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진리를 위해 산 사람들 (롬 16:1-4,13)

첨부 1


(롬16:1-4,13) 

(롬16:1-4,13)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찌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 나 뿐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1. 하나님께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어 살게 된 곳이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역사는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죄인들이 살아가는 세상 역사는 사생영욕(死生榮辱), 죽음과 삶, 그리고 영광과 욕된 것으로 얼룩져 왔습니다. 영광된 죽음과 삶이 있는가 하면 욕된 삶과 죽음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받은 아벨이 있는가 하면,(히 11:4) 그 아벨을 죽인 최초의 살인자 가인이 있었습니다. 그 아벨을 두고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여 전하고 있습니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벨은 비록 살해되었지만 그의 믿음은 언제까지나 살아있는 소리가 되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며 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969세라는 인류 역사상 최장수 인물인 므두셀라는 비록 죽음을 피할 수 없었지만, 그가 1000년 가까이 살았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영원히 살 수도 있다는 소망을 주고 있습니다.(딛1:2) 그에 비하면 365년을 살았던 에녹은 당대에 단명(短命)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영원한 몸으로 변화되어 낙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창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의 삶을 히브리서11:5에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히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애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에녹이 평생을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이며, 그 믿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이었다는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되는 히브리서11:6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므로 반드시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따라서 에녹은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아 영생하게 된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되기 위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믿음으로 평생을 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은 세상에 죄가 가득하게 되면 세상이 물로 심판을 받듯이, 인간은 누구든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이 시대에 경고하고 있습니다.

(창6:5-7)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노아 당시 하나님께서 홍수 심판 전에 120년 동안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경고했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 말씀을 믿지 않고 오히려 노아의 방주를 조롱하고 비웃다가 결국 멸망당했습니다. 그러나 홍수 심판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방주를 만들어 그와 그 가족들이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이는 이 시대에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노아와 같이 구원함을 받는다는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세상은 죄악이 관영할 경우 불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루를 천년같이 천년을 하루같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벧후3:7-9)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이 시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딛 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다시 말해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심판을 받지 아니하고 구원함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요3:16-1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이처럼 세상 역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수많은 인물뿐이 아니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살아간 수많은 인생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을지라도 영원히 기억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는 믿음으로 죽기까지 깨끗하게 산 사람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3:5입니다.

(계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 등, 그 위치와 능력이 변변치 못해도 숱한 시련과 온갖 유혹, 그리고 어떠한 핍박과 박해 가운데서도 진리의 편에 굳게 서서 믿음을 배반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산 사람들에게 영원한 새 이름을 주십니다. 요한계시록3:8,12을 보겠습니다.

(계 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계 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2. 오늘 본문에는 이렇게 세상 역사에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살았지만 그 이름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기록된 사람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한 마디로 진리 편에 서서, 믿음을 가지고 ‘진리를 위해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진리는 무엇입니까? 요한복음14:6을 보겠습니다. 

(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생이 마땅히 살아야 할 길이 되시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유일한 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참된 진리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세상에서 말하는 여러 가지 도덕이나 윤리가 아닙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거나 폐기되는 도덕이나 윤리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연구나 생각에서 나온 이념이나 사상이 아닙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세상에 내려오신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올라갈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할 수 있는 생명력이 있어야 참된 진리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진리는 도덕이나 윤리에 불과한 것으로 “진리의 영”이 없는 전혀 생명을 주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생명력이 없는 진리는 착하게 살게 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생명, 구원에는 이르게 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만이 생명의 “진리”,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사람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약속하시고 보내신 성령을 두고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가 되시는 예수께서 보내신 영(靈)이시기 때문에 ‘진리의 영’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그러므로 이제 예수께서 보내신 보혜사 곧 ”진리의 영“이 함께 해야만 ‘진리’는 살아있는 말씀, 어두움을 물리치는 빛,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자를 살리는 생명으로 역사합니다. 인간은 착하게 살다가 죽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도 아닙니다.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모두가 다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만 인간은 사망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에게 가장 좋은 소식, 복음인 것입니다. 

