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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요 11:4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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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요 11:45-57)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45-46)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47-48)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49-52)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53-54)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그들이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요11:55-57)


나사로 부활에 대한 두 가지 반응

나사로 부활의 엄청난 이적을 보면서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45-46) 
  
첫째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의 손으로 묶어서 무덤에 넣고, 자신들의 손으로 무덤 문을 닫았던 나사로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 나사로가 무덤에서 일어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자기들의 손으로 묶었던 나사로의 얼굴을 다시 풀고 마주 보았습니다. 이 놀라운 장면 앞에서 목석처럼 서 있을 사람은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였습니다. 일찍이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예수께서는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병’이라고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그리고 무덤 앞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나사로를 살리는 것은 이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 말씀대로 많은 사람들이 나사로 부활을 보면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표적을 보고 믿는 믿음은 초보적인 믿음입니다. 그러나 어쨌든지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축복이며 감사한 일입니다.
  
둘째로, 그런 중에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오늘 말씀의 상당 부분은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들 얘깁니다.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알리니라”(46) 누가복음 16:31에서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믿지 않는 자들은 죽은 자가 살아나서 권한다 해도 듣지 않으리라. 죽은 사람이 살아나서 전하는데 믿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바로 오늘 말씀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나사로가 살아나는 장면을 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었는데, 그 중에 일부의 사람들이 믿지 않고 바리새인들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예수의 대적자들에게 최신 뉴스를 전하기 위해서!
  
여러분! 믿을 사람은 무슨 의심할만한 사건이 벌어져도 믿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을 사람은 제아무리 큰 증거를 대어도 믿지 않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 우리가 예수를 부인하지 않고 구주로 믿게 된 것이 기적이며 감사한 일 아닙니까? 확실히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면 불신자들은 도대체 나사로 사건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비상 공회가 소집되다

나사로 부활을 전해 듣고 비상 공회가 소집됐습니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47) 47절 말씀에서 공회라는 단어가 단수로(συνεδριον, a sanhedrin)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약 전체를 통해서 공회란 말이 정관사 없이 단수로 표기된 곳은 이곳 한 곳뿐입니다. 아마 전체가 모이지 못한 비공식적인 공회이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한 것으로 봅니다. 이들이 얼마나 다급했으면 비상적인 공회에서 예수 사건을 논의했겠습니까?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예수에 대해서 어떤 위기감을 느꼈을까요? 48절에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47-48) 

이들이 걱정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예수를 그냥 놔둔다면 결국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을 것이다. 둘째로, 그렇게 되면 자기들의 땅과 백성도 빼앗기리라. 얼핏 보면 “우리 땅과 백성”이라고 한 말이 애국적인 언사(言辭)로 들립니다. 그러나 결코 애국 애족적인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그들이 말한 ‘우리 땅’이란 가나안 전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정 장소(tovpo" :place)를 가리키는 말로, 예루살렘이나 성전 지역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어떤 성경에는 이 말을 ‘성전’이라고 번역했고(현대인의 성경,NEB), 어떤 성경에는 ‘거룩한 곳’이라고 번역했습니다.(공동번역,NIV) 공회원들이 걱정한 것은 전 국토가 아닙니다. 바로 자기들의 활동 무대였던 예루살렘 지역과 성전 지역입니다. 거기에는 그들의 많은 이권(利權)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표면상 백성을 거론했지만, 실제로는 백성들의 삶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비상 공회를 주도한 계층은 사두개인들입니다. 4복음서를 보면 고난 주간에 흥미 있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3년 6개월 동안 전도 활동을 하시면서 항상 부딪친 세력은 주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런데 예수 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 고난 주간에는 바리새인 보다는 사두개인들이 예수 배척에 앞장섰습니다. 사두개인들이 누구입니까? 

저는 처음 교회 나와서 사두개인이란 말을 듣고 대가리가 네 개 달린 개들인 줄 알았습니다. 주로 개 같은 짓만 했잖아요? 사두개인들이란 예수님 당시에 제사장 계급들입니다. 이들은 자칭 다윗 시대 제사장 “사독”의 후예라 해서 “사두개”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장악하고 많은 이권을 챙겼습니다. 바리새파가 서민을 기반으로 해서 활동한 반면, 사두개인들은 지배층을 형성하고 성전을 무대로 활동했습니다. 

