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복되어라, 온유한 사람이여! (마 5:5)

첨부 1


복되어라, 온유한 사람이여! (마 5:5)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더(Alexande, BC 356-323)는 엄청나게 넓은 영토를 점령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20살의 나이에 마케도니아 왕이 되어 33살에 죽을 때까지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어서 통곡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광대한 영토를 점령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부를 때에는 그냥 ‘알렉산더 왕’이라고 부르지 않고, ‘알렉산더 대왕’이라고 부릅니다. 그 알렉산더 대왕과 예수님은 똑같이 33년을 세상에 살았지만, 그들의 삶은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알렉산더는 왕궁에서 태어났지만, 예수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알렉산더는 ‘아버지가 땅을 모두 정복해 버리면 내가 정복할 땅이 없어지지 않느냐’고 염려하며 정복의 야욕을 품으며 자랐고 예수는 목수의 아들로 대패질을 배우면서 자라셨습니다.
알렉산더는 왕으로 영광의 바벨론에서 죽었지만, 예수님은 갈보리산 십자가 위에서 죄수로 죽으셨습니다. 
알렉산더는 수백만 명의 사람을 죽였지만, 예수님은 수없이 많은 사람을 살려내셨습니다. 
알렉산더는 수많은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었지만,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알렉산더는 수없이 많은 나라들과 왕좌를 정복했지만, 예수님은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알렉산더는 역사를 만들었지만, 예수님은 역사를 변화시키셨습니다.

여러분, 객관적으로 볼 때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훨씬 더 성공한 사람이고,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에게 그렇지 않음을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 반도를 점령하고, 당시 세계 최강대국인 페르시아를 격파한 후에 멀리 동방의 거대한 나라인 인도까지 정복하고 위풍당당하게 돌아오는 길에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했던 페르시아 건국의 영웅인 고레스 왕의 무덤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고레스 왕의 무덤 비석에 새겨진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훗날에 이 땅을 점령하는 사람은 내가 묻힌 이 한 평의 땅을 나에게 빌려다오. 나는 후일 반드시 다른 사람이 이 땅을 점령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비문을 읽고 난 후 알렉산더는 이렇게 탄식했다고 합니다. ‘그렇지, 내가 지금 점령한 이 땅도 언젠가 다른 사람이 점령하겠지.’ 그리고는 그가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이렇게 유언했다고 합니다. “내가 죽거든 손을 무덤 밖으로 나오게 하여 묻어 주시오.” 세계를 정복하고 모든 영광을 손아귀에 쥐었던 알렉산더도 결국 세상을 떠날 때에는 빈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유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강한 자가 되어야만 세상을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힘을 기르러 합니다. 육체적인 힘만이 아니라 지적인 힘도 기르고, 자기 신념의 힘도 기릅니다. 그래야 남들을 정복하고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계 3대 정복자라고 말하는 알렉산더, 나폴레옹, 징기스칸이 지금 세계를 정복했는지를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드넓은 영토를 점령했던 그들의 후손들이 지금도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세계는 절대 무력으로 점령될 수 없습니다. 때론 무력으로 점령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무력은 결코 오래 가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복되어라, 온유한 사람이여! 너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 우리 주님은 온유한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막강한 무력을 소유한 사람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이 오히려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누가 복된 사람이냐, 누가 참된 행복을 소유한 사람이냐’ 하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가장 먼저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고, 이어서 ‘지금 우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고 행복을 소유한 사람’이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인간의 일반적인 사고를 가지고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씀들입니다. 그리고 이이서 말씀하신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해는 갑니다. 참된 행복을 소유하기 위해서, 참된 하늘의 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공감은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온유한 사람이 된다는 것과 온유한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온유’라는 말은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는 것, 그리고 온화하고 부드러운 것을 말합니다. 단순히 외형적인 폭력이나 잔인함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모든 것에 대해서 관용적인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온유한 마음을 가졌던 두 사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모세입니다. 민수기 12: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모세의 온유함이 세상의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하던 중이었습니다. 모세가 어느 날 구스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구스’는 지금의 에티오피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아내로 맞아들인 여인은 이스라엘 여자가 아니라 이방의 흑인 여자였습니다. 

왜 모세가 에티오피아 흑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는지 성경은 이야기해주지 않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이전에 이미 결혼을 했습니다. 40세 때에 애굽에서 살인죄의 누명을 쓰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쳤을 때 만났던, 미디안 제사장의 딸 십보라와 결혼을 해서 게르솜과 엘리에셀이라는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 
  
그로부터 40년이 훨씬 지난 후였습니다. 모세가 흑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다는 것은 어쩌면 부인인 십보라가 죽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십보라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모세가 십보라를 아내로 맞아들였다는 기록이 출애굽기 2장에 나옵니다. 