죽음에서 벗어나 영원히 사는 길은 진리가 되시는 예수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요14:6). 이 생명의 ‘진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고 자기를 위해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위해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셔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3. 오늘 본문에 ‘진리를 위해 산 사람들’ 중 먼저, 뵈뵈가 있습니다. 이 뵈뵈를 두고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뵈뵈가 당시 교회 성도들의 인정을 받아 집사의 직무를 담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뵈뵈는 교회 여자 집사로 심방과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일, 그리고 병든 자와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것, 등 남자 집사들의 손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일들을 담당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서 겐그레아 교회는 어느 정도 교회 조직을 갖춘 교회로서 다른 어느 교회보다 사회봉사에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러한 뵈뵈를 로마 교회에 보낼 정도로 그녀는 겐그레아 교회에서 믿음이 탁월한 성도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녀를 ‘우리 자매’라고 부른 것은 실제 혈연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성도임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그만큼 뵈뵈는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되어 모든 성도들과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봉사에 충성을 다 했습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주라.”고 권면하며 그 이유를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뵈뵈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보호자”가 될 만큼 교회와 복음 전도를 위해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후원했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그녀는 사회적으로 유력하고 물질적으로도 부유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교회와 복음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물질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겸손한 자세로 복음 전도 사역을 위해 넉넉한 경제적 도움을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도 바울은 그의 선교 사역에 경제적으로 든든한 후원자, 보호자가 되어준 뵈뵈를 평생토록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뵈뵈를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영접하고 그녀가 필요하다면 무엇이든지 소용되는 바를 도와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 전도를 도왔던 뵈뵈를 영접하고 도와주는 것이 바로 바울을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로마 교인들에게 생소한 뵈뵈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영접하고 그를 도우면 그것이 곧, 바울을 돕는 것이 되고, 또 교회와 복음을 돕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10:40-42입니다.

(마10:40-42)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잠언11:25,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고 했습니다. 하물며 교회와 복음 전파를 위해 돕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영원한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가 뵈뵈와 같은 복음의 후원자가 되셔서 영원히 기억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있었습니다. 본문 3,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신약에서 브리스가와 아굴라보다 더 빛나는 부부는 없습니다. 이들은 원래 로마에서 살았지만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의 유대인 추방 명령 때문에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바울과 똑같은 천막 제조업자로서 바울을 만나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행18:2-3)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들 부부를 ‘브리스가와 아굴라’라고 부르는데 남편인 아굴라보다 그 아내인 브리스가를 먼저 호칭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브리스가가 아내일지라도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고 진리를 가르치는데 있어서 남편인 아굴라보다 더 성숙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학문의 도시 알렉산드리아 태생으로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아볼로’라는 사람이 에베소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를 듣고 있던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그 아볼로가 요한의 물세례만 알고 있을 뿐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세례와 더 깊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을 알고 그를 데려다가 제대로 가르친 바가 있습니다. 그만큼 브리스가는 진리와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예수께서 약속하시고 보내신 보혜사 성령의 세례 등에 대해 정통하고 이를 바르게 가르치고 전했던 것입니다. 

(행18:23-26)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이렇게 진리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믿음 또한 확실한만큼 복음을 위해서라면, 그리고 복음 전도의 사역자를 위해서라면 자기들 목숨까지도 내놓은 부부였던 것입니다.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다.”는 말은 원어상으로 보면, ‘사형집행자의 도끼 밑에 자기 목을 내어 놓다.’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이들 부부는 핍박으로 생명의 위기에 빠진 사도 바울의 생명을 구하고자 극단적인 위험을 겪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자 사람들마다 우상을 버리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우상을 만들어 장사하던 사람들이 생업에 손해를 보게 되자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이 시민들을 선동해서 사도 바울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이때 바로 이들 부부가 일사각오로 사도 바울과 함께 하며 희생적으로 바울을 도왔던 것입니다.(행19:28-31,행23:12,고전16:8-9) 

