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마리아의 향유 (요 12:1-8)

첨부 1


마리아의 향유 (요 12:1-8)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1-2)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3)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4-6)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요12:7-8)


베다니에서 벌어진 잔치

나사로 사건 직후에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했고, 예수님은 몇 달간 에브라임이란 곳으로 가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피신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로 다시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릴 것을 결심하시고 다시 유대인의 소굴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cambridge 대학 교수였던 Joseph Barber Lightfoot에 의하면, 예수님이 도착하신 유월절 엿새 전날은 유대 월력으로 아빕월(니산월, 현재의 3-4월) 9일로써 안식일이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저녁에 축제 분위기 속에서 자유롭게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베다니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1-2) 아마 이러한 안식일 저녁의 만찬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잔치가 벌어진 장소는 베다니 시몬의 집입니다.(마26:6-7) 이 시몬은 문둥병자였다가 예수께 고침을 받은 사람입니다. 아마 그는 베다니에 오신 예수님을 환영하면서 나사로의 집안과 합작으로 마을 잔치를 벌인 것 같습니다. 문둥병에서 고침 받은 시몬이나,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나 똑같이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잔치를 벌였을 것입니다. 시몬은 장소를 제공하고, 마르다는 주방장이 돼서 함께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 잔치에 많은 사람들이 왔습니다. 나사로의 이적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 집안 친척들, 또는 죽었던 나사로를 보려고 호기심에서 모여든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주님은 기쁜 마음으로 이 잔치에 참석하셨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주빈의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마리아가 예수께 향유를 붓다

이 잔치에서 중대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향유를 한 옥합 갖다가 깨뜨려서 예수님 머리에 부었습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3) 

이 사건은 사복음서가 다 같이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마26:6-13,막14:3-9,눅7:36-38,요12:1-8) 이 사복음서의 기록들 중에서 마태, 마가, 요한이 기록한 것은 동일한 사건으로 보고, 누가의 기록은 다른 사건으로 봅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사건이 가지는 의미입니다.  
  
우선 향유를 붓는 관습부터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마리아는 왜 예수님 머리에 향유를 부었을까요?  그것은 당시 유대인의 풍속입니다. 그들은 집에 귀한 손님이 오면 머리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시편 23편에 보면, “주께서 내 머리에 기름을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는 귀절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7:46에서도 주님은 손님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을 귀중히 여기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예수께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님을 잔치의 주빈으로 대접하는 최선의 표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의 행동에서 상식을 벗어난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그가 드린 향유의 가치입니다. 잔치 집에서 귀한 손님에게 향유를 바르는 것은 늘 있는 일입니다만, 마리아는 너무 비싼 향유를 부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향수는 가장 비싼 화장품 중에 하나입니다. 마리아가 가져온 향유는 나드 한 근입니다. 

나드(ναρδοσ)는 인도産 식물에서 짜낸 가장 비싼 향수입니다. 그것도 불순물이나 첨가물이 없는 순수한 것이니 여자로서는 가장 아끼는 물건입니다. 마리아는 이 향유를 한 근(λιτρα, 327g)이나 가져 왔습니다. 돈으로 환산하면 300데나리온 어치나 됩니다. 당시에 일반 품군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입니다. 안식일을 제외한다면 노동자가 1년을 쓰지 않고 벌어 모아야만 되는 돈입니다. 마리아는 이것을 아낌없이 들어부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지나친 행동으로 느껴졌습니다. 

물론 마리아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사랑하는 오라비가 다시 살아난 것을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가족이 되찾게 된 기쁨과 행복을 돈으로 따지겠습니까? 그보다도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어찌 물질로 갚을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는 이런 마음으로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과해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둘째로,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아 드린 행동입니다. 당시의 유대 풍속으로 본다면 여자가 공중 앞에서 머리털을 푼 것은 수치스런 행동이었습니다.  민수기 5:18에 보면 제사장은 간음죄로 의심받는 여인의 머리털을 풀게 했습니다. 랍비의 글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카미타는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가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들들이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어떻게 그런 명예를 얻을 수 있었습니까? 어머니는 아들들에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집 서까래들이 내 머리털을 결코 보지 못한 결과가 아니겠느냐!” 존경받는 여자는 언제나 머리를 덮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남의 눈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머리털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그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았어요. 남의 발을 닦는 일은 가장 천한 종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시겠다고 할 때에 베드로는 천부당만부당 하신 말씀이라고 펄쩍 뛰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여성의 명예로운 머리털을 풀고, 그것으로 주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발을 닦는 것만도 낮아진 모습인데, 머리털로 닦은 것은 자신을 낮출 대로 낮춘 모습입니다. 이것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에 거슬리게 만들었습니다.
  
