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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약속과 율법 (갈 3: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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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과 율법 (갈 3:15-22)


"숲은 보되 나무를 보지 못한다."라는 말과 "나무를 보되 숲은 보지 못한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전자는 전체만을 대충 훑어보고 상세한 내용을 보지 못하는 경우를 가리키며, 후자는 그 반대로 부분적인 사항들만 알고 전체는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비유입니다.
사람이 전체를 총괄적으로도 이해할 줄 알고 또한 부분을 세밀하게 관찰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은 비단 세상사에만 적용되는 원리는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신자들이 성경 말씀을 읽고 그 뜻을 바로 깨닫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당시 유대주의자들이 성경을 해석하면서 바로 이 점에 있어서 크게 잘못을 저지르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유대주의자 즉 율법주의자들은 성경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문가라고 자타가 공인하고 있었지만, 사실에 있어서 그들은 성경의 전체 주제가 무엇인지도 바로 깨닫지 못했으며 그 결과 성경의 한 절 한 절 속에 들어 있는 참된 의미도 전혀 곡해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15절부터 22절까지의 본문 말씀에 보면 "약속"이라는 말과 "율법"이라는 말이 여러 차례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두 단어들 속에 포함된 의미들을 대조적으로 설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사람에게 일러주시는 말씀의 '숲'과 '나무'가 무엇인지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이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과연 우리가 성경 말씀을 통하여 제대로 깨달아야 할 '주제'와 '내용'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경의 숲'은 바로 '죄인을 위해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구속역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성경 말씀에 나오는 '약속'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이 '숲'을 볼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15절부터 18절에 "15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7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구약 성경을 대할 때 오직 '율법'이라는 나무 하나만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율법, 그 나무 한 그루를 두고 그것이 마치 구약성경 전체의 핵심인양 곡해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나무는 보되 숲은 보지 못한' 대표적인 경우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근시안적인 시야를 지적하면서, 성경에는 '율법'이라는 단어나 나타나기 훨씬 전에 "약속"이라는 실로 중요한 말씀이 먼저 기록되어 있었음을 여기서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약속'을 가리켜 성경에서는 "언약"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으며 바로 본문 15절과 17절에서도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이 구약의 핵심이라고 보았던 '율법'은 모세 시대에 주어진 것이지만, 이 '언약'은 사도 바울이 지적하듯이 그보다 훨씬 이전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언약'이라는 단어는 원래 무슨 개인적인 약속이나 사업상의 계약을 두고 쓰인 말이 아니라 바로 오늘날의 '유언'에 해당되는 말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헬라 사회에서도 어떤 개인이 작성하고 공증하여 남긴 유언은 그 어떤 경우에도 무효화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일부분을 수정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바로 본문 15절에서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지 못하느니라"고 사도 바울이 말하는 사실이 그 당시의 사회적인 통례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물론 하나님의 약속하신 언약의 불변성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주셨던" 그 변치 못할 약속이란 것이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부터 그에게 '큰 민족과 땅'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직접적으로는 가나안 땅과 거기서 이루어진 이스라엘 민족국가를 통해 성취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 약속이 거기에서 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가나안에 세워진 이스라엘이라는 단일민족 국가로서는 다 성취될 수 없는 약속임이 분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자손'과 '땅'이란 것은 궁극적으로 모든 '영적 선민'과 그들을 통해 이루어질 '영적 왕국'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뒤에 오고 올 수많은 택자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심으로써 완전히 성취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16절에서 사도 바울이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고 복수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고 단수를 쓰심으로써 장차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그 약속의 완성자로 예언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언약' 즉 '유언처럼 아무도 폐할 수 없는 약속'을 통해 택자에게 주어진 구원이라는 "유업"은 결코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했습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으로서 율법보다 "사백삼십 년" 전에 이미 주신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결국 결론적으로 사람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신" 것일 따름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무조건적으로 거저 주신 선물일 뿐인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오직 '율법'밖에 볼 줄 몰랐던 유대주의자들은 이런 깊고도 넓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도저히 이해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저 율법이라는 '나무' 한 그루만을 이리저리 재어 보고 달아 보다가 그들은 결국 '사람은 선행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라는, 성경에는 전혀 없는 이행득구의 이단 교리를 만들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구약을 '모세의 율법'이라는 색안경을 끼고서 보지 않고,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나타나고 있는 '아브라함과의 언약'과 바로 그 '약속'을 따라 장차 메시아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던 것이었습니다.