이러한 브리스가와 아굴라였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결코 그들 부부의 희생적인 봉사와 헌신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 부부에 대해 이방인의 모든 교회들까지도 익히 알고 감사하고 있다면서 로마를 방문하게 되는 이들 부부를 정중히 문안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참으로 그들의 복음 전도를 위한 헌신적인 사역으로 이방인의 교회를 넘어 널리 그 소문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영향력을 가졌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이와같이 복음 전도를 위해 희생적으로 헌신하는 아름다운 성도 부부들이 날로 충만해지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에 대해 여기서 끝나지 아니하고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저의 집에 있는 교회’는 브리스가와 아굴라 가정의 집이 어디로 이사를 가든 항상 교회로 내놓았다는 뜻입니다. 

이들 부부가 자기 집을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복음을 전하기 위한 예배처소, 다시 말해 ‘가정교회’로 항상 내놓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독립된 교회 건물보다는 성도들의 가정집을 정규적인 회합의 장소로 이용하는 것이 보편적이었습니다. 이러한 가정 교회가 성장해서 오늘날 독립된 건물의 교회가 된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전형적인 ‘가정 교회’는 오늘날에도 존속하는데 가정집에서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게 되는 ‘목장 예배’(구역, 혹은 속회 예배)와 같은 것입니다. 

오늘날의 성도들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가정집에 모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서로의 신앙을 돈독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을 본받아 가정에서 드리는 목장 예배를 중요시해야 합니다. 오늘 상당수 교회에 젊은 계층에서 목장 예배드리기가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맞벌이 부부라서 아이들 귀가 시간이 늦어 그에 맞춰 생활하다보니 목장예배 준비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인정이 고갈되어 가는 이 시대에 가정 예배를 통해 서로의 문제를 위해 기도해주고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돕는 일이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승리의 생활을 하는 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의 집을 이처럼 ‘가정 교회’(House Church)로서 복음을 위해 개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처럼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가정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내 집이라는 의식이 없어지고 그리스도께서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내놓겠다는 열린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내 집이 교회의 집이요, 교인들의 집이요, 하나님의 집이다.’는 믿음으로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무엇이든지 복음을 위해서라면, 진리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내어놓을 수 있는 마음과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목장 예배같은 가정 단위의 모임이 활발해야 교회의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내놓은 가정 교회는 오늘 교회의 목장 예배에 있어 중요한 모체가 되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전도자로서, 평신도로서, 직업인으로서, 그리고 바울을 돕는 봉사자로서 복음을 위해 목이라도 내놓고 살았습니다. 이러한 복음을 위한 협조자들이 있었기에 바울은 복음 전도에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가장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각자 자신의 받은 바 은사대로, 재능대로, 믿음의 분량대로, 그리고 각자의 소질에 따라 힘껏 봉사해서 교역자를 돕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며, 복음을 위한 삶이며, 진리를 위해 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평가는 사람이 얼마나 유식했느냐, 부자냐, 높으냐, 미인이냐 등이 아니라, 진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의 복음을 위해서 얼마나 수고하고 어떻게 희생하며 살았느냐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자랑할 것은 복음을 위해 고생한 것밖에 없게 될 때, 오직 진리를 위해 살았을 때 많은 칭찬과 상급이 있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가정이 복음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가정교회로 쓰임받을 수 있는 믿음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13절에, “주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 고 했습니다. 루포는 누구입니까? 마가복음15:21을 보면 구레네 시몬을 소개하는 글이 나오는데 거기에 루포의 이름이 나옵니다. 

(막15: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에서 올라오는 길에 그 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군인들은 그를 보고 강제로 붙잡아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다. 

