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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을 하는 것과 무엇을 믿는 것 (왕하 4:14-15, 막 10: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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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하는 것과 무엇을 믿는 것 (왕하 4:14-15, 막 10:17-22)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첫째 오해는 달란트의 비유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24에는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라는 말이 있습니다. 

게으른 종은 주인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거두는 존재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5:17에는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시고 계시고 나도 일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둘째 오해는 탕자의 비유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29에는 첫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이라고 합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아버지가 시키는 무엇을 꼬박꼬박 어김없이 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에는 없지만 겉으로 행위만 드러내 보이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둘째 오해입니다. 이런 자들을 우리는 율법주의자 혹은 바리새인이라고 부릅니다. 
  
율법은 은혜와 늘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참 좋은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만 은혜 없는 율법은 무력한 것입니다. 은혜를 빼버린 율법은 언제나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계명이 좋은 것이지만 그 좋은 계명이 사람을 죽게 한다고 한탄하였습니다. 
  
신약의 로마서와 야고보서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와 야고보서의 관계도 많은 오해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기치를 높이 들었고 믿음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야고보서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여 믿음보다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책은 서로 배치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인 로마인에게 보내는 편지이므로 바울은 믿음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바울도 로마서 12장 이하에서는 그리스도인의 행위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이미 하나님을 알고 믿음이 있는 유대인에게 보내는 편지이므로 야고보는 행위를 강조한 것입니다. 야고보가 믿음이 필요 없고 행위만 강조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과 행위는 대립적인 것이 아닙니다. 은혜와 율법도 대립적인 것이 아닙니다. 행위는 믿음의 결과입니다. 은혜는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두가 다 우리의 믿음 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죄는 행위가 아니라 행위 이전의 상태,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가 죄이며, 분리된 존재가 죄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했다’, ‘안 했다’가 아니라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가 죄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으면 하라는 것도 하지 않게 되고, 하지 말라는 것도 하는 존재가 됩니다. 
  
사람들은 흔히 무엇을 해야 구원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극단적이 되면 율법주의가 되고, 행위주의가 됩니다. 그런데 해야 한다면 무엇을 해야 하고,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얼마나 할 수 있겠습니까? 율법의 폐단이 무엇입니까? 할 수없는 것을 하라고 강요합니다. 첫째는 마음보다 행위를 보는 것입니다. 둘째는 율법만 선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8에는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고 합니다. 율법도 선하지만 율법주의자들은 율법만 선하다고 합니다. 탈무드에는 “율법 외에 선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젊은 부자 관원은 예수님께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율법주의자에게 예수님은 하나님 한분 만 선하다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율법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젊은 관원은 이 말씀은 “어릴 때부터 다 지켰나이다”라고 합니다. 자신의 율법적 완벽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거짓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율법적 자신감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무엇을 하여야”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이 젊은 관원은 영생에 관한 위대한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왔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대한 질문, 열심, 율법적 완벽함이 있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내 자신을 잘 점검하여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경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영생은 무엇을 해야 얻는 것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10:17에는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고 합니다. 이 젊은이는 대뜸 예수님께 영생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냐고 질문합니다. 마태복음의 병행구인 마태복음 19장에는 이 사람이 부자였고 청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병행구인 18장에는 관원이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당시에 드문 부자였고, 청년이었고, 지위가 높은 관원이었습니다. 젊은 사람이 관원이었다는 것은 대단한 지위와 경력을 쌓은 사람입니다. 요즘 말로 ‘스펙’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율법적인 사람은 ‘스펙’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의 실력보다 요란한 학력이나 경력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대개 율법적인 사람입니다. 학력이나 경력을 잘 쌓지만 드러내지 않고 실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진짜 훌륭한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가짜 학위 소동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간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스펙’(spec)이란 말은 ‘명세서’, ‘내역’이란 뜻의 ‘specification’의 준말인데 구직자의 평가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만을 내세우는 것은 율법적입니다. 
  
명함이 지나치게 요란한 사람은 내실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믿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어떤 분의 명함을 받아보니 ‘40일 금식 3회’라고 써놓았습니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기억할 필요가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기도원에만 갔다 오면 소리가 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알맹이보다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스펙’ 중심의 사람입니다. ‘스펙’을 쌓으세요. 그러나 ‘스펙’을 쌓으려고 살지는 마십시오. 
  
