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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의 권능이 임하는 기도 (행 4: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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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권능이 임하는 기도 (행 4:23-31)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사도행전 4장 23-31절)

저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살았기에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신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착각임을 깨닫게 된 첫 사건이 유치장에 갇혔을 때였습니다. 신학생 때, 당시는 대학교에서 날마다 데모가 있었습니다. 광화문 거리에서 불심검문을 당했는데 제 가방에서 시국토론회 원고가 나온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데모 주동자로 몰려 유치장에서 하루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유치장에 들어가 취조를 받는데, 제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내 인생이 여기서 뒤틀어지는구나.” 

그동안 가정과 교회라는 온실 안에서 있던 제 믿음은 유치장에서 다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하나만 가지고 나보다 더 당당한 청년들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이 정도인가?’라는 생각에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 때부터 다른 사람의 믿음이 좋다 나쁘다 하던 비판이 사라졌습니다.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느낀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평생 감옥에 갈 이유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들이 감옥에서 하루를 붙들려 지내며 매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공회는 사도들에게 예수 이름 사용 금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다시는 예수에 대해서 얘기하지 말라.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위협을 받았을 때, 그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그런데 그들은 담대하였습니다.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행 4:24)

애절하고 조급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살려 달라, 도와 달라, 어려움이 사라지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당당하게 하나님이 천지의 주재자이심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었고 그들은 정말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까? 교회에 다니며 주일예배에 출석하는 것입니까? 흔히 ‘그리스도인들은 이러 이러한 것들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술 마시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도박하지 않고 담배 피우지 않으며 세상에서 도덕적 가치들을 지키며 선한 삶을 사는 것입니까? 아니면 특별한 종교 체험, 곧 성령체험을 한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까? 

어떤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그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신앙생활 잘해왔다고 자부하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인생의 위기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을 봅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을 곧잘 합니다. 신앙이야말로 정말 그렇습니다,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이 닥치고 모든 길은 막히고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을 때 여전히 평안하고 오히려 감사가 된다면 그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다 죽여 없애 버리겠다는 위협을 받았을 때, 사도들은 기도했고 그들의 기도에 하늘의 권능이 임하였습니다, 기도하던 곳이 진동하였다고 했습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행 4:31)

사도들은 더욱 성령 충만해졌습니다. 다시 강력한 성령의 임재하심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사건을 제 2의 성령강림이라고도 말합니다. 
사도들이 도대체 어떻게 기도하였기에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들은 환란 중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천하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이심을 고백하고 찬양하였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믿음을 가진 자가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도들이 믿은 하나님은 철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막연한 하나님에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며 자기와 함께 하심을 알았습니다. 사도들이 이처럼 하나님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성령 충만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의 목적이 죄 사함의 확신을 주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아주 틀린 것은 아닙니다만, 그것은 한 단계에 불과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입니다. 이것이 기도생활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사도들은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알았기에 무시무시한 권력기관인 산헤드린이 죽이겠다고 위협하고 헤롯 왕과 총독 빌라도가 위협을 해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원하기만 하면 온 우주라도 동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 앞에 이 당국자나 권력자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긴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런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어려움을 없애달라, 환란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했습니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행 4:29-30)

한마디로 감옥에 들어가도 좋고 매를 맞아도 좋고 죽임을 당해도 좋으니 오직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적이 나타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사도들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것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성도의 기도입니다. 

저는 설교준비하면서 참으로 중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악한 자들이 사라지고, 환란이 사라지게 해 주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마나 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가 다 제거될 때가 옵니다. 그러나 그 때는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가 완전히 구분되는 날입니다, 그 때까지 전도해야 하고 그 때까지 악한 세력은 역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우리는 오직 사도들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계속 하겠습니다! 박해가 있든지 환란이 오든지 주의 복음 증거는 계속되게 하옵소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사와 이적이 계속 일어나게 하옵소서!”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어 이루는 방법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일에 동참시키려고 기도를 시키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읽어 보면, 성령의 역사가 먼저 시작되고 그보다 한 템포 늦게 성도들의 기도가 따라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기도가 가장 먼저 기술된 곳은 1장 14절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약속을 붙잡고 마가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며 기다린 것입니다. 

성령강림은 사도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아닙니다. 성령강림은 기도하기 전에 이미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고 기다리는 순종의 표현이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 교회는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고, 예수의 이름으로 병든 자가 고침 받고 많은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사도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후 사도들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이 역사가 계속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핍박을 당할 때도, 사도들은 권력자들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간구하지 않고 그 위협에도 불구하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 달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와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게 해 달라고만 기도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할 때, 하늘의 권능이 임하여 땅이 흔들리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1806년 미국 윌리엄스 대학 교정의 숲 속에서 사무엘 제이밀스를 비롯한 6명의 대학생들이 불신앙이 가득한 학생들과 구별하여 학교 뒤 단풍나무 숲에서, 매일, 소나기를 맞으면서도 세계 선교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것이 불씨가 되어 19세기 20세기를 거치면서, 미국 대학을 중심으로 영적 대각성운동이 일어났고, 세계 선교의 찬란한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1904년 영국 웨일즈에서 에반 존 로버트를 중심으로 탄광 노동자들이 모여서 기도모임을 만들었는데, 모일 때마다 “영적 부흥을 주시옵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들의 간구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1904년부터 1906년 사이에 1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것을 웨일즈의 대부흥이라고 말합니다.    

