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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바 아버지 (갈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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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 아버지 (갈 4:1-7) 

미국은 지난 25년간 생물학적인 아버지와 떨어져 사는 자녀가 배로 늘어났으며 그 숫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헌신적인 아버지 없이 자라난 아이들이 가난, 질병, 죽음을 겪거나 비행, 범죄, 마약을 하거나 성적 부진, 퇴학, 아버지 부재의 대물림 가능성이 훨씬 많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또한 미국 중산층 가정에서 아버지들이 자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하루 평균 15-20분에 불과하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반면에 아이들이 TV나 컴퓨터 앞에 있는 시간은 일주일에 평균 30-50시간이나 됩니다. 이것이 미국 아버지들만의 문제일까요? 

한국도 90년대 이후로 사회가 급변하면서 아버지의 위상이 빠른 속도로 추락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년남자를 비하하는 것을 소재로 한 유머들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유머 중에 이사 시리즈가 있습니다. 이사 갈 때 남편이 먼저 이삿짐 트럭에 타고 있어야 한답니다. 아니면 버리고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요즘에는 트럭에 먼저 타는 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제는 아예 트럭 채 버리고 가는 살벌한 세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내가 아끼는 강아지를 꼬옥 껴안고 트럭에 타야한답니다. 아버지들이 듣기가 씁쓸하죠? 전통적인 가족관이 점점 무너져가다 보니 전에 가졌던 아버지상이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어떤 느낌이 들까요? 자기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가 좋든 나쁘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에 영향을 끼칩니다. 자상한 아버지의 이미지를 가진 사람들도 있겠고, 폭력을 휘두르거나 소리치는 무서운 아버지 이미지를 가진 사람들도 있겠고, 전혀 아버지에 대한 느낌이 없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러도 아무런 감동이 없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감격 때문에 삶의 변화가 있었다는 고백을 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요즘 미주에 있는 한인 교회들을 중심으로 아버지의 위상을 회복하자는 취지에서 아버지 교실이 활발히 열리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도 여러 아버지들이 참석한 줄로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는지 그 이름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우리들이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 전에는 율법의 종노릇 하였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는 경우가 뉴스에 가끔 나옵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미망인이었던 재클린과 결혼을 했던 오나시스는 억만장자였지만 직계 자녀들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그의 손녀가 많은 재산을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나이가 어렸던 지라 법정관리인이 그 재산을 관리해야 했습니다. 그 손녀가 비록 상속자이기는 하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다 쓸 수는 없었고 성인이 될 때가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없다는 점에서 보면 그 손녀나 관리인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바울 당시에 부유한 집의 주인들은 상속자인 자기 자녀가 어릴 때에 후견인과 청지기 손에 맡겼습니다. 후견인은 주인의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는 등 일반적으로 돌보아주고, 청지기는 그 가정의 살림을 관리합니다. 그 아이는 주인의 아들이 분명하지만 주인의 종에게 또 하나의 종처럼 취급당합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자라서 성년이 되면 후견인이나 청지기는 더 이상 그를 간섭할 수 없고 아들로서 자유를 누리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후견인과 청지기의 비유를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율법 아래 살던 사람들에게 적용합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유업을 이을 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초등학문 아래에 있게 하셨습니다. 초등학문은 유대인들의 율법과 규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닌 율법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율법은 그들에게 후견인과 같았고 청지기와도 같았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까지 이스라엘 자손들을 보호하고 있다가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며 아들로서 유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종교심이나 기본적인 양심이 있기 때문에 종교적 율법이나 양심의 법을 지키면서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럴 때 지켜야만 된다는 부담이나 강박관념이 생기기 때문에 사람들은 율법이나 양심의 종노릇하는 기분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주님의 주시는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게 억눌려 지내기 쉽습니다. 

* 자녀를 삼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1)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셔서 그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아들의 명분을 얻는 길을 얄어 놓으셨습니다. 

- 예수님은 여자에게서 나셨습니다

원시복음이라 불리는 창 3:15에는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창세기에서 약속된 구원자인 ‘여자의 후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자의 도움 없이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의 몸에서 죄 없이 탄생하셨습니다. 

