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교회창립]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삼하 6:12-23)

첨부 1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삼하 6:12-23)
   
오늘은 우리 교회 창립59주년을 맞고 있습니다. 교회란 주님의 몸이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들입니다. 우리교회는 어떠한 교회가 되어야 하고, 어떤 마음과 신앙으로 하나님을 믿어야 할 것입니까? 하나님을 모신 교회, 하나님이 진정 영광을 받으시는 교회,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교회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 모든 성도들은 감격 속에 주님을 기뻐하고 열정으로 예배드리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통일 이스라엘의 다윗 왕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고, 예루살렘이 명실 공히 수도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성막을 건립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래야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온 민족의 중심이 되고, 예루살렘이 거룩한 땅이 될 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제작한 성막은 낡고 후패하였고, 수백 년 내려오면서 여러 곳으로 전전하다보니 새로운 성막을 건립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성막에 있어야 하는 법궤, 언약궤는 바알레유다라고도 하는 기럇여아림이라는 곳의 아비나답의 집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법궤라는 하나의 궤요, 상자였습니다. 법궤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 받은 십계명의 두 돌판을 넣어놓은 상자-궤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두 돌판이 들어 있다고 하여 법궤, 하나님의 언약의 보증으로 주신 율법이 들어있다는 뜻으로 언약궤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을 증거하는 돌판이 있다는 의미로 증거궤라고도 불렀습니다. 

신약 히브리서9:4에 보면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법궤 안에는 언약의 두 돌판과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 있어야 하는데,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에 그 법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합니다.(대하5:10) 만나를 담은 금하아리와 아론 싹 난 지팡이를 지성소 안에 두라는 것을 법궤 안에 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 궤는 브살렐이라는 장인이 모세의 명령대로 만들었습니다. 당시 브살렐이라는 사람은 최고의 경험과 이론을 겸비한 장인이었습니다. 법궤는 조각목이라는 나무, 싯딤나무로 길이가 2규빗 반, 너비가 한 규빗 반, 높이가 한 규빗 반이었습니다. 1규빗은 팔꿈치에서 장지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를 말합니다. 1규빗은 왕실에서 사용하던 긴 규빗이 있고, 일반에서 사용하는 짧은 규빗이 있습니다. 긴 규빗은 52.2cm, 짦은 규빗은 45.6cm라고 합니다. 1규빗이라고 하면 대략 50cm로 이해하면 가장 빨리 계산할 수 있습니다. 법궤의 길이는 1m 13cm 정도, 너비와 높이는 75cm 정도입니다. 아카시아 나무의 하나인 싯딤나무(조각목)로 짜로, 순금으로 안과 밖을 입혔습니다. 금으로 안과 밖을 쌓았다는 아주 귀중한 성물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소중한 것은 가장 귀한 것에 담겨 있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법궤를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적에게 빼앗겼습니다. 사사시대에 제사장들에게 법궤를 가지고 전쟁에 종군하라고 하였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출전하였지만, 하나님의 궤는 블레셋에게 빼앗기고 두 제사장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래서 하나님의 궤는 이방나라 블레셋에게 들어갔고, 아스돗이란 도시로 옮겨졌습니다. 법궤가 블레셋에게 들어간 지 7개월 동안 온갖 전염병이 돌아 수많은 블레셋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 법궤는 본래 있었던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게 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새 수레 하나를 제작하여 그 위에 법궤를 실어서 보냈습니다. 이 법궤는 유다 땅 벧세메스로 왔습니다. 그런데 유다 사람들이 모여 함께 법궤를 들여다보다가 화를 입어 70명이 죽었습니다. 이 법궤를 기럇여아림으로 올려보냈는데, 사람들이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습니다. 지키게 하였다는 말이 모순입니다. 법궤는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모시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해야 합니다. 

이 아비나답의 집에 법궤가 몇 년이나 있었는지, 대략 60년이라고 합니다. 사사시대에 엘리 제사장이 죽던 해에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았는데, 사무엘의 사사 기간, 사무엘의 두 아들이 통치한 기간, 사울 왕이 통치한 40년, 그리고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수도로 정한 후에 법궤를 찾아오게 되었으니 아비나답의 집에 법궤가 있은 것은 60년이라고 계산합니다. 이런 계산이 맞을 것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모았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빼낸 무리란 정병을 말합니다. 군인을 모으고 간 것입니다. 무슨 전쟁하는 것도 아닌데, 군인을 모아 갔습니다.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바알레 유다, 기럇여아림으로 가서 아비나답의 집에서 법궤를 모시고 예루살렘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번의 행사는 거국적인 축제로 진행하는데, 법궤는 새수레에 실었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는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구 새 수레를 몰고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법궤를 새 수레에 싣고 나오는데, 앞에서는 아효가 앞에 서서 소들을 몰면서 수레를 끌고 갑니다. 그리고 웃사라는 사람은 뒤에 오고 있었습니다. 