그리고 40년 후에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애굽으로 되돌아 갈 때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자신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했다는 기록이 출애굽기 4장에 나옵니다. 그리고 십보라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출애굽기 18장에 나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광야로 데리고 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자기 집에 머물고 있던 모세의 아내 십보라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세에게 찾아옵니다. 그래서 광야생활하던 중에 십보라는 모세와 함께 하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흐르지 않은 때에 모세가 흑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인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짧은 시간에 모세의 아내가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이후로 십보라에 대한 기록이 성경에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아내 십보라가 죽지 않았음에도 새로 아내를 맞았을 수도 있습니다.

모세가 왜 흑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는지 모르지만, 이 일로 인해서 모세의 형 아론과 누나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하게 됩니다. 어쩌면 모세가 비방들을 만한 짓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십보라가 아직 살았는데 또다시 아내를 맞아들였다면 비난받을 만한 짓을 한 것일 수 있습니다. 

설혹 아내 십보라가 죽은 후라 할지라도, 모세가 굳이 흑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비난 받을 수 있습니다. 모세가 굳이 새로 결혼을 해야 한다면 이스라엘 여자들 중에서 아내를 선택해 맞아들여도 됩니다. 동족인 이스라엘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닌데,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인 모세가 이방 흑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인 것은 비방받을 만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형과 누나가 모세를 비방하는데도 불구하고 모세는 그 일에 대해서 일언반구의 말도 하지 않습니다. 왜 흑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야 했는지 변명하지도 않습니다. 
  
모세라고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변명을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유가 되던 되지 않던 모세가 아무 까닭 없이 흑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닙니다. 형과 누나가 자신을 비방할 때 모세가 그들의 비방에 대해서 공격적으로 대처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들은 잘못한 적이 없느냐’고 말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기 위해서 시내산 위에 올라갔을 때에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분노하셨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 죽여버리고 싶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분노하셨습니다. 

모세의 간곡한 기도에 하나님께서 화를 좀 풀긴 하셨지만, ‘이런 못된 백성을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가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마만큼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은 하나님께 엄청나게 큰 죄악이었습니다. 모세가 그 일을 이야기하면서 ‘형님, 형님은 저에게 이렇게 말할 자격이 없지요. 시내산 아래서 금송아지 만드신 것 기억 안 나세요?’ 그렇게 말 한마디 했다면 아론은 쥐 죽은 듯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 어떤 말로도 형과 누이의 비방에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변명할 말이 있을지라도, 또 비방하는 그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만큼 공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그렇다면 우리는 온유함이란 무엇인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뭐라고 비방을 하든지 믿음으로 참는 것입니다. 속에 꽁하고 감추어두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움으로 참아내는 것입니다. 

온유한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입니다. 마태복음 11:29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신 분이셨습니다. 그 온유하심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에 군병들에게 잡혀가실 때, 베드로가 품에 품고 있던 칼을 꺼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스승 예수님을 잡아가기 위해서 군병들을 이끌고 왔다는 것이 베드로를 얼마나 화나게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한다.”(마태복음 26:52) 그러시면서 ‘당신이 지금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한다면 12군단도 더 되는 하늘의 군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라고 왜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체포당하는 것이 어떤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종교지도자들이 자신을 미워해서 거짓 누명을 씌웠다는 것을 예수님 당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자신을 잡으러 온 군병들과 싸우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베드로가 귀를 잘라버린 그 말고의 귀를 낫게 해 주셨습니다. 
  
군병들에게 끌려가 대세사장과 빌라도 총독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도 그랬습니다. 분명 그 재판은 불법재판입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재판한다고 하면서 대제사장의 집에서 모인 것도 불법이고, 밤과 이른 새벽에 재판한 것도 불법이고, 거짓 증인을 내세운 것도 불법입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죽이기로 다 작당을 해 놓은 상태입니다. 예수님에게 죄가 있든 없든 예수님에게 사형을 언도하기 위해서 이미 각본을 다 짜놓았습니다. 이것만큼 불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붙잡혀 가셔서 당신을 위해서 아무 변명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이 불법 재판으로 인해 억울하게 죽임 당하셔야 한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항변하거나 변명하거나 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힘이 없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온유하심입니다. 그렇게 억울하게 당해도, 그래서 채찍에 맞는 고통을 겪으셔야 했고, 심지어 십자가에 처형되는 끔찍한 일을 당하셨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임을 아셨기 때문에 묵묵히 참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런 온유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온유한 자가 복되다고 말씀하신 것은, 내가 힘이 없어 당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변명할 이유가 있고, 또 변명할 수도 있습니다. 저항할 힘도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나를 억울하게 하는 사람들을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힘과 능력이 내게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지라도 참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내가 당하고 끝내는 것입니다. 그게 온유입니다. 그냥 당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모세도 그랬습니다. 모세를 원망했던 누나 미리암에게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셨습니다. 미리암이 나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 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그를 고쳐주옵소서.’ 

