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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저들에게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행 2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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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에게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행 22:1-11)


크리스찬 유머 퀴즈 가운데 이런 퀴즈가 있습니다.  인류 최초의 남자인 아담이 최초의 여성인 하와에게 건넨 최초의 말은 무엇일까요?  최초의 남자가 최초의 여성인 하와에게 건넨 말이 어떤 말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정답은 이것입니다.
"하와 유"(How are you?)
아직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와가 어떻게 대답을 했을 것 같습니까?  "하와 유"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어쩌면 아담과 하와는 충청도 출신이 아니었는가 싶습니다.  "하와 유"  나이가 들어갈수록 깨닫는 속도도 느립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신 분은 집에 가셔서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옆에 있는 사람을 쳐다보시면서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하와 유"(How are you?)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영적 상태는 어떠하십니까?  How are you?  평안하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절망 가운데 있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찾아오셔서 하신 첫 말씀이 평안이었습니다.  "평안하냐?"  사랑하는 여러분, 한 주간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성령 충만함의 증거가 무엇이냐?" 라고 했을 때 어떤 기적적인 현상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성령이 임하시면 무엇보다 그 마음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도저히 평안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마음은 평안함을 누리게 됩니다.  사방에서 우겨쌈을 당하여도 그 마음은 평안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이 주시는 요동하지 않는 참된 평안이 여러분의 심령에 가득히 임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면 그 다음에는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주의 성령이 임하시면 마음이 상한 자가 고침을 받습니다.  포로된 자가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갇힌 자가 놓임을 선포하게 됩니다.  오늘 이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도 일어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에 눈을 뜨십시오.  믿음에 대한 눈을 뜨면 우리의 삶은 훨씬 더 행복해질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이 풍요와 행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이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믿음을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이 처한 환경을 보고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겨자씨 만한 믿음을 보고 축복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약속하기를 확실한 믿음에만 보상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믿음이 바로 서면 환경이 변합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생명이라도 믿음만 들어가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믿음이 있으면 창조적인 사람이 되고, 믿음이 있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믿음이 있으면 구부러진 생활이 바로 됩니다.  절망적인 환경이 소망으로 변합니다.  결국 바로 선 믿음만이 삶의 태도를 변화시킵니다.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과 대화 할 수 있고,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믿음 생활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십시오.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축복하심을 보여주십시오.  여러분들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그 믿음의 내용을 저들에게도 보여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 간증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 그리고 믿고 난 이후에 나는 어떤 변화를 받았는지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신앙은 과거에 얽매여 있는 박물관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미래를 향한 현재 진행형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변화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변화된 삶을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들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다면 죄송한 말씀이지만 자신의 신앙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정말로 예수를 바로 믿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종교인으로서 그저 흉내만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는지, 그리고 예수를 만나서 그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본문에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 9장과 22장, 그리고 26장, 세 곳에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똑같은 간증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사건이 자신에게 있어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이 사건을 세 번 기록했지만, 그러나 솔직히 사도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면서 이 사건을 세 번만 이야기했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사울이 바울이 되고, 바울이 대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다메섹의 경험이었다고 한다면 그는 평생을 두고 이 이야기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해 봅니다.  결국 여기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중심 되는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변화된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된 삶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끊임없이 자신의 변화된 삶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아름답게 변화된 삶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변화된 삶이라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두고두고 우리의 자녀들과 가족들에게 들려주어야 할 이야기는 어떤 내용이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보여주어야 합니까?

첫째로, 우리는 저들에게 체험적이고 구체적으로 변화된 삶의 내용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이론적으로 만나려고 하지 마십시오.  철학적으로 만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역사 속에 계셨던 그분으로만 만나려고 하지도 마십시오.  그런 사람에게는 변화된 삶의 내용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오직 입만 살아서 움직입니다.  그런 사람은 끊임없이 사변적이고 논쟁하기를 좋아합니다.  시비를 걸고 따지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적으로 만난 사람은 그의 삶이 구체적으로 변합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2000년 전에 계셨던 분이 아니라 오늘 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역사하고 계시는 분으로 만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믿은 이후의 구체적으로 변화된 삶을 저들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오늘 본문의 상황을 먼저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지금 자신을 죽이려고 결심하고 모인 폭도들 앞에 서 있습니다.  저들이 언제 어떤 모양으로 돌변하게 될는지 알 수 없는 긴박한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저들을 향해서 '부형들아!'라고 부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Brothers and fathers"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지금 최상의 존칭어를 사용해서 저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왜 불렀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변화된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 3절의 말씀입니다.  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군중들에게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자신은 태어나면서부터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도 전에는 당신들보다 조금도 뒤지지 않는 열렬한 율법주의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율법이 금하는 모든 것을 지키는데 열심이었고, 율법이 명하는 모든 일을 행하는데 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스스로 자신을 가리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는 완전무결하고 철저한 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런데 과거의 그는 여기에서 그친 것이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도 기독교를 철저하게 박해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어느 정도로 기독교를 박해했는가?  본문 4절에서 그는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예수를 믿기 이전의 사도 바울은 기독교에 대한 무서운 박해자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잡아서 옥에 넘겼습니다.  심지어는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죽이기까지 했다고 스스로 고백합니다.  바울은 스데반 집사를 죽일 때 우두머리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바울에 대하여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9장 1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다"라고 말입니다.

