 옮겨 그분에게 초점을 맞추고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책임지시고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결국 염려는 초점의 싸움입니다. 누구에게 초점을 맞출 것인가, 무엇이 아니라 누구를 바라고 믿고 살아갈 것인가, 여기에 우리의 성패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6장 33절의 말씀은 권면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물질의 염려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얼마나 멋진 삶을 사는지 모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자신감이 없고, 옹색하고 신통치 않게 살아가는 이유는 물질의 문제로부터 자유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기도에서 물질의 염려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삶이 풍성해지고 자존감이 높아지고 환경에 주눅 들지 않고 내적 자신감이 용솟음쳐서 주님이 맡기시는 일에 올인하게 됩니다. 염려는 우리 삶의 에너지를 방출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 염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은혜를 얻기를 바랍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만을 의지하기 바랍니다. 욕망을 나눔으로 극복하고, 나보다 공동체를 귀중히 여기고, 오늘 나에게 주신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염려로부터 자유하여 복 되고 풍성한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규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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