그 루포가 바로 구레네 시몬의 아들입니다. 구레네는 유대인으로서 아프리카에 살다가 유월절이 되어 예배를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올라가는 그 행렬과 만나게 됩니다. 연유야 어찌되었든 구레네는 힘겹게 지고 가시는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도록 로마 병정들의 강요받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구레네는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예수의 모습과 그 십자가의 장엄한 죽음 앞에서 깊은 충격과 감명을 받았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 후로 예수를 믿게 되고, 어찌해서 내가 그 십자가를 대신 졌을까 하고 평생을 십자가를 자랑하며 감격하고 눈물로 감사하며 부부가 함께 전도하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억지로 졌어도 십자가는 정말 좋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선한 일에는 조금 무리가 있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헌금하고 봉사할 때 무리가 조금 있었고 억지가 있었어도 뒤에 가서 생각하면 아주 잘했다고 후회함이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자원해서 좋은 마음으로만 해야 좋은 것은 아닙니다. 좋은 마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다가 언제 주를 위해 일하겠습니까? 억지로라도 시작하고 보면 시몬 구레네처럼 평생을 두고 기뻐할 일도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올 때마다 좋은 마음으로 기쁘게 나올 수만은 없습니다. 때로는 고집으로 나오고, 때로는 억지로 나왔다가 졸기만 하고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나오다 보면, 억지로라도 봉사하다보면 후회하기보다는 참 잘했다는 생각과 아름다운 결과를 남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일지라도 교회에 나와 신앙 생활하는 것이 결국 선하며 영원히 아름다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억지로 십자가를 진 시몬의 부인 즉, 루포의 어머니와 루포를 문안하며 특히 이들을 두고 ‘택하심을 입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택하심을 입었다.”는 말은 ‘전 시간을 바쳐서 봉사하는 하나님의 일군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일평생을 바쳐서 오로지 복음만을 위해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고 말하면서 바울은 “루포의 어머니가 바로 내 어머니다”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루포의 어머니’가 바울의 육체적인 어머니는 아니지만 사상과 신앙에 있어서 바울과 전적으로 하나가 되어 모든 복음 사역을 돕는 후원자로서 하나님의 사업을 지켜나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바울의 영적 부모요 자매 형제이며 친척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루포의 어머니로부터 친어머니 이상으로 위로와 따뜻한 사랑을 받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루포를 생각할 때면 반드시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 회상할 만큼 그녀는 바울에게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심한 후 자기 가족들을 떠나게 되었는데, 인간적으로 몹시 외로웠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잠시 루포의 집에 유숙하는 동안 루포의 어머니가 그의 외로움을 알고 친아들처럼 따뜻한 친절과 사랑으로 돌보아 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루포의 어머니에게 특별한 존경을 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 진리를 위해 루포와 같이 쓰임받으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 로마서 16장에는 이들과 더불어 모두 26명의 ‘진리를 위해 산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같이 복음을 위해 사도 바울과 교회에 희생과 헌신을 아낌없이 베푼 사람들입니다. 아리스도불로같은 헤롯 왕의 손자로 귀족이 있는가 하면 우르바노, 아순그리도, 블레곤, 허메와 바드로바, 그리고 허마, 빌롤로고와 율리아, 네레오와 그 자매와 올름바 등 귀족들의 노예들이거나 노예에서 해방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유대인은 물론하고 숱한 로마인들과 헬라인들, 그리고 그들의 노예들 등 실로 다양한 사람들이 ‘진리를 위해 살았습니다.’ 

바울은 그 모든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주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형제로서 따뜻한 사랑과 감사를 표시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특징과 장점을 들어 안부를 전하고 있습니다. 실로 아름다운 믿음의 교제입니다. 거기에는 이미 유대인도 없고 이방인도 없으며, 주인도 없고 노예도 없으며, 모두가 다 주안에서 새로 태어난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바로 여기에 종래의 세계와는 다른 전혀 새로운 공동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소유의 많고 적음을 초월하며, 신분의 높고 낮음을 초월하고, 성별의 주종을 초월하여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한 몸이라 일컬어지며, 한 마음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며 이 땅 위의 하나님 나라의 모습인 것입니다.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는 교회와 진리를 위해 사는 성도가 되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생명책에 기록되며 금세와 내세에 아울러 하나님의 상급이 풍성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