그는 그렇게 교회와 성도들에게 최대의 박해자였습니다.  훼방자였습니다.  파괴자였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당신들이 지금 내가 예수 믿는다고 핍박하고 있습니까?  과거에 나는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당신들 보다 훨씬 더 심했습니다."
"당신들이 예수를 핍박했습니까?  과거에는 나도 당신들 못지 않게 예수를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자신을 박해하고 죽이려고 하는 군중들을 향해서 이 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사도 바울은 청중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들보다 훨씬 더 지독한 핍박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들이 지금 나를 이렇게 죽이려고 하는 심정을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덧붙여서 내가 이렇게 변할 수밖에 없었던 궁극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이유를 들어보라는 것입니다.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였던 자신이 지금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가면서 이방인의 사도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

과거에 자신도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그것이 잘못된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메섹에서 한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나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가 바로 부활의 주님이었습니다.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의 나를 나되게 했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나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저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지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식에 있어서라면 누가 사도 바울을 따라 가겠습니까?  지식이라면 그 당시의 철학을 통달했던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지식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체험이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그는 하나님을 학문적으로만 알았습니다.  철학적으로만 알았습니다.  어릴 때 부모 밑에서 종교 생활하면서 종교적으로만 하나님을 알아왔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나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나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 나 같은 것이 무엇이관대 나를 이토록이나 사랑하시는지….  이 예수를 만나고 난 이후에 이제 나는 그분을 위해 살 수만 있다면 나의 생명은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교회 안에는 수많은 교인들이 하나님을 압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변화된 삶의 내용이 없습니다.  이론적으로는 누구 못지 않게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적인 신앙이 없습니다.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를 도와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경험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변화된 삶이 없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수님과의 직접적인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이 한 번의 만남이 사울이 바울 되게 했다고 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깊이 만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2000년 전, 핍박자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그는 거꾸러지면서 이렇게 묻습니다.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질문은 오늘 우리들이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2000년 전에 돌아가셔서 지금까지 무덤에 계신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주님은 살아 계실 뿐만 아니라 그의 영이신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당신에게도 동일하게 이 물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인격적이고 직접적인 관계로 이어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매일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순간 순간마다 주님과 함께 동행해야 합니다.  오늘 저는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뜨겁게 만났던 그 예수님을 여러분도 만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십시오.

저는 여러분들이 이론적인 예수 그리스도에 머물지 않았으면 합니다.  머리 속에 계시는 관념적인 예수 그리스도가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능력이십니다.  그분을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가 위대한 사명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분을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가 희망과 감격을 안고 살아갔습니다.  그분을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가 세상 속에서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뜨거운 영적 체험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 때문에 내 삶이 이렇게 변했노라고 그 변화된 구체적인 삶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형제 자매를 사랑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절망이 희망으로 변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저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변화된 삶의 모습을 보고 싶어합니다.

간혹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 누구는 어떻게 변했고, 어느 누구는 어떤 축복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제 속으로는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러면 당신은?  그리고 나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삶이 변화되었다고 한다면, 오늘 당신은 어떻습니까?  누구는 예수 잘 믿어서 복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예수를 믿어서 어떤 복을 받았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 보면 남이 잘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팔자 타령이나 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팔자 타령을 하는 줄 아십니까?  남이 잘되고 나는 못되니까 팔자 타령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믿음의 사람은 팔자 타령하는 사람이 아니라 팔자를 고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됩니다.  

예수를 만나면 내 인생이 변화됩니다.  예수를 만나면 내 팔자가 바뀝니다.  예수를 만나면 내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만나면 내 마음의 아픈 상처도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  심령의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를 하지 마십시오.  남이 변화된 삶을 이야기하지 말고 내가 변화된 삶을 이야기하십시오.  다른 사람이 받은 복을 이야기하지 말고 내가 받은 복을 이야기하십시오.  이것이 예수를 만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만나 복된 자로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모름지기 간증이라는 것은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말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우리 언양영신교회 가족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적인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남의 교회가 잘된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섬기는 내 교회가 잘되고 복 받은 이야기를 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저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저들에게 무엇을 보여줄 것입니까?

둘째로, 우리는 저들에게 우리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자신의 사명자 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바울이 놀라서 묻습니다.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예수님으로부터 이 말을 들었던 사도 바울이 무어라고 말합니까?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누구나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다 따르겠습니다.  잘못된 생활 습관을 바로 잡으라고 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술을 끊으라 하시면 술을 끊겠습니다.  담배를 끊으라고 하시면 그것도 끊겠습니다.  주님, 말씀하옵소서.  이 종이 듣겠나이다.  나를 주님의 사명자로 세워 주옵소서."  주님께서 내게 주신 나의 사명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위해 사십시오.