본문은 마리아가 어떤 마음으로 주님을 섬겼는지 보여줍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신성 앞에 굴복하고 있습니다. 윤리적 차원이 아닌, 신앙적 차원의 대접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한 인간으로서 대합니다.  때로는 동등한 위치에서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감히 “친구”라는 말을 사용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어찌 친구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교회 선전 문구에 보니까 ‘Mr. 예수’라는 문구를 넣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선지자로, 때로는 스승으로, 비범한 인간으로 대했습니다.  공통점은 인간으로 대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신을 무한히 낮추고 예수님을 무한히 높였습니다. 신앙적 섬김입니다. 전적 헌신입니다.  


가룟 유다의 비판

마리아의 행동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낀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가타부타 말씀을 않으시니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가룟 유다가 앞장서서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4-5) 

유다는 먼저 향유의 가치를 평가했습니다. 300데나리온!  대단한 비용입니다. 요즘 제아무리 비천한 일이라 해도 하루 5만원은 받습니다. 그러니 300일간을 모은다면 1500만 원은 될 것 아닙니까? 가룟 유다는 그 돈을 왜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고 허비했느냐고 비판했습니다. 아무리 귀한 손님이 왔다고 해도 1000만 원짜리 향수를 한꺼번에 들어붓는 것은 낭비가 아니냐? 일견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함께 비판했습니다.(마26:8,막14:4) 얼마나 공감이 가는 말입니까?
  
그러나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여기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가룟 유다가 한 말뿐만 아니라 가룟 유다의 됨됨이부터 문제 삼습니다. 도둑놈이 어떻게 감히 마리아의 행위를 비판할 수 있는가? 가룟 유다가 어떤 인물인가? 그럴듯한 말을 했다고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4절과 6절의 말씀을 보세요. 4절에서, 사도 요한은 가룟 유다에 대해서 세 가지를 언급합니다. 제자 중 하나요, 예수를 팔 자요, 가룟인이라고 했습니다. 

6절에서는 “도둑”이란 말로 요약합니다.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돈을 훔쳐가는 도둑입니다. 가룟 유다는 돈에 미친 배금주의자입니다. 그는 만사를 돈으로 평가했습니다. 12제자들의 작은 집단에서 재정을 맡았지만 들어오는 수입을 적당히 자기 몫으로 빼돌렸습니다. 3년 반이나 따라 다닌 스승을 은전 30냥에 팔아넘긴 것도 결국은 그의 배금주의 철학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를 매우 현실적인 입장에서 따랐습니다. 예수가 장차 유대 사회의 지배자가 된다면, 재무를 맡은 자기는 엄청난 수입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정경 유착은 어느 시대나 문제입니다. 권력 아래서 돈을 모으는 것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배반할 수 밖에 없는 배금주의적인 인간입니다. 사도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6:10)라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그랬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도둑이 됩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배신자가 됩니다. 그런 도둑놈이 한 말을 어떻게 인정합니까?  
  
그러면 다시 유다의 한 말을 생각해 봅시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5)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지 않느냐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위선에 가득 찬 말입니다. 정말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서 한 말이 아니라, 돈이 아까워서 한 말입니다. 그는 가난한 자들을 빙자하여 돈을 훔치는 사람이었습니다. 6.25 후에 외국 원조로 들어오는 물자 떼먹은 사람들이 꽤 많았습니다. 요즘도 자선을 빙자하고, 사회사업을 빙자하여 치부하는 자들이 꽤 있어서, 선의의 자선가들이 피해를 봅니다.  

가룟 유다는 노린 동전 하나 남에게 준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남들에게는 왜 구제 않느냐고 비판만 합니다. 요즘도 교회가 구제 않는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 앞장서서 교회를 욕하지는 마세요. 따져봅시다. 한국 사회에서 교회만큼 구제를 많이 해 온 집단이 어디 있으며, 교회만큼 사회사업에 기여한 집단이 어디 있습니까?  

