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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의 믿음을 확인하라 (막 16: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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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믿음을 확인하라 (막 16:12-20)
 

우리 서로 얼굴을 보시면서 전후좌우 이렇게 인사하겠습니다. 
‘오늘 가까이서 뵈니 정말 멋지십니다.’ 

올 해 여름은 유난히 더운 것 같습니다. 연일 찜통을 방불케 하는 폭염 탓에 해가 진 뒤에도 온도가 내려가지 않는 열대야 현상이 15일간이나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날씨가 더우면 사람들은 땀을 많이 흘립니다. 땀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날씨가 더워서 흘리는 그냥 ‘땀’이 있고, 각자의 일터에서 흘리는 ‘비지땀’ 찜질방 같은 곳에서 강제로 흘리는 ‘강 땀’, 잠자다가 무서운 꿈을 꾸고 가위 눌려서 흘리는 ‘식은 땀’, 매운 음식을 먹다가 흘리는 ‘핫 땀’, 디자이너들이 흘리는 ‘한 땀 한 땀’까지 다양한 땀을 흘립니다.

그런데 올 여름에 흘린 여러 형태의 땀 중에 가장 감동을 주는 땀은 아마 2012 런던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국가대표 선수들이 흘린 땀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국가대표선수들이 모여 훈련하는 ‘태능선수촌’에 가면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땀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선수들은 이 말을 진리처럼 믿고 4년 동안 땀을 흘렸습니다. 여러분, 선수들이 흘린 땀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역도의 장미란선수가 4년 동안 수 백 키로의 바벨을 들어 올리며 흘린 땀을 생각해 보십시오. 
양궁의 기보배선수가 활을 쏘며 흘린 땀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유도의 김재범선수가 상대를 잡아 돌리면 흘린 땀이 얼마나 많을까요?
체조의 양학선선수가 하늘을 날면서 흘린 땀은 또 얼마나 많을까요?
손연재선수가 훌라우프와 공을 하늘로 던지며 흘린 땀이 얼마나 될까요?
무명의 권투선수가 주먹을 날리며 흘린 땀이 얼마나 될까요?
심지어 수영의 박태환선수가 물속에서 흘린 땀은 또 얼마나 될까요? 

이렇게 선수들이 흘린 땀은 정말 거짓말을 하지 않고 우리나라에 좋은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성경은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우리들을 경기장에서 달리는 운동선수로 비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말한다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를 대표하는 운동선수들입니다. 

세상의 운동선수가 목표를 향해 땀 흘리며 훈련하듯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대표선수가 되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기 위해 영적인 거룩한 땀을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운동선수에게 필요한 것이 실력이라고 한다면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선수가 땀을 흘리며 운동하는 이유가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듯이, 성도는 날마다 믿음을 향상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사람으로 끊임없이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 성장하는 것일까요?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믿음이 성장해 가는 방법을 찾아서 서로에게 은혜가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본문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12절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로 시작됩니까? ‘그 후에’
1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로 시작합니까? 역시 ‘그 후에’로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 후에’란 어떤 일이 일어난 후란 말입니까?
여기서 ‘그 후에’라는 말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그 후에’ 일어난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놀라운 부활의 사실을 여인들에게 보이셨습니다. 부활한 주님을 만난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달려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알렸습니다. 

그런데 이 부활의 소식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했을까요?