오늘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문제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예수님을 만났던 이야기만 합니다.  옛날에는 나도 예수님을 만났었고, 헌신도 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삶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비극입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 된 자의 삶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만난 이후의 삶의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변화된 내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부형들이여! 내 이야기를 들으시오.  내가 예수님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내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내 가치관이 바뀌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바뀐 삶의 이야기들이 있습니까?  예수를 만나서 내 가정이 달라졌습니다.  내 개인 생활이 달라졌습니다.  직장에서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내 취미가 바뀌었습니다.  우리를 바라보는 세상 불신의 사람들에게 예수를 만난 후에 변화된 삶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그래서 망령된 행실을 다 끊어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변화를 받아 새 사람이 된 그 모습을 저들에게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초대 교회 역사를 보면,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자신의 전 존재를 던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무엇을 하면서 일생을 살아야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되는대로 살아야 할 인생이 아닙니다.  생각나는 대로, 아니면 죄악된 세상과 어울려서 의미 없이 살 인생도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마음도 변하고, 생각도 변해야 합니다.  그분 때문에 습관도 변하고, 친구도 변해야 합니다.  주님 때문에 가던 길도 변하고, 취미도 변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명적인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저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지금 바울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오늘 내가 있는 것은 내 인격이 아니고, 내 지식도 아니며, 내 철학도 아니다.  나는 본래 너희들과 같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바뀌었다.  그것은 예수 때문이다.  예수의 은혜, 예수의 복음, 예수의 능력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오늘 여기에 서 있는 것이다.  그는 지금 예수를 만난 이후에 변화된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저들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바로 사명적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내가 예수를 믿고 내 삶이 변화된 것을 내 식구들이 압니까?  내 친구들이 압니까?  내 이웃이 압니까?  바울처럼 급격하고 현저한 변화는 아니라고 해도 내 마음속에 정말 주님께서 자신을 새롭게 하셨다는 진실한 고백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계속되어지는 변화된 삶의 모습이 있습니까?  그들에게 보여 줄 이야기, 당신의 가정에서 생긴 놀라운 변화의 이야기를 가지고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내 인생관과 내 마음을 바꿔 버렸노라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위해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흑인 오페라 가수 가운데 유명한 제시 놀만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아프리카의 대통령이었던 만델라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던 그 다음 주간에 영국 런던의 웸블리 스테이덤에서는 만델라의 대통령 취임을 축하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음악 공연회가 열린 일이 있었습니다.

하루 온종일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영국을 비롯한 전세계의 록 밴드들과 록 가수들이 모여서 온종일 광란의 축제를 벌였습니다.  거의 7만에 가까운 군중들이 모여 만델라의 취임과 아프리카 흑인들의 해방을 축복하고 축하하면서 광란의 노래들과 춤을 추면서 하루 온종일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었습니다.  해가 졌습니다.  어둠이 짙어갈 무렵 이 콘서트의 마지막 주자로서 제시 놀만이 올라섰습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무대에 올라선 제시 놀만은 무대에서 한동안 그냥 그대로 서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노래가 시작되었습니다.  제시 놀만은 반주도 없이 아카펠라로 자신의 목소리만을 사용해서 단순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그 노래는 찬송가였습니다.  노예들을 사고 팔던 노예 상인 한 사람이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과거의 죄악을 회개하고 노예들의 해방을 위해서 일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했던 존 뉴턴이라는 사람이 작사한 찬송가 'amazing grace'를 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장내는 숨소리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해 졌습니다.  3절이 시작되자 잊어버려졌던 이 오래된 노래를 여기 저기서 따라 부르는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껏 내가 산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 하리라."

찬양이 끝났을 때 박수 소리 대신에 사람들은 침묵 속에 잠겨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상한 정적 속에 사람들은 빠져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여기 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한동안 그렇게 어둠 속에서 이 노래를 통해 선포되어진 메시지를 가슴에 안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튿날 한 신문의 기사에는 이런 놀라운 기사가 실렸다고 합니다.  "어젯밤 웸블리 스테이덤에는 하나님의 신이 임하셨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 적지 않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참으로 오래간만에 교회로 향했다고 합니다.  이 여인의 노래 속에 증거된 메시지에서 어둠 속에 죽어 있던 사람들에게 새생명을 허락하신 놀라우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병들었고 상처받았고 마음속이 무거웠던 사람들을 만지고 치료하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들에게도 주를 만나서 변화된 놀라운 은혜의 노래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둠을 뒤로하고 빛을 향해 새롭게 일어서는 결단의 모습을 이웃과 형제들에게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붙잡고 저 영원한 천국을 향해 순례자의 걸음을 중단 없이 힘차게 걸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로 변화된 내 삶을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주 앞에서 노래하십시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저들에게 보여주십시오.  그래서 저들로 하여금 주 앞에서 거룩한 결단의 삶을 할 수 있도록 증거된 사명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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