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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시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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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시 23:1-6)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23편에 대한 강해설교로, 오늘은 그 세 번째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라고 한 3절 말씀을 중심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이 구절은 지난 시간에 상고한 2절 말씀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는 구절과 깊은 연관이 있는 말씀입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휴식케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기 위해서입니다. 공동 번역 성경을 보면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원수들 보라는 듯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 부어 내 머리에 발라 주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고 했습니다.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이렇게 휴식의 목적은 심신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것입니다.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해변에서, 울창한 숲속의 맑고 시원한 계곡에서 취한 얼마 동안의 휴식은, 심신 전체에 새로운 기분과 활력을 제공하며, 그리하여 인생이라는 고달픈 전쟁이나 사업에 대비케 해줍니다. 그래서 바캉스는 이제 우리 생활에서 빼놓을 수없는 중요한 삶의 요소로 자리를 굳혀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라는 말씀이 필요할까 반문할는지 모릅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사람이, 다시 회복을 필요로 할 만큼 영혼의 고통과 슬픔에 빠질 수 있을까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 누구보다 하나님께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이 시편의 저자 다윗도, 넘어지고 쓰러진 일이 있었습니다. 무서운 시험에 빠져 쓰라린 실패와 좌절에 부딪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6편 같은 곳을 보면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소서.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며,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고 했습니다.

필립 캘러 목사는 넘어진 양, 곧 낙심한 양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생생한 체험을 들려줍니다. 그의 체험에 의하면 양처럼 한 눈을 잘 팔고, 잘 넘어지는 동물도 없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살찐 양이나, 새끼를 밴 암양은 가장 넘어지기가 쉽다고 합니다. 몸집이 무겁거나 살찐 양은 편안하게 눕기를 좋아하는데, 몸의 중심을 잃고 넘어져 발이 땅에 닿지 않게 되는 경우, 제힘으로 다시 일어서기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나자빠진 양은 발로 허공을 치면서, 살려 달라고 울부짖고 몸부림쳐 보지만, 그럴수록 사정은 더욱 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양이 누워서 바동거리고 있는 동안, 위에 가스가 형성되기 시작하고, 이 가스가 확산되면 혈액순환을 방해하고 사지를 마비시키게 됩니다. 그리하여 무더운 여름 날씨의 경우, 넘어진 양은 서너 시간 지나면 목숨을 잃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넘어진 양은 매, 독수리, 들개, 늑대에게 가장 잡아먹히기가 쉽다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목자의 눈에도 뜨지 않는 곳에서, 홀로 넘어져 발버둥치는 양은, 미칠 듯한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양치기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양들의 수를 세어 봅니다. 그리고 없어진 양을 발견하게 되면, 지체 없이 찾아 나섭니다. 여러 시간을 찾아 헤매다가, 멀리서 넘어져 발버둥치고 있는 양을 발견하게 되면, 있는 힘을 다해서 뛰어갑니다. 1분 1초가 양의 목숨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넘어진 양을 일으켜 세우고, 다리를 문질러 혈액순환을 회복시켜 주면, 양은 다시 일어나 정확하게 걷습니다. 마침내 넘어진 양은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양떼 가운데로 뛰어가 두 번째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 18:12-14에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길 잃은 양을 찾는 목자는, 바로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넘어진 양을 일으켜 세우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마 9:35-36에 보면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 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고 했습니다. 

목자가 없는 양, 목자를 잃어버린 양, 목자에게 속하여 있지 아니한 양은 얼마나 가련한 양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떠난 인생을 목자가 없는 양으로 보셨습니다. 목자가 없는 인생을 민망히 보시고 불쌍하고 측은하게 보셨습니다. 죄악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마귀의 발톱에 찢기고 상하여, 만신창이가 된 그의 양들을 찾아 구원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영혼 구원만이 아닌 전인 구원이어서, 모든 앓는 자,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자, 중풍병자, 혹은 소경을, 혹은 앉은뱅이를 고쳐 주셨습니다. 중한 병, 불치의 병에 붙들려 넘어진 인생들을 일으키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지금도 얼마든지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면 ‘새롭게 하소서’ 라는 방송 프로가 있습니다. 이 프로에 출현하는 사람들의 얘기는 대부분 질병이나, 사업의 실패, 인생의 실패에서 건짐 받은 간증들입니다.