로마에는 아첨하고 자기 백성에게는 군림하던 것이 바로 사두개인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백성들을 염려할 리 없습니다. 그들이 염려하는 것이 있다면 오로지, 자기들의 收入源이요 활동 무대인 성전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에게 위기를 느낀 것은 백성들의 위기가 아니라 특권층 사두개파의 지도권에 대한 위기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예수가 성전에 나타나서 제물 파는 상과 의자를 다 뒤집어엎었습니다. 매매하던 사람들을 채찍질해서 다 내 쫓아 버렸습니다. 그런가 하면 날마다 엄청난 이적을 행하여 많은 사람이 따라갑니다. 거기에 죽은 나사로까지 살려 놨으니 얼마나 자기들의 입장이 걱정이 됐겠습니까? 로마 사람에게 제사장직을 빼앗기는 것은 고사하고, 성전 전체의 지배권을 내어 놓아야 될 판입니다.  그야말로 사두개파의 위기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 회의에서 무엇을 결정하려고 했을까요? 47에 보면,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고 묻습니다. 예수가 나타나서 많은 이적들을 행합니다.(is doing many signs) 반대자들도 어쩔 수 없는 커다란 이적들입니다. 그들로서는 정말 대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되느냐’고 묻지 않고, 다만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자신들이 취해야 될 ‘책임’을 찾는 會議가 아니라, 오로지 예수를 ‘대항하기 위한 대책’을 찾는 會議를 연 것입니다. 소위 말한다면 ‘예수 배척 대책 회의’입니다.


가야바가 내린 정치적 판단

비상 공회는 가야바의 발언과 결론으로 매듭지어집니다.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49) 가야바가 누구일까요? 본문은 가야바를 ‘그 해의 대제사장’이라고 소개합니다. 대제사장이면 종신직인데 ‘그 해의’ 대제사장이란 무슨 뜻일까요? 원래 대제사장은 종신직입니다. 

그런데 로마 정부는 유대 땅을 지배하면서 정치적 동기에서 여러 차례 제사장들을 강제로 갈아치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도 전직 제사장들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가야바란 인물은 A.D.18-36까지 약 18년 동안 대제사장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가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알 수 없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도 요한이 ‘그해의 제사장’이라고 소개한 것은 아마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던 ‘바로 그해’의 제사장이라는 뜻일 겁니다. 

가야바는 상당히 오만하고 거친 사람이었습니다. 49절의 말씀에 보면 공적인 회의석상에서, ‘너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하면서 공회원들을 무시하는 발언을 합니다. 대부분의 사두개인들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백성 위에 군림하고 자기들의 지위에 연연하는 부류. 로마에는 아첨하고 약자에게는 거들먹거리는 자들. 가야바는 이런 부류의 대표자였습니다.
  
그러면 가야바가 행한 발언을 봅시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50) 가야바의 말은 아주 정치적입니다. 그는 신앙인도 종교인도 아닌 정치꾼으로서 발언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정치적인가?  
  
첫째로, 그는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치 않고 있습니다. 예수가 옳은 사람인가, 그른 사람인가를 묻지 않습니다. 예수가 메시야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도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가 행한 이적이 진실이냐 아니냐도 묻지 않습니다. 다만 무식하게 한 가지만 얘기합니다. “예수만 죽이면 만사는 해결이다!” 예수만 제거해 버리면 그 추종자들도 없어질 것이고, 정치적인 소요(騷擾)도 없을 것이고, 종교적 문제도 없어진다!  이것은 신앙인의 말이 아니라 정치꾼의 말입니다. 

정치는 야누스적입니다. 표리부동합니다. 마키야벨리즘이 지배합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습니다.  도덕이나 윤리를 표방하지만 결코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이지는 않습니다. 단 한 사람의 의견이라도 옳다면 따르는 것이 도덕이요 윤리인데, 정치란 99명의 이권을 위해 옳건 그르건 상관 않고 정의로운 한 사람을 죽여버립니다. 하나님은 99명을 놔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으십니다.  그러나 정치적 입장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다수의 여론을 따라 사람의 생명을 흥정합니다. 