요즘은 그래도 이런 저런 단체에서 고아원도 하고 양로원도 하고, 교육 사업도 합니다. 그러나 전후에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 집단 아닌 고아원 양로원이 몇이나 있었습니까? 지금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헌혈, 장기 기증 사업, 개안 수술, 맹인 복지, 부랑아 수용, 교도소 교화사업, 양로원, 고아원, 미혼모 사업, 입양 사업, 사랑의 쌀.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손이 닿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한국 사회에서 ‘사회사업’ 하면, 기독교와 신자들과 교회를 제외하고는 논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쟁이들이 교회를 비판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 보아야합니다. 남을 위해서 동전 한 닢 내지 않으면서 남들에게 구제 안한다고 비판만 하는 자들은 틀림없는 현대판 가룟 유다들입니다.
  
사도 요한은 가룟 유다의 말보다 그의 사상과 행위를 문제 삼았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6) 가룟 유다는 도둑놈입니다. 도둑놈이 어떻게 자선을 언급할 수 있습니까? 다른 제자들도 마리아를 비판했지만 그들은 정말 가난한 자를 염려해서 마리아의 행동을 비판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자기가 챙길 돈을 생각하면서 그 말을 했으니 문제입니다. 가룟 유다는 배금주의자의 입장을 대변할 뿐이었습니다. 까마귀가 어찌 백로의 마음을 알겠습니까? 돈에 팔려 사는 유다가 신앙에 감격하는 마리아의 심정을 어찌 알겠습니까? 사람의 정신적 유산을 돈으로는 평가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부부간의 사랑을 돈으로 환산할 수 있습니까?  자녀로 말미암는 만족과 기쁨을 돈으로 환산할 수 있어요? 유물론자는 영적 세계의 가치를 모릅니다.  300데나리온 때문에 예수님 잃지 말고, 천국을 잃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향유 사건이 담은 의미

그러면 이제 마리아의 향유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본문을 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7-8) 예수님은 마리아가 생각하고 바친 것 이상의 특별한 의미, 특별한 가치를 거기에 부여하셨습니다.  
  
첫째로, 주님은 자신의 장례를 준비한 것으로 받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7) 본래 향유를 붓는 것은 잔치 집 풍속이지 장례 집 풍속은 아닙니다. 마리아도 만찬의 귀빈으로 기름을 부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리아의 향유를 자신의 장례 준비로 받으셨습니다. 

사실 주님은 유월절에 즈음하여 십자가에 죽으실 결심을 하고 예루살렘에 오셨습니다. 유월절 양이 죽임을 당하듯이 주님은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시기 위해서 죽음의 행진을 하러 오셨습니다. 주님이 죽으러 오셨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자신만이 아셨습니다. 마리아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리아의 향유로써 자신의 장례를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섬김을 큰 역사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작은 헌신을 귀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중심에서 섬긴다면 주님은 우리 마음을 받으시되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귀하고 더 크게 받으실 것입니다.
  
둘째로, 향유를 부은 타이밍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8) 시기적으로 적당한 때에 향유를 부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이웃은 언제나 있습니다. 구제의 타이밍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섬기는 일은 아무 때나 할 수 없습니다.  기회가 있습니다. 비싼 향유를 가졌다고 아무 때나 들어부을 수는 없습니다. 꼭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주님은 한주일 후면 죽임을 당할 처지에 있으셨습니다. 그러니 이 시점에서 예수께 향유를 바치는 일은 예수님 생애에 두 번 반복될 수 없는 단 한 번의 기회입니다. 모든 헌신에는 때가 있습니다. 마땅히 받고자 하실 때에 드리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도 주님이 쓰시려고 하시는 시기에 드려야지 내 할 짓 다 하다가 폐차 직전에 드려 봐야 별무소용입니다. 향유도 주님이 필요할 때 드려야 하고, 나귀 한 마리도 주님이 쓰시고자 하실 때에 드려야 제대로 사용됩니다. 시간도 주님이 요구하실 때 드려야 하고, 재능도 주님이 요구하실 때 드려야 합니다. 장례 때 장례 예물을 드려야 하고 잔치 때 잔치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보리떡 한 조각이라도 바쳐질 때에 바쳐져야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아의 향유는 시기적절한 것이었습니다. 이웃을 위한다는 핑계로 주님께 드릴 것을 외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때를 따라 향유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신앙과 구제의 우선순위 문제입니다. 8절에서 주님은 가난한 자를 섬기는 일과, 주님을 섬기는 일을 대조하십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의 對社會的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께 대한 신앙 자체를 뒤로 합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대 사회적 역할이 곧 구원이라고 강변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인간에 대한 어떤 선행보다도 우선할 일입니다. 모든 인간의 불행이 하나님을 떠난 데서 시작된 만큼, 모든 선행도 하나님께 돌아온 연후에 시작되어야 마땅합니다. 