안산에서 젊은이교회를 창립할 때, 한 청년이 간증하였습니다. 

<제가 처음 청년부에 올라왔을 때, 몇 안 되는 언니 오빠들과 토요예배를 준비하시는 전도사님을 보면서 참… 썰렁했었습니다. 청년부에서 아무리 이런 저런 행사를 준비해도 나오는 청년들만 나오고 있었습니다, 전 학교에서 여의도순복음교회 소속 기독교 동아리 CAM에 가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향한 청년들의 뜨거운 사랑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지체들을 섬기며 자기의 것들을 드리는 그들이 부러웠습니다. 순복음교회의 청년 금요철야도 따라가 많은 젊은이들의 뜨거운 열정도 보았습니다. 정말 은혜로웠습니다. 그러나 토요일과 주일에 우리 교회로 와보면, 참 안타까웠습니다. 아니 화가 났습니다, 왜 우리 교회 청년들은 이 모양일까 하구요.

그 때 저를 양육해 주던 언니가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이런 모습들을 보고 안타까워하거나 화만 낼 것이 아니지 않니? 우리는 우리 교회 청년들에게도 그런 부흥이 임하기를 기도해야 하지 않겠어?” 
그때서야 저는 제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도 순복음교회 청년들만큼 부흥하고 주님을 향한 비전을 품게 해달라고. 

어제 젊은이 예배가 창립되었습니다. 어제까지도 전 이것이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청년들을 부흥시키시려고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음을 깨달았습니다.>


기도의 핵심은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기도도 제대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 받았다고 누구나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해석을 잘못할 때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1장에 가면 성령께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체포당할 것을 미리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만류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왜 기도하셔야 했습니까?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은 누가복음 22장 42절에서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신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가지셨기 때문에 육신의 소욕이 있으셨습니다. 배고프고 피곤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재발견하고 확인하고 확증해 가신 것입니다. 

우리도 기도 중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 성령께서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사도들은 환란을 당할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오늘 본문 25절부터 28절을 보면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시편 2편을 통하여 모든 세력이 합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대적할 것에 대하여 예언하셨음을 깨닫게 해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
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런 일이 있으라 하셨군요! 그렇다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더욱 이루어지기만 원합니다” 하고 기도한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무슨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고가 났습니까? 병이 들었습니까? 자녀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큰 손해를 봤습니까? 하나님이 관여하시는 중에 발생한 일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아시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면 기도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제게 하시려는 일이 무엇입니까?” 

제가 아는 한 중소기업 사장은 지금 매우 큰 곤경에 빠져 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름대로 기도한다고 했는데, 왜 이런 어려움이 오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때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나는 사업만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이제야 저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더 원하시는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기도가 바뀌고 회사의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처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감리교 목회자 기도모임에서 한 목사님이 애통함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저는 주의  종이면서 주님의 기쁨은 생각하지 않고, 나의 기쁨만 구하고 있었습니다. 종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에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필요하신 곳, 주님이 안타까워하시는 곳에 있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종이 기쁜 것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야 합니다!’ 내가 기뻐할 것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면 된다는 것을 깨닫고 기도하니 모든 것이 달리 보였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 구하면 나는 어떻게 됩니까? 아닙니다, 그것이 가장 놀라운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자아가 죽지만 않으면 우리는 시작부터 끝까지 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실컷 구하고 나서도 “못 다 구한 것까지 주실 줄 믿습니다!”라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도처럼 불쌍한 기도는 없습니다, 응답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 소원보다 훨씬 놀라운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3장 20절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라고 했습니다.

새들백교회 릭 워렌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기도와 간구에 응답하지 않으심에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학생 때 결혼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녀와 결혼하지 않은 것을 너무나 기뻐합니다. 저는 여러번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 지금쯤은 그것을 응답 받아야 합니다’라고. 그러나 뒤를 돌아보면, 저는 그때에 그것을 응답 받아서는 안되었습니다. 만약 제가 그것을 그때에 받았더라면 저에겐 말할 수 없는 손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기다렸기 때문에 그 응답은 너무나 크고 좋았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무엇을 줄까?”라고 물으셨을 때 자기를 위한 것들을 구하지 않아서 엄청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종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왕상 3:10-13)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고 기도하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에 구경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하는 우리의 기도는 사실 하나님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최상의 간구입니다.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The People’s Church 목사 오스왈드 스미스는 30세 되던 생일에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평생 이 기도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구하지도 않았던, 당대 유명하고 존경받는 목사가 되었으며, 그가 목회했던 교회는 한때 세계 최대의 교회로 부흥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나를 위한 기도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구했을 때가 장애인이 될 위기에 처했던 때, 군인병원에서 드렸던 기도였습니다, 저는 그날 예수님을 나의 생명 나의 구주로 영접하여 거듭났습니다, 그리고 기도가 바뀌었습니다, 오른쪽 다리를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두 다리 멀쩡한 채로 사는 것 보다 비교할 수없이 좋은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내 종아 수고하였다” 하는 말씀 한마디 듣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소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나의 축복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다른 어떤 기도가 필요하겠습니까? 
“오직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유기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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