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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전 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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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전 1:12-18)
  

들어가는 말

전도서를 쓴 솔로몬은 지식과 지혜의 대명사입니다. 
역사상 가장 지혜로웠던 사람을 들라면 솔로몬을 들 정도로 그는 지식과 지혜가 충만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지식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는 열왕기상 4:29절 이하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왕상 4:29-34절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 솔로몬의 지혜가 동쪽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그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워서 예스라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보다 나으므로 그의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 그가 잠언 삼천 가지를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천다섯 편이며 그가 또 초목에 대하여 말하되 레바논의 백양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그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하여 말한지라.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왔으니 이는 그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들이 보낸 자들이더라.”

솔로몬의 지혜에 대하여 좀 장황하게 묘사해 놓았습니다. 
그 당시 세상에서 내노라고 지혜를 자랑하던 에단, 헤만, 갈골, 다르다보다 더 지혜로웠다고 했습니다. 
오늘로 말하면 아인슈타인보다도, 빌게이츠보다도 더 지혜로웠다는 것이겠지요! 
문학적 재능도 뛰어나 잠언을 삼천 수 짓고, 노래를 천 다섯 곡이나 지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솔로몬은 레바논의 백양목에서부터 물웅덩이에 나는 우슬초까지 망라할 정로로 식물학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또 짐승, 새, 기어 다니는 것, 물고기 등 동물학에도 정통했습니다.
우리는 매일 보고 감탄하는 들꽃의 이름이 무엇인지 모를 뿐만 아니라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라는 식으로 무심코 살아갑니다. 
그런 점에서 솔로몬은 실로 대단한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지혜와 지식을 가졌던 그가 생의 마지막에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본문1:18절을 보면,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들으면 그는 지식무용론자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면 ‘과연 그리스도인은 지식무용론자입니까?’ 함께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먼저 그리스도인의 지식(지성)에 대한 바른 태도는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지식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고전 12장 8절에 보면, 바울 사도는 성령의 은사를 말씀하시면서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지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식무용주의, 또는 반 지성주의에 빠지면 안 됩니다. 
우리는 과거의 지식을 축적 전수함으로써 생활을 보다 더 편리하게 발전시킨다는 사실을 부인하면 안 됩니다. 
불을 발견한 다음, 전기를 발견한 다음, 컴퓨터를 만든 다음, 우리는 그 지식으로 얼마나 더 편리하게 삽니까?

요즈음 인터넷의 발달로 공간개념이 없어졌습니다. 
70년대만 하더라도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하면 영영 못 볼 곳으로 가는 것처럼 거리감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아침저녁으로 채팅하고, 이메일을 보내고, 인터넷 전화를 하고, 마치 건넌방에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거리감이 없어져요! 
이 모든 것은 지식의 발달로 얻어지는 생활의 편리함입니다. 
이런 사실을 부정하면 안 됩니다. 
지식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2) 사물의 이치, 자연의 법칙은 하나님의 품성을 드러내는 ‘일반계시’임으로 지성을 통하여 사물의 이치를 잘 깨닫기만 한다면 하나님을 더욱 더 깊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거미가 처마 끝에 거미줄을 치는 것 보셨나요? 
누가 그 간격을 가르쳐주었으며, 누가 그 각도를 가르쳐주었습니까? 
여러분, 작은 개미들이 줄 맞추어 움직이는 것을 유심히 관찰해보신 적이 있나요? 
그 작은 개미의 어디에 힘줄이 있던가요? 
어디에 핏줄이 있던가요? 
그 질서정연한 개미들의 행진에 누가 소대장이고, 누가 중대장이던가요? 
앞에서 뒤로 신호를 보내는 무전기는 어디에 있던가요? 

우리는 작은 미물 하나만 관찰해 봐도 우주 만물에 서려 있는 하나님의 관심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애정을 발견하고 탄복하게 됩니다. 
지식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합니다. 

3) 참 지성은 인간의 한계를 인식시켜 줌으로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합니다. 

본문에도 그런 의미의 말씀이 있습니다. 
전 1:15절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 
즉 인간의 지식으로 할 수 없는 게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 우주항공국(NASA)’에서 우주선을 탑재한 로켓을 쏘아 올릴 때 우주 과학자들은 이렇게 고백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끝났다. 이제 이 프로젝트의 성공여부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그래서 나사의 최고 과학자들은 무신론자들이 아니라 대부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참 지성은 인간의 한계를 인식시켜줌으로써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합니다.

지성이 있어야 신앙생활이 광신적이 되지 않습니다. 
역사를 뒤돌아보면 기독교는 반 지성주의에 빠진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신앙이란 반지성이 아니라 초지성입니다. 
반지성이란 지성을 반대하는 태도이고, 초지성이란 하나님의 진리는 인간 지성의 한계를 훨씬 초월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반지성적이 되면 그 신앙생활이 합리적이지도 상식적이지도 않게 됩니다.