요즘 우리나라 정치 보세요. 항상 국가와 국민을 들먹이지만 실제로 국가와 국민에게 유익된 결정이나 조치들은 별로 행하지 않습니다. 가야바의 신분은 제사장입니다. 그러나 그는 철저한 정치꾼입니다. 본래 사두개파는 부활도 내세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에게는 예수가 메시아이든, 하나님의 아들이든, 랍비이든 상관이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에 대한 정치적 판단만 있을 뿐입니다.  
  
둘째로, 가야바의 거짓 논증입니다. 그의 말대로 예수를 죽여야 될 만큼 심각한 문제가 있었을까요? 예수를 죽이지 않고 놔두면 과연 사회가 문란해지고 로마 군대가 개입하는 사태가 벌어졌을까요? 예수만 죽이면 추종자는 사라질까요?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로마가 식민지에 대해서 가진 기본 정책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세금 거두는 것이고, 둘째는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 정부가 치안 유지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로마 군대가 종교적 문제 때문에 개입한 사례는 거의 없습니다. 백성들이 바리새파를 따르든지, 사두개파를 따르든지, 예수를 따르든지 로마는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도 로마 정부를 뒤집어엎겠다고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리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땅에 있지 않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재판하면서, 이 사건은 순전히 너희들의 종교적 문제이니 너희 스스로 해결하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가야바가 한 말은 과장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를 죽이지 않아도 되는데 꼭 죽이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가야바가 정치적으로 자기들의 추종 세력을 잃을까봐 택한 술수입니다. 가야바의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 거짓임이 판명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예수의 추종 세력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사도들은 공개적으로 목숨을 걸고 예수를 전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만도 하루에 삼천 명씩 오천 명씩 그리스도인이 생겼습니다. 예수를 믿는 세력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백성들이 로마 군대에 죽게 되기는커녕, 오히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찌 됐든지 가야바의 말은 비상 공회의 결의 사항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예수를 죽여야만 한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요즘도 정치적인 이유에서 예수를 제거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문에 동요가 오니까, 전통에 금이 가니까, 내 생활에 변화가 오니까, 인간관계가 바뀌니까! 예수를 믿으면 많은 것이 바뀌어야만 된다는 사실 때문에 예수를 배척합니다. 예수를 제거하면 문제가 해결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제거 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가야바나 공회원들이 제아무리 예수를 배척했어도 예수님의 구원 역사는 이루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이 제아무리 예수를 못 박으라고 외쳤어도 예수님은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로마 제국에서 예수를 제거하려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로마는 기독교 국가가 됐습니다. 한국 땅에서 예수를 제거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의 목을 베었어도 이 땅에 예수님은 기어코 오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제아무리 예수를 제거하려고 해도 예수는 제거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배척자들 속에서도 구원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야바 같은 정치적 판단자가 되지 마시고 신앙적인 판단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이 죽으면 모든 백성이 산다

  가야바의 발언이 무식한 정치꾼의 말에 불과했을지라도, 그가 한 말은 곧 예언이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해석을 붙입니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51-52) 

하나님은 종종 제사장의 입을 통해서 예언을 주셨습니다. 신기한 것은 말하는 사람 자신도 모르는 예언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그래요. 가야바 자신은 무조건 예수만 죽이면 백성이 산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는 중대한 예언이 됐습니다.  
  
첫째로, 예수가 죽으면 다른 사람이 산다는 의미입니다. 가야바는 예수를 죽이면 자기 민족이 로마 군대의 칼에서 살아난다는 의미로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과 죽음에서 살아난다는 의미로 받아 들였습니다. 가야바는 단순히 정치적으로 예수를 제거하는 것을 의미했으나, 요한은 종교적으로 인류를 대신하여 죽으시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야바의 입으로 복음 진리를 말하게 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죽음으로 살아나는 대상입니다. 50절에서, 가야바는 예수가 죽으면 백성이 살고 민족이 산다고 했습니다. ‘백성’(laov")이라는 말과, ‘민족’(e[qno")이라는 말은 의미상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laov" (라 오 스 ) 란 말은 주로 하나님의 백성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 말이고, e[qno"(에트노스)라는 말은 복수 형태로 사용하여 이방 종족들을 의미했습니다. 가야바는 이 두 단어를 모두 유대 민족을 지칭하는데 사용했습니다. 