11절 하반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뭐라고 나옵니까?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13절 하반절도 보십시오.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인간의 상식과 경험을 뛰어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가 없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 한 분 의지하고 살아 왔습니다. 집도 떠나고, 직업도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신뢰했던 예수님이 그냥 죽은 것도 아니고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죽는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끈 떨어진 연처럼 이제 ‘어디에 가서 뭐 하며 살아야 할까?’ 하는 미래적 고민과 그 동안 예수님과 한 패로 살았던 자기들도 곧 유대인들의 손에 붙잡혀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동시에 몰려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두려움과 절망 속에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와서 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14절 말씀을 찾겠습니다. 함께 읽습니다.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아멘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무엇을 꾸짖었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14절 중반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은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 맥을 같이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것은 완악한 것입니다. 마음이 완악한 사람은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왜 완악한 마음으로 반응합니까? 그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으니까 복음 앞에 심령이 완악해 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마음이 열렸다는 말입니다. 심령이 열린 자에게만 복음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완악한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여러분의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심령의 빗장을 열어야 말씀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교회 문은 열고 들어와 앉아 있으면서 마음의 문을 닫고 계신 분이 없으십니까?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어떻게 열어야 합니까? ‘활짝 열어야 합니다.’ 한 번 따라 하겠습니다. ‘마음을 열자’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 없는 완악한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할 첫 번째 훈련은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장대비가 쏟아져도 창문을 닫아 놓으면 방 안에 물이 들어오지 않듯이, 마음이 닫힌 자에게 성령의 은혜가 들어올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이 활짝 열려지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주님은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한 가지 믿음이 없는 사람은 책망하십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세계는 믿음의 세계입니다.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끝이 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여러분, 나중에 누가 천국가고, 누가 지옥으로 갑니까?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지는 기준은 뭡니까?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 기준으로 사람을 보면 안 됩니다. 그 누가 세상 것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해도 믿음이 없다면 그의 최후는 심판이지만, 지금 비록 거지 나사로와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 할지라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면 구원받아 영생복락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다음세대인 자녀들에게 남길 최고의 유산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유산’입니다. 그런데 정작 남겨야 할 유산은 남기지 못하고, 남기지 않아도 될 것만 잔뜩 남겨서 가정에 어려움을 겪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고, 믿음으로 이 땅을 살아가다가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나 자라듯이, 우리의 믿음도 날마다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거친 세파에서도 뿌리 깊은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돌파하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큰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의 모두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믿음 있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종말의 때에 믿음의 사람을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해 갈까요?  

이제, 내 믿음이 성장하는 세 가지의 방법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말씀에 좀 더 집중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첫째, 믿음은 예배를 통해 세워집니다. 

한 번 따라 하겠습니다. ‘믿음은 예배를 통해 세워집니다.’

신앙의 성장은 예배드리는 횟수에 비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아야 믿음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신앙 성장은 나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의 손에 붙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를 경험하는 그 현장이 바로 ‘예배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변화 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예배에 참석하는 횟수를 늘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만남의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의 믿음은 점점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더 많은 예배에 참석해서 하나님의 능력 앞에 나를 노출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여름에 휴가를 얼마나 잘 놀았는지 아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옷을 벗겨 보면 금방 압니다. 옷을 벗겨 보면 목, 팔뚝이 새 까만 정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햇볕에 노출시킨 만큼 까맣게 타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노출된 시간만큼 은혜의 강도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제가 청년 때에 기도원에 들어가 일주일 동안 산 적이 있습니다. 그 기도원은 하루에 5번 예배를 드리는데, 매 집회 마다 참석을 한 겁니다. 기도원에 갔으니 제가 얼마나 은혜를 사모했겠어요. 국내 최고의 목사님이 오셔서 말씀을 전합니다. 한 번 참석해도 은혜를 받았을 것인데, 하루 5번씩이나 나를 하나님 앞에 노출 시켰으니 어떤 은혜를 받았겠어요.

나중에 일주일 뒤에 내려올 때 쯤 되니까 산신령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아무리 돌 같이 단단한 심령도, 완악한 심령도 하나님의 은혜에 자기를 노출 시키면 깨어지고 부드러워지는 것입니다. 예배에 여러분을 자주 노출시키십시오. 하나님은 예배마다 여러분의 얼굴을 보기 원하십니다. 

믿음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의 자리에 나와서 나를 노출 시킬 뿐입니다. 거룩한 일광욕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 네 안에 알 수 없는 믿음이 자라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배만 잘 드려도 믿음생활 하는데 부족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예배를 안 드리고 믿음이 자라는 방법은 없다는 말이 됩니다. 여러분, 무슨 일 때문에 2주 만 예배 안 드려 보세요. 벌써 믿음이 떨어집니다. 저 같은 목사도 휴가라고 어디 가서 한 달만 교회 얼굴을 안 보이면 그냥 종교인에 불과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나는 집이 멀어서 교회에 자주 못 온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핑계일 뿐입니다. 포항은 차로 30분이면 어디든지 다 갈 수 있습니다. 