- 예수님은 율법 아래서 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여 자녀로서의 온전한 권리를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속량이라는 말은 ‘사서 자유케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노예를 자유케 하려면 먼저 노예의 주인에게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들을 자유하게 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백성은 율법 아래 있는 종과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율법 아래 복종시키시고 율법을 지키시고 율법의 저주까지 십자가에서 받으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율법 아래 있던 그분의 백성들을 자유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율법 아래에서 종노릇하던 우리들을 법적으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법적으로만 자녀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난 후 성령을 보내심으로 아들의 영이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고(롬 8:16),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셔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겔 36: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성령은 구원의 첫 열매일 뿐 아니라 완성된 구원에 참여하리라는 보증 역할을 합니다.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의 마음이 아버지와 통하게 되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다정하게 부르게 되었습니다. 지혜가 없어 하나님께 ‘아바 아버지’ 기도하면 지혜를 주시고 능력이 부족할 때 ‘아바 아버지’ 부르며 기도하면 능력을 주십니다.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녀 삼아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삼아주신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아바 아버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1) 아버지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바로 알며 그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짐으로 시작됩니다. 사실 우리가 믿기 전에는 마귀의 종으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요 1:12에 의하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됩니다. 따라서 성도로서 가장 큰 영광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나 예수님 당대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로 부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이러한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하나님에 대한 불경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부르게 하심으로써,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일깨워주심으로써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 가까이 계시면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은혜로운 분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마다 우리 자신이 사랑받는 자녀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이야기하듯 단순하면서도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기도를 어떻게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믿음으로 부르는 ‘아버지’ 한 단어로도 족합니다. 아버지만 계속 불러도 좋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담겨져 있고 사랑을 가지고 보살피는 아버지에 대한 친밀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2)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십니다. 이는 공간적으로 하늘과 땅의 구별하는 개념이 아니라, 땅에 있는 육신의 아버지와는 다른 분이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고백하는 표현입니다. 그분은 능력과 지혜와 사랑에 온전하십니다. 반면에 땅에 있는 아버지는 허물이 있고 인격적으로 부족합니다. 때로는 잘못된 훈계를 하기도 하고 감정에 따라 움직이기도 합니다. 또한 자녀들과 언제나 함께 하며 그들의 미래에 대하여 온전히 책임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완전한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마침내 하나님 아버지 집으로 인도하십니다.


3) 우리 아버지

예수님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부르셨습니다. 물론 우리도 큰 감격으로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고백할 수 있지만 보통은 하나님을 ‘우리’아버지로 모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될 때, 성도는 모두 형제요 자매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한참 방안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가족들이 찾아와 밖에서 기다렸습니다. 가족들이 밖에서 찾는다는 전갈을 받고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반문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담긴 예수님의 본 마음은 무엇일까요? 혈연적인 가족관계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 마리아를 사랑하고 그에게 순종하여 받들었으나 공생애가 시작된 후로는 더 이상 가정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역에 전적으로 헌신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막 3:35) 

하나님 나라 가족은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자들로 구성되는 영적인 관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는 주님의 가족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받은 은혜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감동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고 계십니까? 먼저 알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랑은 바로 자기 아들을 희생시킨 사랑입니다. 우리에게도 분명히 이러한 감격의 순간이 있었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그 감동을 잊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하면 날마다 새로운 감동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을까요?

1)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2차 세계 대전 중에 독일에 의하여 자행된 유대인 600만 학살사건을 추모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기념관이 지어져 있는데 그 이름이 ‘기억하라’는 뜻을 가진 ‘아드바심’입니다. 그 기념관 입구에는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전시물들을 통하여 그곳에 들어오는 유대인 후손들이 그 아픔과 고통의 순간들을 잊지 않도록 합니다.