온유함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냥 참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나를 박해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 저항하지 않을뿐더러, 그를 위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나에게 손해를 입히고 내 마음에 상처를 주는 사람에게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아내고 그를 위해서 축복해 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이 심정적으로는 공감이 되는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온유한 자가 된다는 것도 어렵고, 온유한 자로 산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어렵다고 ‘나는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없어’ 그러고 끝내버려야 하겠습니까? 온유한 자가 되어 복 받는 일이 쉽지 않기에 우리 모두가 포기해 버려야 한다면 예수님께서 굳이 이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비록 힘들지만, 우리는 온유한 자가 되어 복 있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향한 기대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마음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누가 무슨 욕을 해도 다 담을 수 있을 만큼 우리의 마음을 키워야 합니다. 내 마음 속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잠재울 수 있을 만큼 우리 마음을 키워야 합니다. 바다는 온갖 쓰레기가 그리로 다 몰려들지라도 한 번도 거부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다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자체적으로 정화를 시킵니다. 

온유한 마음이 그렇습니다. 바다와 같습니다. 넓은 바다와 같아서 무엇이 들어오든지 다 받아들입니다. 욕하는 말도 받아들이고, 모함하고 험담하는 말도 다 받아들입니다. 조롱하는 말도 받아들이고,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 정화시켜버립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을 갖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그런 마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그런 온유한 마음으로 살면 우리의 삶에 기쁨과 행복이 넘쳐납니다. 온갖 쓰레기와 같은 힘든 말들과 고통을 받아들여 쌓아놓기만 하면 마음이 시컴둥이처럼 타버립니다. 그러나 바다와 같이 받아들인 것을 정화하면 우리는 내 안에 들어온 그 온갖 불순물로 인해서 고통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영국의 가장 유명한 수상 가운데 한 사람인 윈스턴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1874-1965)에 관한 일화입니다. 그에게는 늦잠을 자는 버릇이 있었다고 합니다. 밤 늦게 자기에 늦게 일어나는 게 습관이 되어서 나랏일을 돌보는데 지장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한번은 이 문제가 국회에서까지 거론되게 되었습니다. 한 야당의원이 처칠 수상에게 힐난하듯이 항의했습니다. “수상께서는 중책을 지고도 너무 늦게 일어나 국사에 지장이 초래하지 않습니까?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자 처칠 수상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 의원님들도 나처럼 미녀와 살면 여러분들도 늦게 일어나게 될 걸요.” 자신을 힐난하는 국회의원에게 변명하거나 자신을 힐난하다고 분노하지 않고 유머로 응수한 것입니다. 그러자 모든 의원들이 폭소를 터트렸고, 더 이상 이 일에 대해서 뭐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유머는 여유 있는 마음, 넓은 마음에서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순각적인 유머와 재치는 넓은 마음을 가질 때 가능합니다. 바로 거기에 온유한 마음이 깃들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넓은 마음을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다. 그 넓은 마음에 온유한 마음이 깃들어서 우리의 모습이 주님을 닮아갈 수 있는 아름다운 신앙인이 되십시다.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온유는 성령의 열매라고 말씀합니다.(갈라디아서 5:23) 성령의 열매라는 말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며 성령충만할 때 열매로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온유한 마음을 갖고 온유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말씀합니다. “성령의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갈라디아서 5:16-17) 
  
우리 육체의 욕심은 우리로 온유하게 하지 못합니다. 온유한 자로 살지 못하게 합니다. 온유한 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도 갖지 못하게 만듭니다. 온유한 자가 되면 늘 손해를 보기 때문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야 하고, 바보처럼 늘 다른 사람의 속임수에 넘어가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세상에서 출세하라고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교회 다니고 예수 믿은 후에 세상에서 부자가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을 닮아 작은 예수로 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상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신 목적이 맞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내 마음의 욕망이 나를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의 열매인 온유한 자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복되어라, 온유한 사람들이여, 그대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온유한 사람들이 세상에서는 손해를 본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늘의 상급으로 갚아 주십니다. 

우리는 온유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온유한 사람이 세상에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온유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우리 자신은 온유한 자가 되려하지 않습니다. 손해 보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당하고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주먹으로 한 대를 맞으면 두 대, 세 대를 때려주고 싶어합니다. 또 그렇게 살아야만 이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대 주어라. 속옷을 가지려고 고발을 하거든 겉옷까지 주어라. 억지로 5리를 가게 하거든 기꺼이 10리까지 가 주어라. 누군가가 네게 뭔가를 꾸어가려 하거든 그 사람이 갚을까 생각하지 말고 기꺼이 꾸어주어라.’(마태복음 5:39-42) 우리는 그런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복되어라, 온유한 사람이여!’ 여러분, 내가 손해 보더라도 온유한 사람으로 사십시다. 세상에서는 손해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내 기업이 되어주시는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며 사십시다. 우리 주님은 그런 사람이 복되다고 말씀하시고, 그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