‘나는 허리가 아파서 교회에 가면 오래 앉아 있을 수 없다.’는 분도 계십니다. 그러면 누워계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언제부턴가 교회 안에 ‘은둔형 외톨이 신앙인’들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은둔형 외톨이 신앙인’이 뭔지 아십니까? 

교회에서 드려지는 공적인 예배는 잘 참석하지 않고 집에서 혼자 책이나 보고, 인터넷 설교나 들으면서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해서는 건강한 믿음이 자랄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공적인 예배의 자리로 나와야 합니다. 예배에 나의 온 몸과 마음을 하나님 앞에 노출 시켜야 합니다. 

예배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현장입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하십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겁 많은 제자들이 어떻게 사도행전에서는 믿음이 충만한 복음의 증인이 되었을까요?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가 어떻게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는 순교자의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데 앞장섰던 바울이 어떻게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쓰임을 받았을까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믿음이 생긴 자들이 없습니다.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이라도, 비록 연약한 믿음이라도 믿음의 시작은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예배를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일까요? 바로 이 휴대폰입니다. 어른들은 물론이고 특히 교회학교 예배를 가보면 머리 숙이고 있는 애들은 딱 두 종류입니다. ‘잠자거나, 휴대폰으로 딴 짓 하거나’

제가 한남대학교 신학대학원 공부할 때 한 번은 공부하는 목사님들을 대상으로 가정세미나를 한 적 있습니다. 그 때 강사로 오신 분이 가정 사역으로 유명하신 송길원 목사이셨습니다. 

그런데 세미나가 시작하는 순간부터 한 목사님의 휴대폰에 전화가 온 겁니다. 강사님 얼굴이 싹 돌아가는 겁니다. 분위기가 안 좋았어요. 그런데 몇 분 뒤에 또 그 목사님 휴대폰에서 전화가 울리는 겁니다. 강사님, 강의를 하다가 1분 동안 말을 안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강의를 하시는데, 아니나 다를까 또 몇 분 뒤에 그 목사님 휴대폰으로 전화가 온 겁니다. 

송길원 목사님이 강의를 중단하시더니, ‘목사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목사님 교회에서도 그런 식으로 목회하십니까? 한 번 울렸을 때 끄셔야지, 몇 번씩이나 울리게 하는 것은 강사를 무시하는 행위입니다,’라며 그 자리에서 얼마나 야단을 치시는 겁니다. 원래 가정 사역 세미나가 재미있거든요. 

그런데 그 날 분위기는 최악이었습니다. 누구 때문에요. ‘그 휴대폰 안 끄고 앉아 계신 그 목사님 한 분 때문에...’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 분은 평생 예배시간에 휴대폰을 끄고 예배를 드릴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엄위하신 하나님의 존전에 최상의 예의를 지키며 예배하기를 바랍니다. 

마22:37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

요4:24절에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전심으로 예배하면 가슴에 믿음의 불이 붙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온 맘으로 예배하면 영이신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지혜의 왕이었던 솔로몬은 천 마리의 제물을 번제로 드리는 일천번제를 드림으로 예배하는 일에 자신의 전폭을 드렸습니다. 자신의 온 정성, 최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예배드렸을 때에 그 인생에 말로 다할 수 없는 복이 쏟아졌던 것입니다. 

예배는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임하도록 하는 통로입니다. 최후의 승리가 교회에 있는 까닭은 교회에 예배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배만큼은 반드시 굳건히 붙들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온전한 예배를 통해 믿음이 견고하게 성장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참된 믿음은 세상에서 검증되어 집니다. 

자신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가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은 세상에서 부딪쳐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믿음의 현장성’이라고 말합니다. 