시 56:13에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치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단 건짐 받고, 구원받은 성도들이라도, 이 말씀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신자들이 넘어질 수 있습니까? 얼마든지 넘어질 수 있습니다. 잘 믿던 신자들이라도 넘어질 수 있고, 잘 믿던 장로 집사라도 넘어질 수 있고, 유명한 목사라도 얼마든지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성도들이 넘어지게 됩니까? 양이 넘어지는 경우를 살펴보면, 성도가 넘어지는 것과 매우 유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양들은 부드러운 장소를 찾으려다 넘어진다.

눕기에 편안하고 부드러우며, 움푹 들어간 장소를 택한 양들은, 빈번히 넘어진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도 항상 이러한 위험이 따릅니다. 그래서 좀 더 편하고 안일하고 쉽게 믿으려고 합니다. 새벽기도는 무당의 푸닥거리라 하고, 십일조 헌금은 율법적인 것이라 비난을 합니다. 주일 성수도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필요 없다고 합니다. 구원파 같은 이단들이 기성 교회를 공격하면서, 복음적이라는 미명으로, 쉽고 편하게 예수 믿으라고 유혹을 합니다. 

그리하여 일주일 동안 주일 낮 예배 한 시간으로 만족하고, 필요하다면 그 한 시간도 얼마든지 마음대로 사용해 버립니다. 주님을 위해 무엇을 억제한다던가, 희생한다던가, 인내한다던가 하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원하는 길과, 눈에 보는 대로 좇아 행합니다. 근래에 와서 천주교가 인기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유럽이나 미국의 교회가 쇠퇴해 가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물론 거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몇 가지 예를 들면,

1)주일날 교회에 가기 싫으면 침대에서 T. V를 켜 놓고 뒹굴며, 남들이 예배드리는 광경을 보는 것으로, 그 날의 예배를 대신 합니다. 물론 이 사람들에게는 수요 예배나, 금요일 구역 예배나, 매일의 새벽기도 같은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2)미국 같은 경우, 여름철이면 A 교회와 B교회가 피서를 위하여 서로 합하여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교회 목사가 피서를 가서 아주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많아서, 한 해 여름철에만도 수백 개의 교회가 문을 닫는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한인 교회는 처음엔 미국인 교회당에 세 들어 예배를 드립니다. 한인 교회는 점점 부흥하고, 미국인 교회는 점점 쇠퇴합니다. 마침내 미국인 교회는 한국인에게 교회당을 매각하고, 거꾸로 한국인 교회당을 세로 얻어 모인다고 합니다.

오늘날 한국의 교회는 어떠합니까? 불과 115여 년 동안에 걸친 한국 교회의 부흥상은, 2천년 기독교회사중 유래를 찾아볼 수업을 정도로 눈부신 성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온 세계 기독교회의 경탄과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저 콧대 높은 일본인들까지도, 신앙만큼은 한국 교회에서 배워야 하겠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들이 깊은 산 속에 있는 기도원을 찾아 갈 때, 마치 성지순례를 하는 자세더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심지어는 천주교회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까지도, 앞으로 세계 교회의 희망을 한국 교회에 두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한국 교회의 이와 같은 성장을 가져왔습니까? 1)하나님의 특별하신 축복이요 2)순교자들의 피가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이요 3)한국 교인들의 열심 때문입니다. 한국 교인들은 열심히 모입니다. 주일 낮, 주일 밤, 수요일, 금요일, 매일의 새벽기도, 철야기도. 금식 기도...등등. 열심히 전도하고, 열심히 헌금합니다. 물론 한국 교회의 허물도 많지만, 이렇게 장점도 많은 것입니다. 만일 한국 교회가 구미 교회처럼 쉽고, 편하고, 안일하게, 신앙생활을 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성장이 있었을까요? 결코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아이가 어렸을 때 웅변 학원에 다닌 적이 있었는데, 어떤 웅변 원고의 내용을 보니, 부모의 잔소리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부모님의 잔소리가 몹시 귀찮게 생각되었지만, 좀 더 철이 들어서 생각해 보니, 그것이 자신의 성장에 아주 좋은 약이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목사가 자꾸 주일을 성수 하라. 십일조 생활을 하라. 기도하라. 전도하라. 성경 읽어라. 수요 밤 예배 나오라 하는 말이 잔소리로 여겨지고, 그래서 딱 질색입니까?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을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목사의 사랑에서 우러나온 충정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쉽고, 편하고, 안일한 것을 탐하고, 게으름 피우면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2. 양들은 너무 많은 털 때문에 넘어진다.