즉, 예수를 죽이면 유대 민족이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가야바의 말 중에서 laov" 라는 말을 제외하고  e[qno"란  단어를 인용합니다. 가야바는 예수가 죽으면 유대인들이 죽음을 면한다고 했는데, 요한은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전 인류가 살 것으로 해석합니다. 

52절에 보면 세상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러나 이제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있습니다. 바로 전 세계에서 예수를 구주로 믿는 성도들입니다. 이들은 국경과 인종과 언어를 초월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룰 것입니다.  
  
“한 사람이 죽으면 모든 백성들이 산다!” 이것은 오늘 말씀의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가야바는 예수를 죽이자고 했고 그의 결정대로 예수님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죽음 때문에 오늘 우리는 영원한 죽음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6:17-19)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6:8-10)


유월절에 예수는 등장할 것인가?

공회의 결의는 즉시 온 예루살렘에 선포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소재를 아는 자는 신고하라!” 그래서 예수님은 두어 달 동안 예루살렘을 떠나 에브라임이란 곳으로 피신 하셨습니다.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53-54) 

에브라임은 예루살렘에서 15마일 떨어진 오르바(대하13:19)란 곳인데, 오늘날 EL TAYIBEH라고 부르는 곳으로 추측됩니다. 예수께서 멀찍이 피하신 것은 공회원들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서 다른 곳에서 사역을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에브라임에 계신 동안에 유월절이 다가 왔습니다. 이것은 요한이 기록하고 있는 공생애 세 번째의 유월절입니다.(2:13,6:4) 요한은 예수님 공생애에 지키신 유월절을 해마다 언급합니다. 유월절과 예수님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유월절은 과거 애굽에서 구원받았던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구원자로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인도해 내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애굽의 파라오는 이스라엘을 놓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애굽에 열 가지의 재앙을 차례로 내리셨습니다.

그 마지막 재앙은 장자심판이었습니다. 애굽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물론 짐승까지도 장자는 모조리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죽음이 임하기 전날 밤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집 안에 머물러 있으라. 과연 그날 밤에 어린 양의 피가 묻어 있는 이스라엘의 집에는 죽음이 다 지나쳐버렸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장자들은 모조리 죽었습니다. 파라오의 아들까지!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마침내 해방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가장 큰 명절로 지켰습니다. ‘逾越’이라는 말은 그냥 통과해버린다, 지나쳐버린다(passover)는 말입니다. 이 유월절 어린 양은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어린 양의 피 때문에 살아난 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때문에 구원 받는 것을 상징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전 세계에서 모여들었습니다. 유월절은 누룩 없는 떡을 먹는 한 주간의 무교절기로 이어지는데, 이 때에 모든 사람들은 한 주간 전부터 몸을 성결케 하기 위해서 미리 예루살렘에 모여들었습니다.(레7:21,민9:6,대하30:17) 예수님은 바로 이 유월절 절기마다 예루살렘 성전에 나타나셔서 의미 있는 일들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과연 체포령이 내린 예루살렘에 다시 나타나실 것인가? 이것이 바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모여든 많은 유대인들의 관심사였습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그들이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55-57) 

56절의 말씀에 보면 유대인들은 예수를 찾았습니다.(kept on seeking) 공회의 명령에 따라서 예수를 고발할 준비를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 대부분은 예수가 다시 나타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데도 다시 나타날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군중들의 말대로 ‘죽음을 당하기 위해서’ 나타나셨습니다. 세상 죄를 짊어진 ‘유월절 어린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가야바 손에 죽으려고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의 손에 죽으시려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가 과연 죽으러 나타날까?”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고 대신 죽으신 위대한 모습으로 서 계십니다.  
  
나사로는 무덤에서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를 향해 죽으러 오십니다. 나사로의 부활과 주님의 죽음! 그것은 바로 서로 교환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 자신은 죽으시고, 무덤 속에 있는 자는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영광의 주님을 마음에 영접하세요. 그리고 그가 주신 생명을 선물로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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