다윗과 이스라엘 온 사람들이 모여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앙급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였습니다. 그러니 소가 수레를 끌고 가는데, 이 소들이 일은 하지만, 여간 신경이 쓰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자 소들이 뛰었습니다. 타작마당에서 추수한 것을 모아놓고 타작합니다. 잘 익은 곡식의 냄새가 소들의 코를 자극합니다. 소들이 알곡을 먹고 싶어 펄쩍 펄쩍 뛰니 수레가 넘어질 것 같고, 법궤가 떨어지려고 합니다. 이 때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가 뒤따라오다가 법궤를 붙잡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참고 보시다가 웃사가 잘못해도 너무나 잘못하는 것을 보시면서 웃사를 치셨습니다. 60년이나 법궤를 돌보면서 살아온 사람이라고 하여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자기가 마음대로 법궤를 움직이려고 하니,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원래 법궤라는 수레에 운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제사장이나 레위인으로 고핫 자손이 메고 운반해야 합니다. 처음 성막에서는 두 제사장이 성막에 들어가서 성물을 잘 싸야 합니다. 법궤를 다른 사람이 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성막의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칸막이 천을 걷어 법궤를 싸고, 해달의 가죽으로 다시 싸고, 그 위에 순청색 보자기로 싸고, 고핫 자손 레위인들이 조를 짜서 들어오는데, 눈을 감고 성막 안으로 뒷걸음질 하여 들어와서 성막 안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지 말고, 제사장의 명령대로 채를 들어 메고 나가야 합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에 요단강을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이때는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었습니다.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강물에 들어갈 때에 강물이 갈라졌습니다.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여리고 성을 돌 때에 성벽이 무너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법궤를 제사장들이나 레위인 고핫자손이 메어야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야 법궤를 메고 가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수레에 실어서 보냈어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율법이 없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법궤는 제사장 외에는 다른 사람이 만질 수 없었습니다. 민4:15에는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라고 하셨습니다. 웃사가 지금 법궤를 만지고 있었습니다. 법궤가 떨어지려고 한다고 하여 붙잡은 것은 성물을 만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 법궤가 땅에 떨어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법궤를 손으로 붙잡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고 하여도 하나님의 말씀은 만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채를 꿰어서 채를 메고 가야 하는 것이지 수레에 싣는 것도 잘못이요 손으로 붙잡는 것도 안 되었습니다. 

웃사가 즉사하였습니다. 다윗은 그곳을 베레스 웃사라고 불렀습니다. 웃사를 치신 곳이라는 뜻입니다. 다윗 왕과 법궤를 나르던 3만 명은 슬픔에 쌓이게 되었고, 거국적인 축제가 변하여 웃사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아비나답의 집은 법궤를 수십 년 동안 모시고도 아들 중에 웃사가 죽었습니다. 웃사는 형식적인 교인이었습니다. 습관적으로 믿었습니다. 아무런 감동도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열심도 없었습니다. 잘 믿으려고 하지 말고 바르게 믿으려고 힘써야 합니다. 쉽게, 산보삼아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행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법궤를 이제는 오벳에돔이라는 집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 오벧에돔이란 사람은 레위인으로 단지파에 있는 레위인이 거주하는 가드림몬 출신이었기에 가드 사람이라고 하였을 것이고, 레위인으로 고핫자손의 후손으로 성전 문지기 가문이었습니다. 

이 오벳에돔이라는 사람은 석 달을 법궤를 모셨는데, 복을 받았습니다. 이 오벧에돔이라는 사람은 참으로 연구해볼만한 사람입니다. 그의 이름이 오벧에돕인데, ‘신의 종’, ‘신을 섬기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웃사가 법궤를 잘못 모시므로 죽은 것을 교훈 삼았습니다. 자식들로 단단히 일러서 법궤를 지성으로 섬기게 하였고, 하나님의 법궤를 자기 집에서 섬겨야 하는 것이 부담이 아니라, 감사한 일로, 축복으로 알았습니다. 

이 사람의 영성이 어떠하였으며, 인물의 됨됨이, 그의 자녀교육 같은 것을 연구해볼 필요가 있는 사람입니다. 오벧에돔에게서 난 아들들이 8명이었는데, 하나님이 오벧에돔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들의 조상의 가문을 다스리는 자들이요 큰 용사였습니다. 다 능력이 있는 자들이요, 그들은 다 직무를 잘 감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벧에돔이 살아 있을 때에 그의 자손들이 62명이었는데, 다 훌륭한 인품과 온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벧에돔의 온 집에 복을 주시고, 모든 소유에도 복을 주셨습니다. 이런 소문이 다윗에게 들려왔습니다. 