양은 털이 너무 길게 자라거나, 털이 진흙과 똥과 가시와 그 밖의 여러 가지 부스러기들로 무겁게 엉켜 있을 때, 몸의 무거운 체중 때문에 넘어지기가 쉽습니다. 털은 그리스도인의 낡은 생활을 의미합니다. 무거운 털로 인하여 자꾸 넘어지는 양은, 즉시 털을 깎아 준다고 합니다. 이 털을 깎는 것이 양치기에게도 힘들고 또 양들은 털 깎이우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끝나면 양과 주인은 완전히 해방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낡은 생활을 다루는데 있어서, 주님께서도 때로는 날카로운 칼을 사용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완고한 것, 탐심, 미련, 혹은 우리 영혼의 병든 부분들을 자르고 도려내시기 위해서, 날카로운 메스를 가하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그러한 주님의 처방이 못마땅하고 싫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같은 일을 통해서, 넘어진 성도들이 일으켜 세워지고, 다시 믿음을 회복하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3. 비대한 양들은 자주 넘어진다.

비대한 양은 건강하지도 못하고, 생산성도 약할 뿐만 아니라, 비대한 양일수록 더 잘 넘어진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은 위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건강하고, 사업이 잘되고, 유복할 때, 위험한 안정감과 자신감을 갖게 되고, 그리고 그러한 때가 가장 쓰러지기 쉬운 때인 것입니다. 1)다윗이 간음죄와 살인죄를 짓고 넘어질 때가 언제였습니까? 2)라오디게아 교회에 하신 경고가 무엇입니까?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난한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차지도 덥지도 아니하도다-히에라볼리에 있는 온천이 6k 떨어진 라오디게아에 도착하면 미지근해진다)