물질적 풍요와 삶의 여유는 누구나 바라는 바이지만 자칫하면 영적 나태와 방종 가운데 빠지게 될 수 있습니다. 마치 그러한 풍요가 행복을 가져다 줄 것으로 생각하면서 우상숭배에 빠지면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신명기 8:12-13절을 보면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삼가 조심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를 걸어가는 이스라엘을 걱정하신 것이 아니라 가나안에 들어갈 이스라엘을 걱정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될 때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아무 부족함이 없을 때 먹어서 배부르고 옥토에서 거하게 될 때 누가 그러한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기억해야 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사실 출애굽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 어느 누구도 바로의 압제에서 풀려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전권을 가지고 바로에게 나아갔지만 바로는 모세를 우습게 여기며 자기 백성을 보내달라는 모세의 요청을 번번이 거부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된 것은 그들이 숫자가 많거나 싸움을 잘해서가 아닙니다. 평소에 하나님을 잘 섬겼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기억하시고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야 길을 갈 때 그들을 돌보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하늘 문을 여셔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여주시고 반석을 깨뜨려 물을 내신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날까지도 유월절을 지키면서 3500년 전에 그들을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금주 수요일은 67번째 맞는 광복절입니다. 선열들의 피가 뿌려진 땅에 하나님의 은혜로 일본으로부터 나라의 주권을 회복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된 것은 우리가 일본보다 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철저하게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고 그분의 은혜입니다. 

해방 후에 6.25 전쟁의 소용돌이도 있었고 가난하고 배고프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한국이 10대 경제대국에 들게 되었고,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오늘 폐막하는 올림픽에서도 금메달 수로만 따진다면 5위를 했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게 웬 은혜입니까? 마지막 때에 제사장 나라 직분을 감당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 또한 미국 땅에 이민자로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어떻게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는 우리가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긍휼을 얻지 못하던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벧전 2:10).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요, 사망에 덫에 걸려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진노의 자식들이요 멸망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자리에 서 있었던 가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도무지 받을 수 없던 우리에게 하나님은 한없는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모시는 성도의 바른 자세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 103:2)

2)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그 마음에 샘솟듯 느끼기 원한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케 하십니다. 우리의 가슴이 식어지고 성령의 역사가 약해지는 것은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 안에 항상 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롬 8:26-27,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무엇을 구할지 모를 때에도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기도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 구할 바를 바로 알고 바로 구하게 됩니다. 육신이 약하고 사업에 어려운 부분이 있고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고 믿음의 진보가 없는 상황에서도 아이가 부모에게 맡기듯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아버지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응답하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왜 보너스까지 주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3)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신앙생활 하는데 왜 이처럼 고난이 많은가? 하는 생각이 들 때 답답해집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과 그분께서 주실 영광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에게는 언젠가 부자상봉의 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엄청난 일이 앞에 기다리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언행에서 달라집니다. 

요일 3:3을 보면,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우리가 예수를 믿은 후에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문제는 바로 죄의 문제일 것입니다. 우리는 죄와 싸우지만 부끄럽게도 자주 죄를 짓고 자기를 더럽히게 됩니다. 

그런데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는 표현은 결코 강요와 억지가 아닌 스스로 즐거운 마음으로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의 위대한 힘, 아버지를 만난 소망의 능력이 우리를 죄의 힘으로부터 떼어놓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아름다운 유업을 물려받을 복된 사람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더 이상 아프게 할 수 없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언젠가 아버지를 만날 텐데 깨끗하지 않고 그분 앞에 설 수 없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늘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며 끊임없이 우리의 부족함을 버리고 비우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됩니다. 

세상과 구별된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를 담대하게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환경이 아니라 그 환경 너머에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우리들의 확신입니다. 롬 8:39,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현재의 삶이 아무리 고달파도 장래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것이기에 위로를 받습니다.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깨닫는 자들마다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서도 항상 기뻐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모시는 자들의 삶의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종은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아이는 자기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며 친밀감을 표시합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의 종노릇 하는 사람들에게 율법은 두려움과 속박을 주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신하게 하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다정하게 부르게 됩니다. 

이런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즐거이 헌신하게 됩니다. 믿는다 하는 모양은 있으나 하나님의 간섭을 싫어하며 여전히 자기가 자기의 삶의 주관자로 역할을 하기 원하는 사람은 참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인가 함으로 무엇을 얻겠다고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받은 구원에 감사하여 주님을 섬깁니다. 신앙생활은 날마다 우리의 옛사람이 죽어가는 과정이요 그리스도의 거룩한 형상을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특권을 받은 성도들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세상의 모든 염려 근심이 아버지의 이름 앞에 녹아지는 역사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곁에 계신 아버지의 손길을 가슴으로 영으로 느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인도함을 받으시며 주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사시면서 돌아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복된 간증을 할 뿐 아니라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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