사도 요한은 가룟 유다의 말을 논하지 않고 가룟 유다의 본성을 문제 삼았습니다.  시궁창에서 생수가 나오겠습니까? 고장 난 기계로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있습니까? 영혼이 더러운 자가 어찌 선한 일을 할 수 있고, 탐욕에 매인 마음으로 어찌 정의로운 행동을 하겠습니까? 기초를 닦지 않고 어찌 빌딩을 지을 수 있으며,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나무가 어찌 결실하겠습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품에 돌아가지 않고서는 도무지 선한 자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인간의 기준으로 볼 때는 자선가도 될 수 있고, 사회사업가도 될 수 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실 때에는 자기 명예를 위한 행동일 뿐, 결코 남을 위한 영혼의 사랑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만이 진정 남을 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마리아의 행동을 비방했습니다. 주님께 지나치게 바쳤으며, 가난한 자는 왜 돌보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는 근본 하나님도 섬기지 않았고, 따라서 가난한 사람도 결코 섬기지 않는 양면적인 배신자였습니다.
  
오늘 내가 주님께 부어드릴 수 있는 향유는 무엇일까요? 내가 가장 아끼는 것, 내가 가장 소중히 간직한 것! 그런 것을 드려본 적이 있나요?  오늘 그것을 드릴 수 있을까요? 드릴 수만 있다면 최고의 축복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몇 차례 향유를 부은 기억이 납니다. 

첫째는 20대에 목회자로 헌신할 때입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란 철학으로 살 때입니다.  설교를 듣는 중에 헌금 드릴 것이 없어서, 헌금 보자기 위에 올라서서 자신을 드렸다는 말씀이 내 마음을 뜨겁게 했습니다. “그래, 내 자신을 드리자!” 인생의 황금기, 청장년 기를 드리게 된 것이 내 인생 첫 번째 향유입니다. 

둘째는 교회를 개척하면서 가족을 드린 일입니다. 당시 저는 7 식구의 가장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2년 간 회사에 다니다가 신학교 간다고 그만두었을 때 누가 “미친 놈”이라고 했습니다. 가족을 어떻게 하려고? 당시만 해도 목회는 험난하고 배고픈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신학교에 다니면서 친구 전도사가 주는 성미를 얻어먹은 적도 있습니다. 그 때에 저는 사랑하는 아이들, 아내, 어른들, 다 순교해도 할 수 없다는 결정을 했습니다. 아브라함 같은 마음으로 가족들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셋째는 1991년 10월 18일, 전 재산을 드린 일입니다. 어머니께 물려받은 유산 1500 만 원을 1984년 교회를 개척하면서 700만 원은 전세 얻는 데 쓰고, 나머지는 예배당 공사에 바쳤습니다. 수년 후에 교회에서 사택을 구입하면서 전세금을 돌려받았습니다. 그 돈과, 집 사람이 먹지 않고 쓰지 않고 모아뒀던 돈을 합쳐서 1200 만 원을 놓고 고심했습니다. 이 돈을 어떻게 할 것인가? 땅이라도 몇 평 살 건가, 쪽방 집이라도 하나 살 건가, 주식 투자를 할 건가? 고심하다가 돈에 마음이 매이기 싫어 주님께 다 드렸습니다. 

이 모든 향유의 결과에 대해서는 제가 지금까지 주님께 천만 배로 돌려받았기 때문에 다 말씀드릴 수도 없습니다. 오늘 주님께 드릴 향유가 있다면 마리아처럼 한 번 부어 보세요.  그것도 때가 있습니다. 때가 지나면 부을 기회도 없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