여러분이 분명하게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물질적인 부요가 정신적인 또는 신앙적인 건강의 척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외관상의 풍요나, 안정이나, 행복이, 참다운 신앙의 표준도 결코 아닌 것입니다. 신자들이 편하고, 쉽고, 안일하게, 게으르게, 신앙생활 하려다가, 낡은 자기의 옛 자아나,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생활 때문에, 또는 평안하고, 유복하여 안정감과 자신감을 갖고 살다가, 그만 넘어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적인 곤경에 빠졌을 때,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1)범죄한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내시사 다윗의 영혼을 소생케 하셨습니다. 2)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저주까지 한 베드로에게, 주님은 직접 찾아 오셔서, 그 영혼을 소생시켜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후일 주님을 위해서 순교까지 하는 충성된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이러한 성도들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가 범죄한 적이 어디 한두 번입니까? 의심한 적이 한 두 번입니까? 낙심한 적이 한두 번입니까? 아마 그만 믿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넘어진 우리를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일으켜 세우시고, 우리의 영혼을 소생케 하여, 다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도 하며, 헌신하고 충성케 하신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 다음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는 구절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양은 버릇이 고약한 동물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만일 저들을 방임해 두면 양들은 항상 똑같은 길로만 왕래한다고 합니다. 성지 순례시 양들이 지나 다닌 길을 목격한 바 있는데, 항상 다니는 길로만 왕래한 까닭에 오솔길과 같은 길이 많이 나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양들은 또한 황무지가 될 때까지 똑같은 풀을 듣게 되고, 결국 저들의 땅을 병과 기생충으로 오염시켜 버린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양들은 야위고 병들어 죽고 맙니다. 그래서 부지런한 목자는 양들이 똑같은 장소에 오래 머물지 않도록, 이 목장에서 저 목장으로 이동을 시킵니다. 늘 새롭고 신선한 풀을 찾아, 양떼를 몰고 갑니다. 목자가 신선한 풀밭으로 양들을 인도하면, 양들은 너무 좋아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합니다. 그러는 동안 양들은 건강하게 성장하고, 이전의 목초지도 깨끗하고 무성한 초원으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된 우리를 양으로 묘사하는데 는, 여러 가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행동 방식, 생활 습관은 양과 아주 흡사합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들이 완고한 고집쟁이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사야 53:6에 “우리는 다 양과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이라고 했습니다. 양들이 똑같은 조그만 길을 맹목적으로, 습관적으로 따라 다니는 것과 같이, 우리 인간도 양과 똑같이, 잘못된 습관을 좀처럼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불리할 때도 자꾸만 그 길을 갑니다. 비참한 결과가 명백한데도 그 짓을 되풀이합니다. 독재자를 보십시오. 역사를 통하여 독재자의 비참한 종말을 수없이 목격하고서도, 여전히 독재자가 출현합니다. 술 때문에 패가망신한 가정이 얼마나 많은데도, 그래도 계속 술을 마십니다. 자신의 방법, 자신의 의지로, 기어코 무슨 일을 관철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경고합니까?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어떤 사람은 황금의 길을, 어떤 이는 과학의 길을, 어떤 이는 쾌락의 길을 끝없이 추구합니다.

어떤 정신과 의사에게, 한 젊은이가 찾아 와서, 자기는 생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했다며, 어떻게 하면 좋은 가고 물었습니다. 그 정신과 의사는 프로이드의 쾌락의 원칙대로 마음껏 쾌락을 즐기면, 생의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청년은 사창가에 들어가서 향락에 만취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찾아오겠다고 했던 젊은이는, 얼마 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쾌락에 탐닉하는 것은 파멸에 이르는 지름길인 것입니다. 

브루스 캔리히-‘광야에서’라는 시에서, 마약 중독자의 독백을 다음과 같이 풍자했습니다. “마약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도다. 그가 나를 빈민굴에 눕게 하시며, 조용히 미친 곳에 인도하는 도다. 내 영혼을 멸망시키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지옥 길로 인도하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죽음을 두려워 아니함은, 마약이 나와 함께 함이라. 내 주사기와 그 바늘이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그가 원수의 목전에서 수치를 당케 하시며, 내가 미치도록 기름을 바르셨으니, 슬픔으로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미움과 악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망신거리와 비참한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마약이 결코 우리의 생을 보람 있는 길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참된 안위의 길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마약은 세상사에 지친 인생을 위로의 길로 인도하기는커녕, 반드시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과거 전두환 씨가 정당을 만들고 그 이름을 ‘민주 정의당’ 약칭하여 ‘민정당’ 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름이사 그럴듯하게 정의의 길을 표방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당의 힘으로 국민을 정의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까? 결국 사상 유례없는 소위 ‘5공 비리’ 라는 것으로 막을 내리더니, 한 때 사형 선고까지 받은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정당의 힘으로, 통치자의 권세로, 인류를 정의의 길, 의의 길로 인도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오직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의의 길, 진리의 길, 천국의 길, 생명의 길, 영생복락의 길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이신 것입니다. 그 주님께서 이 시간도 병든 영혼과 심령을 소생시켜 주시고, 오늘도 내일도 여러분의 모든 생애를, 날마다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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