다윗은 왜 법궤를 운반하는데 실패하였는지 잘 따져보았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보았습니다. 역대상 15장에 보면 다윗이 명령합니다. 레위 사람 외에는 하나님의 궤를 멜 수 없나니 하나님이 레위인들을 택하여 섬기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론의 자손과 레위사람들을 모았습니다. 3개월 전에 실패할 때는 이스라엘에서 군인 3만 명을 모아 행사를 가지려고 하였는데, 이번에는 아론의 자손과 레위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고핫자손 중에서 120명, 므라리자손 중에서 220명, 게르손 자손 중에서 440명을 모았습니다. 제사장 중에 사독과 아비아달을 부르고 모든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몸을 성결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법궤를 메어오라고 명하였습니다. 오벧에돔의 집에서 법궤를 채에 꿰어 어깨에 메었습니다. 법궤 앞에 노래하는 찬양대원, 악기를 연주하는 관현악단을 세웠습니다. 당대의 가장 유명한 음악인들을 다 동원하고 악단을 동원하였습니다. 모든 장로들, 천부장들, 제사장들, 레위인이들이 가서 여호와의 궤를 메고 나옵니다.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노래하는 찬양대원들을 다 세마포 가운을 입었습니다. 다윗도 베로 만든 에봇을 입었습니다. 에봇은 제사장들이 입는 옷이었습니다. 나팔을 불고 제금을 치고 비파와 수금을 힘 있게 연주하면서 법궤를 메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옵니다. 

다윗은 법궤를 따라가며 춤을 추었습니다. 너무나 기쁘고 감격하여 덩실덩실 뛰면서 춤을 추었습니다. 음악에 맞추어서 반원을 그리면서 뛰어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은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습니다. 그리고 이 날 온 백성들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누어주었습니다. 축제란 하나님 앞에서 가지는 축제가 가장 감격스럽습니다. 사람들만의 축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가지는 축제가 감동이 있고, 즐거움이 있는 법입니다.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의 부인이 되어 궁궐에 있었는데, 창문으로 보다가 다윗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왕을 업신여겼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와 행사를 마치고 집으로 올 때에 미갈이 다윗을 맞으며 나와 하는 말이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건달패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춤을 추듯이, 신하들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 몸을 드러내며 춤을 추셨으니, 임금님의 체통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라고 나무라고 나왔습니다. 

그 때에 다윗이 미갈에게 말합니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시골에서 양을 치던 사람을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아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더 낮아져서 충성할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사울의 딸 미갈이란 여성은 정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버지를 닮아서 권위만 생각하고 다윗을 업신여기고 양치기 하던 촌사람으로 깔보고 있습니다. 다윗은 미갈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미갈은 죽는 날까지 다윗의 부인이었지만, 자식이 없었습니다. 

미갈은 신하들의 아내들과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체면도 없다고 남편을 나무랐지만,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뛰놀리라고 합니다. 미갈은 사람을 의식하지만, 다윗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윗은 순종 잘하는 여러 부인들이 많이 있는데, 다른 남자와 살던 미갈을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자기와 결혼하였던 여자이니, 자존심 때문에 데려온 것이지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미갈이 진정으로 다윗을 사랑하였다면 아버지 사울의 미움을 막았어야 합니다. 다윗을 피신시키고도 하는 말이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기에 도망가게 내버렸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아내된 여자가 할 말입니까? 

오늘 다윗이 춤을 춘 것이 사람들 앞에서 춘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감격스러워 뛰어논 것입니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더 낮아져서 지금처럼 찬양하고 춤을 추고 기뻐할 것이라고 합니다. 미갈의 신앙을 가지지 말고 다윗과 같은 신앙과 열정, 오벧에돔과 같은 바른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교회입니다. 이제는 말씀대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많은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우리의 성전에도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신 법궤를 모시고 있어야 합니다. 법궤가 없는 성전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법궤는 바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법궤는 곧 속죄소였습니다. 우리 주님의 구속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공의와 율법을 이루시기 위하여 속죄의 피를 흘리시고 돌아가시므로 단번에 속죄의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우리 예배당은 오직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성전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들려지고 선포되어야 합니다. 여기 하나님의 성전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항상 선포되어야 합니다. 

다윗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마음껏 뛰놀며 감격하는 성도들, 말씀대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