곧 성경 말씀의 '숲' 즉 전체 주제는 결코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언약' 즉 '자기 백성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시는 구속사'에 있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 성경을 대할 때에 마치 '길 없는 정글'과 같이 모든 것이 뒤엉켜져 있는 것처럼 오해합니다.
신구약에 기록되어 있는 방대한 내용들은 서로 상관이 없거나 또는 피차 모순이 되는 '자질구레한 말들의 덤불'로 뒤죽박죽이 된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긴 역사를 두고 기록되어 왔으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기록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성경만큼 뚜렷한 한 가지 주제를 일관성 있게 기록하고 있는 책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천지창조와 인간의 타락을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을 예언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오직 한 가지 주제만을 뚜렷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구속역사'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해 가고 계시는 인간 구원의 '완벽한 종합계획'(master plan)입니다.
여기에 바로 '성경의 통일성'이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성경의 숲'인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로 좁은 시야 즉 자기 시대에만 한정된 눈으로 역사를 판단해 왔습니다.
오늘날의 현대인 역시 21세기에 일어나고 있는 '현재 상황'(current affairs)에만 몰두하며 살고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를 본다고 해 보아야 기껏 냉전 시대를 추억해 보고 컴퓨터 만능 시대를 예고하는 정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들 '역사의 나무 몇 그루'만 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들은 인류 역사의 최초 시발점부터 세상의 종말까지 그 전체를 바로 이 '하나님의 구속사'라는 관점에서 조명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담을 통하여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타락하고 죄악이 이 세상에 관영하게 되었습니다.
그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약속'대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대속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이제 장차 오실 주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영생과 영벌로 심판하실 또 하나의 '하나님의 약속'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이라는 '언약'의 말씀을 통하여 이처럼 명백하게 계시해 주시는 '하나님의 구속역사', 바로 이 '성경의 숲'을 밝히 보고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경의 나무'는 곧 '나 자신이야말로 구원이 꼭 필요한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율법'의 의미를 바로 깨닫게 되면 그 무엇보다도 바로 이 사실부터 제대로 보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로 19절 이하 22절의 말씀에 "19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21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고 기록한 말씀입니다.

'약속'이 '율법'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은, 전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직접 주신 데 반하여 후자는 하나님께서 "천사들로 말미암아" 전해 주셨다는 사실에서도 다시 확인되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 여기서 사도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대로 "그렇다면 율법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이 자연히 따라오게 됩니다.
  
실제로 율법주의자들이 그처럼 사도 바울을 공박하기도 했었습니다.
"만약 바울 당신의 말대로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이라면 도대체 율법은 왜 있는 것이란 말인가? 당신은 아브라함과 그리스도는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당신의 복음 속에서 모세의 율법이란 아예 설 자리도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당신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엄연히 기록되어 있는 율법을 모독하는 자다."라고 대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실로 그들이 보기에는 바울이야말로 "율법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행21:28)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사도 바울이 율법의 필요성 자체를 부인하거나 율법 역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부정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직 그 율법을 잘못 이해하고 엉뚱하게 적용하고 있는 유대주의자들을 비판했을 뿐이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그들이 스스로 가장 정통하다고 자부하고 있던 '율법이라는 나무 한 그루'조차도 사실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이야말로 그 '율법'이 '하나님의 구속역사'라는 큰 '숲'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나무'인지를 정확하게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율법의 기능이 사람에게 '구원의 방법'을 제공해 주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직 '구원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해 주는 데에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절망적인 죄인임을 먼저 인식하게 함으로써 자신은 하나님의 구원이 꼭 필요한 존재임을 알게 해 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본문 19절과 22절에서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사람이)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라고 사도 바울이 일깨워 주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 구절들을 다시 좀 더 쉽게 번역하자면, '율법은 왜 주어졌습니까? 그것은 (사람이) 저지른 죄를 밝혀 주기 위하여 (성경 말씀에) 덧붙여진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비롯한) 모든 것이 죄 아래 갇혀 있다고 증거합니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똑같은 사실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20절에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기록했고, 로마서 4장 15절에서는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고 했으며, 또 로마서 7장 7절에서도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법이 있어야 그 죄상이 뚜렷해지는 원리가 인간 사회에서 뿐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성경이라는 '숲' 속에 율법이라는 '나무' 한 그루를 심어 주심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죄인인 것을 똑똑히 깨닫게 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앤드류 쥬크스(Andrew Jukes)라는 사람은 바로 이 사실을 두고 "사단은 우리 사람이 율법을 사용하여 스스로 거룩한 존재라고 증명하게끔 하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다."