이 젊은 관원이 중앙의 산헤드린 회원인지 지방의 관원인지는 모르지만 30세 정도의 젊은이가 관원이 되었다는 것은 대단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달려와서 꿇어앉아” 질문한 것으로 봐서 예절도 잘 지킨 젊은이입니다. 겉으로는 인정받을 만하고, 율법적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부족한 것 때문에 영생의 길에서 탈락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영생은 행위 때문이 아님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영생을 얻는 길은 무엇을 해서 얻는 것이 아님을 모르는 무지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젊은이는 율법은 선한 것이기에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선생님을 찾아왔을 것입니다. 무엇을 하여야 하느냐고 물었을 것입니다. ‘무엇을 하여야’ 한다는 것은 사실은 모든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마음 보다 하면 된다는 행위를 강조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선물을 받으면 어떻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첫째는 기분이 좋다. 둘째는 부담이 된다. 셋째는 나아가서 나도 언젠가 꼭 갚아야 한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담이 된다거나 나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선물은 그냥 마음으로 감사하고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냥 지나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호의로 주는 선물에 대해서도 무엇을 나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인간의 행위는 영생의 조건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선물을 주면 감사하니 나도 꼭 갚아야 하겠다는 생각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선물에 대한 결과로서의 행위입니다. 
  
선한 행위는 구원의 원인은 아니지만 구원의 증거입니다. 믿음은 행위 위에 구축되어서는 안 되지만 행위는 반드시 믿음 위에 구축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행위를 정당화(justify)하고, 행위는 믿음을 증거(testify)합니다. 
  
우리 아이들을이 전화를 합니다. “아빠 뭐해?” “응, 전화하고 있어”. “그거 말고?” “아무 것도 안 해”. 세상에 아무 것도 안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생각하고, 텔레비전을 보고, 라디오를 듣는 것, 이 모두가 행위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행위란 이런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그 행위 때문에 구원 얻는 것이 아닙니다. 행위는 믿음을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 전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 어느 스님이 우리 집에 오셨습니다. 그 분은 한국에서 유수한 사찰의 총무스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도를 깨닫기 위해서 암자에 올라가 백일 동안 생식을 하며 기도를 했지만 얻은 것은 눈앞에 왔다 갔다 하는 허깨비밖에 없었답니다. 그분이 진리에 대한 마음을 가지고 수소문해보니 대구에 이 아무개 목사님이 불교를 잘 알고 계시다고 하여 저의 선친을 찾아온 것입니다. 선친과 네 시간 가량 얘기한 후에 선친께서는 어머니께 아버지가 입으시는 양복과 오이셔츠와 넥타이를 가지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스님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승복을 벗어놓고 선친의 양복을 입고 나가셔서 후에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그 분이 목사님이 되신 후에 하신 일은 사찰을 찾아다니면서 승려들을 전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분은 고행, 참선, 금욕, 절제, 이런 인간의 행위에 매달려봤지만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인간은 그 어떤 행위로도 절대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의 행위는 그들의 의의 척도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적 의를 소중하게 생각하였고 마음에는 어떤 생각을 하든지 행동을 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의를 지적하셨지만 행동으로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너희의 의가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행위로는 예수님의 제자보다 훨씬 나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최근에는 건강이나 장수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것 먹으라”, “이렇게 해라” 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걸 다 하다간 죽을지 모릅니다. 장수하기 위해서는 나이만 많이 먹으면 될 껄 너무 다른 걸 많이 먹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영생을 위하여 이렇게 하라, 이것을 먹으라고 율법이 권합니다. 영생을 위해서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될 걸 그렇게 어렵게 영생을 구하는 것이 율법주의자들입니다. 
  
행동을 선하게 바꾼다고 승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승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것입니다. 영생의 열쇠는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기를 요구합니다. 만일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던 한편 강도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선한 일을 한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평생 강도짓만 하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영생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므로 내가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둘째, 영생은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얻습니다. 

21절에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조건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라갔습니다. 버리는 것은 주를 따르는 조건이고, 따르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무거운 짐 같은 물질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다 버리고 가볍게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6:24에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조건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부인입니다. 둘째는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지 않고 영생을 얻는 길은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고난이며, 버림이며, 고난의 잔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는 것을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주님을 따라가면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한 자리씩 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그랬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아들들에게 하나는 좌편에 하나는 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마태복음 20:22에서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자신의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신 말씀은 “다 지켰나이다”라는 말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율법적인 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켰다고 하더라 도 율법이 아니라 재물에 대한 인색한 마음이 영생의 걸림돌이라는 말씀입니다. 영생의 조건은 자신의 소유를 과감하게 버리는 것과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버리지 않으면 따르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에게 버릴 것이 무엇입니까? 소유입니까? 명예입니까? 정욕입니까? 지식입니까? 만약 이건 절대 못 버리겠다는 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만은 절대 버려야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절대 못 버리겠다는 것이 따르는데 한 가지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물질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물질을 가지는 것은 죄악이 아닙니다. 물질을 버리지 못한 것이 죄악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보세요. 부자가 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까? 이 비유의 결론은 “자기에 대하여 부요한 자가 이와 같으리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하여는 가난하고, 다른 사람에 대하여 부요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모습이며 영생 얻은 자의 모습입니다. 
  