여러분, 예전에 어딘가에서 죽은 사람을 부활시킨다고 시체를 매장하지 않고 방기한 사건이 일어났던 거 기억하시지요?
그러다가 경찰에 발각되어 사회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런 얼토당토하지 않은 신앙행태는 다 반지성에서 온 것입니다. 
초지성이란 기독교의 진리를 지성으로 다 파악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도리를 지성적으로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겠어요? 
어떻게 죽음 후의 심판을 지성적으로 확증할 수 있겠어요? 
어떻게 천국과 지옥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어요? 
가당치도 않지요!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초이성적입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성(지식)에는 위험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성의 함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오늘 솔로몬은 이 점을 유의하면서 우리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1) 지성(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참 지식을 얻으면 사람은 겸손하게 됩니다. 
벼도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고 하잖아요! 
그러나 우리는 좀 배웠다는 사람들이 지식만능주의에 빠져 하나님을 경멸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어처구니가 없는 태도를 가끔씩 보고 실망하게 됩니다. 
지성의 함정입니다.

2) 지성(지식)은 자유로운 성령의 역사하심을 제한하거나 가둘 수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지식이 많은 사람들은 비판력이 강하기 때문에 ‘안 된다.’라는 말을 많이 하게 되고,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기 쉽습니다. 
이런 태도가 성령의 무한한 능력을 제한할 수 있습니다.
활빈교회 김진홍 목사님이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그 분야에 지식이 있었다면 이런 저런 어려움과 위험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로 시도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몰랐기 때문에 오히려 성령님의 무한한 능력을 의지하고 도전하다보니 그런 결과를 맺게 되었습니다.

저도 이집트에서 사역할 때 빈민촌에서 진료소(쇼브라 코리안 메디컬 센타)를 운영했는데, 그 진료소를 방문하는 의사들로부터 가끔 그런 얘기를 듣습니다. 
“김 목사님이 의사이거나 병원 경영전문가라면 절대로 이런 일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니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몰랐기에 용감하게 성령님을 의지하여 도전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지성(지식)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긍정하거나 촉진하기보다는 부정하거나 제한하기 쉽습니다. 
지성의 함정입니다.

3) 지식은 더 많은 걱정과 염려를 만듭니다.

오늘 본문 전 1:18절에도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살다보면 아는 게 병일 때가 많습니다. 
차라리 몰랐다면 근심 걱정 없이 지낼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불안하고 걱정하고 근심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마시는 물만해도 그래요! 
모르면 그냥 달게 마실 것을 중금속이니 오염이니 듣고 알아놓으면 물 한 모금 마시는 것도 편하지 않아요! 
그래서 그 물이 함유하고 있는 위해물질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심리적, 정신적인 불안감이 우리의 건강을 더 해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식이 많으면 번뇌도 많아지고, 지식을 더하면 근심을 더하게 됩니다. 
지성의 함정입니다.

4) 지식은 영혼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지식으로 구원의 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지식으로 구원의 도리를 깨달을 수만 있다면, 지식이 많은 학자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구원받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지식의 한계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 3:8-9절에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배설물로 여긴다는 것은 지식, 경험, 배경, 등은 구원을 얻는데 소용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구원은 지식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습니다. 

3. 이제 결론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요즘 우리는 새벽기도시간에 ‘민수기’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민수기’라는 말은 ‘백성들의 숫자를 세는 책’이라는 뜻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민수기 1장은 인구조사 하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민수기 1장에 보면, ‘이스라엘 중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 ’라는 표현이 14차례나 반복됩니다.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 
영적인 싸움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싸움에 나갈 만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21세기는 특별히 문화, 정보, 인터넷, 등 특별히 지적인 영역에서 치열한 영적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적인 영역을 성령에 속한 사람이 차지하느냐? 아니면 악령에 속한 사람이 차지하느냐?’는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합니다.
영적인 전쟁에 승리할 수 있도록 싸움에 나갈 만한 자들이 되십시오.

1) 먼저, 열심히 노력하여 지식을 습득하십시오! 

지식은 힘입니다. 
지식은 영향력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을 때까지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2) 또한, 그 지식이 신앙의 세례를 받아 하나님이 컨트롤하시도록 하십시오! 

지식이 신앙의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 지식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지식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지식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3)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더 깊이 알기를 갈망하십시오! 
엡1장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을 좀 더 깊이 알아서, 우리를 왜 부르셨는지, 천국이 얼마나 좋은지,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신지 알았으면 좋겠다.”는 바울 사도의 염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기를 갈망하십시오. 
설교말씀을 들을 때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갈망하는 마음으로 들으십시오. 
갈망하는 마음으로 성경공부에도 참여하길 권면합니다. 

몇 주 전에 말씀드렸지요?
강북지방회의 공증하는 일로 충무로에 있는 공증사무실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변호사 사무실 문틈으로 성경읽기에 빠져든 백발의 한 노신사를 발견했습니다.
목회자인 저의 마음에 큰 감동이 일었습니다.
‘어떤 어른이 저렇게 성경말씀에 빠져들까?’
승동장로교회의 원로장로이신 노 변호사였습니다.
장로님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젊은 시절 유한한 이세상의 것을 얻기 위하여 밤잠을 자지 않고 공부했습니다. 변호사로 일하던 어느 날 ‘너는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얼마나 공부하고 있는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그때부터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성경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원로 장로님의 고백 속에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자 하는 갈망이 배어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 싸움에 나갈 만한 자가 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알고 기뻐 뛰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알고 모든 일에 당당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섬세한지 날마다 탄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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