라고 아주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율법의 기능과 작용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로지 "약속하신 자손" 즉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중보의 손"을 베풀어 주실 메시아 예수님께서 "오시기까지(만)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율법의 존재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이 그 믿음 안에서 구원받게 될 때까지만 유효한 것이며, 그 후에는 이미 완전히 '죄 사함'을 받은 상태이니 더 이상 효력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베풀어지는 구원이 절실히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함 받는 은혜의 감격을 제대로 깨닫게 해 주기 위하여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먼저 자신이 죄인인 것부터 인식하고 고백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라는 나무'를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반역자이며 신성모독자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고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할 길 없는 완전타락 상태에서 결코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율법'이 우리에게 깨우쳐 주는 이 핵심 즉 '내가 곧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이 사실을 정확하게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가지고 크게는 인류역사 전체를 파악하고 이해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말씀이 바로 나 자신에게부터 적용되는 진리임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범하고 있는 대표적인 과오는 바로 사람의 죄에 대하여 무조건 '부드럽게만' 처리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를 가볍게만 여기는 교인이나 공적인 죄를 적당히 얼버무려 버리는 교회에는 결코 참된 기쁨이나 은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6장 14절에서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라고 경고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율법'을 통하여 자신을 먼저 저울질해 보지 않고는 '약속'의 은혜로운 참 맛을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은 아예 덮어 놓고 신약만 은혜롭다고 가르치는 것은 '비뚤어진 신학'이며 '반신불구의 설교'입니다.
율법은 우회(bypass)해 버리고 곧바로 복음으로 직행하려고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명백히 어긋나는 곁길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인들이 십자가의 대속 복음에 진실로 감사 감격할 줄 모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죄를 책망하면서 동시에 사람은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엄중한 유죄선언을 내리고 있는 '율법'을 현대교회의 목사들이 무시하고 강단에서 삭제합니다.
그 결과 '복음'은 실로 '돼지 앞에 던져진 진주'가 되어 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자신의 더러움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진주의 아름다움을 결코 알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먼저 율법 앞에서 자신을 완전히 벗겨 놓고 자기 모습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은 복음 속에 담긴 '약속의 은혜'를 음미할 도리가 없습니다.
캄캄한 밤하늘이 배경이 되어야만 별빛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나 자신의 죄와 그 받아 마땅한 심판이라는 어두운 배경이 먼저 눈에 들어와야만 그 가운데 빛나는 '계명성'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실로 아름답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의 정죄로 인하여 얻어맞고 찢겨져 있어야 우리는 그 상처를 싸매어 주시는 복음을 간절히 소망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고 죽이려 함을 알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자유의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지옥의 절망감을 먼저 맛보아야만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입고 약속으로 구원받게 되는 은총이 얼마나 귀한 줄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성경의 나무 한 그루가 이처럼 명백히 증거해 주는 사실을 통하여 나 자신이야말로 '약속'의 구원이 꼭 필요한 죄인임을 절실히 깨닫고 솔직히 자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너는 이렇게 할지니라"(You shall...)는 '구원의 조건부'로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셨더라면 우리 중 단 한 명도 구원받을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대신에 율법을 통하여 오직 사람이 스스로 당신 앞에서 겸비하고 낮아질 것과 오직 당신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신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렇게 하리라"(I will...)는 '구원의 약속'을 아무 조건 없이 그냥 일방적으로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기독교는 실로 '사람이 신을 찾는 인본주의 종교'가 아니라 오로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죄인을 불러 구원해 주시는 신본주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사역의 마스터플랜(master plan)의 전체와 및 세부사항까지 우리에게 똑똑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찬 411장)라는 찬송은 원래의 영어 가사에 보면 "Jesus loves me this I know for the Bible tells me so"(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내가 성경을 보고 알 수 있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경이 '말씀해 주시는'(tell) 까닭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해 주려 하시는 것을 비로소 그리고 명백히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저 목사에게 '설교자료'를 제공하기 위해 기록된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신학자들이 세상 문학서적을 대할 때 하는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비평하기 위한 '연구대상'도 아닙니다.
성경은 바로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엡1:11)이 바로 이 신구약 66권을 통하여 이처럼 밝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을 읽고 들으면서도 그 '말씀의 숲과 나무'를 보지 못하는 자야말로 정말 예수님 말씀 그대로 '본다고 하지만 실은 소경'(요9:39)에 불과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크신 구원 역사를 한 눈에 보게 합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나 자신이 바로 그 구원이 꼭 필요한 죄인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기록된 '약속'과 '율법'을 통하여 이 귀한 구원의 진리를 깨닫고 그 믿음에 거하며 그 복음을 전파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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