사도바울을 보면 바울만큼 많이 가진 자도 드물 것입니다. 그는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말리엘이라는 당대의 최고의 랍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물질로도 풍성했습니다. 당시의 철학적 지식도 남부럽지 않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공으로 로마의 시민권도 가지고 지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다 버렸다고 했습니다. 버릴 것도 없는 자가 버린다면 가치가 없지만 이렇게 버릴 것이 많은 사람이 버린다면 대단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 있게 빌립보서 3:8에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이 거추장스럽고 필요없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3대 신비주의자 중의 한 사람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주님을 반쯤만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무수히 많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은 실상은 절반쯤 따르는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재산이나 친구, 그리고 영예를 포기해야 하는데 이것들은 그들에게 자신을 포기하는 것과 너무나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버린다는 것은 실제로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 물질도, 명예도, 지위도 버릴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거리를 두고 따르면 주님을 배반하게 됩니다. 온전히 버리지 않고 절반쯤 버리면 배반하게 되고, 예수님을 위하여 죽을 수는 결코 없습니다. 아예 온전히 버려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릴 수 있습니다. 이전에 귀한 것들이 다 배설물처럼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하나를 얻으려면 다른 하나를 버려야 합니다. 버리는 것이 없이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영생을 얻겠다는 사람이 물질을 버리지 못하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보면 이 젊은 관원은 말로는 영생을 구했지만 참 영생을 구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영생을 구하는 사람이 물질을 버리지 못하면 어떻게 영생을 얻습니까? 다 버려야 하나를 얻습니다. 
  
부자 세리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남의 것을 억지로 빼앗았으면 네 배를 갚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갚고 주었으면 자신의 재산이 남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삭개오는 빼앗긴 것이 아니라 버린 것입니다. 빼앗기기 전에 버려야 영생 얻는 자가 됩니다. 
  
제가 오래 전에 만났던 수도사들 가운데는 아주 부잣집의 장자도 있었습니다. 모든 유산을 다 버리고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어떤 이는 의사이고, 어떤 이는 약사이고, 어떤 이는 교수였습니다. 버릴 것이 있는 사람들이 다 버리고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것을 모두 버리고 한 벌의 옷으로 삽니다. 최소한의 음식을 먹고 삽니다. 종일 기도하고 묵상하고 노동하면서 삽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29에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합니다. 내 것을 버리면 여러 배를 얻습니다. 내 것을 버리면 영생을 상속합니다.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에 대한 해답이 주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행복한 삶의 조건은 자신이 가진 5%를 버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조금만 버리면 행복합니다. 조금만 더 버리면 영생을 얻습니다. 그래야 가볍게 주님을 따라갑니다. 내 것을 버리지 못하면 주님을 버리게 됩니다. 내 것을 버려야 주님을 버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따라가게 됩니다. 찬송가처럼 “겟세마네 동산까지 주와 함께 가려하네, 피땀 흘린 동산까지 주와 같이 같이 가려네”하며 따르게 됩니다. 

  
결론 

런던 올림픽이 한참인데 우리나라가 작은 나라지만 참 잘 하고 있습니다. 금메달을 딴 선수들의 부모님들이 인터뷰를 하는데 아버지와 어머니의 차이를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 수고 했다. 자랑스럽다”고 하는데, 어머니는 “아픈 데는 없니? 밥은 먹었니?”라고 합니다. 런던까지 가서 밥도 못 먹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유도에서 금메달을 딴 김재범선수는 참 좋은 크리스천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재범선수의 부모님도 똑같은 얘기를 했습니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땄을 때에 상대인 독일의 올레 비쇼프선수와 다시 결승에서 만나 금메달을 땄습니다. 비쇼프처럼 금메달 뒤에 은메달 보다 김재범처럼 은메달 뒤에 금메달이 훨씬 값집니다. 김재범선수는 승리하는 순간 “주여 주여”를 외치며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경기에서 진 사람을 찾아가 위로하며 “우리는 모두 승리자”라고 위로하였답니다. 

그는 “4년 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죽기 살기로 하였는데, 이번엔 죽기로만 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내가 한 게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인터뷰하는 동안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립니다”를 거침없이 쏟아냈습니다. 참 용감한 크리스천입니다. 요즘은 종교편향이니 뭐니 해서 기독교를 폄훼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자신을 버린 흔적이 역력히 나타났습니다. 버리지 않고는 그렇게 말할 수는 엇습니다. 그는 신앙에서도 금메달감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입니다. 이제 행함으로 우리의 믿음을 증명합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에 부족한 한 가지가 무엇인지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과감히 그 하나를 버리고, 다 벗어버리고, 주님을 따라 겟세마네, 골고다까지 그리고 하늘나라까지 힘차게 걸어가는 믿음의 순례자가 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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