교회 안에서 아무리 믿음이 좋다는 말을 들어도 그 믿음의 진위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국가대표 선수가 태능선수촌에서 아무리 땀을 흘리며 운동을 한다고 해도 그 실력이 평가되는 것은 대회에 출전해 다른 선수들과 부딪쳐 봐야 자신의 실력을 정확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는 세상에서 판가름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교회 안에서 ‘주여! 주여!’ 불러도 교회 문을 나가는 순간 나자빠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교회 안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는 분이 세상에서 멋지게 승리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지금 주님은 믿음 없는 제자들을 책망하시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1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라’고 말씀하십니다. 
20절을 또 보십시오. 제자들이 ‘나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믿음으로 제자들을 현장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고 가만히 움츠리고 있지 말고 세상으로 나가는 말입니다. 왜 믿음도 없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모는 겁니까? 

권투에서 감독들이 하는 말 가운데 ‘권투 선수는 맞으면서 매집이 생긴다.’는 애기가 있습니다. 참된 믿음으로 세상에서 부딪치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작은 믿음이라도 세상에서 부딪치고 깨지면서 자라는 것입니다. 넘어지면 교회에 와서 은혜 받고 또 세상에 나가서 도전하고 또 깨지면 교회에 와서 은혜 받고 나가서 부딪치는 과정을 통해서 강건한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우리의 신앙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애굽’과 ‘광야’와 ‘가나안’입니다. 

‘애굽’은 예수 믿기 전의 상태를 말하고, ‘가나안’은 우리가 들어가야 할 천국을 의미합니다. 그럼, 광야는 어디 일까요? 광야는 예수 믿고 살아가는 이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애굽은 분명히 나왔고, 가나안은 죽어야 들어가니까 지금 우리는 광야를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내 삶에 고난이 있는 것은 지금 우리가 어디를 걸어가고 있기 때문입니까? 광야를 걸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광야가 어떤 곳입니까? 성지 순례 때 다녀오신 분들은 조금 아시겠지만,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낮에는 40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에 살 수 없고 밤은 매서운 추위 때문에 살 수가 없습니다. 광야는 물이 없습니다. 씨를 뿌려 봐야 열매를 얻을 수 없는 땅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살 수 없는 광야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뭘까요? 광야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믿는 믿음밖에 없습니다. 

광야는 내 힘과 재주로 사는 곳이 아닙니다. 광야는 하나님께서 메추라기를 보내 주시고, 하늘의 양식인 만나를 비처럼 내려 주시고,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 나오도록 해 주셔야만 살 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살리신다는 것을 체험하는 곳이 바로 광야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사람에게는 광야가 있습니다. 과거에 광야를 경험했거나 아니면 지금 광야의 시간을 보내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나는 과거에 경험한 일이 없고 아직까지 없다고 말하시는 분들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곧 광야를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를 만났다고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을 여러분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광야를 만났을 때 진짜 믿음이지? 가까 믿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고난과 어려움을 겪을 때 그가 갖고 있는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가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인천에 있을 때 한 번은 교회에서 단체로 배를 타고 서해안에 고기를 잡으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 예기치 않게 풍랑을 만난 겁니다. 비가 내리고 바람도 거세게 불었습니다. 배에 물이 스며들어 왔습니다. 

그 때 나는 ‘여기서 이렇게 죽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두려워서 요나처럼 배 밑창에 들어가서 구토를 하고 뒹굴었습니다. 

그 때 어떤 집사님이 큰 소리로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고, 다른 교인들도 함께 살려달라고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진지한 기도와 찬양이었습니다. 나중에 겨우 풍랑이 잠잠해져서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그러자 몇 몇 교인들은 배에서 내리자 다시는 교회에서 하는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겠다고 화를 버럭버럭 내고, 담임목사님께는 ‘일기예보도 안 보셨냐?’고 따지는 교인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 때 나는 내 믿음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교회 교인들의 믿음을 한꺼번에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별 소리 다해도, 정작 조그만 풍랑만 만나도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두려움에 떠는 교인들의 보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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