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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수의 강 (요 7:3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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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수의 강 (요 7:37-44)


이제 더위가 한풀 꺾인 것 같습니다. 뭐 104년 만의 가뭄이라더니 잠깐 장맛비가 내리고 난 다음 계속된 폭염으로 인해서 무던히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날이 덥다보니 그저 시원한 냉수만 찾게 되고 심지어는 얼음을 깨물어 먹어도 시원치 않은 날들이 계속됐습니다. 그런데 마셔도 마셔도 여전히 갈증만 가득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루를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많은 물을 마십니다. 목마름 때문입니다. 우리 몸의 90% 이상이 물로 되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더위로 인해서 많은 수분이 몸에서 빠져 나가다 보니 그만큼 보충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더욱 목마름을 느끼게 됩니다. 당연히 목마르니 물을 찾습니다. 한데 너무 덥다보니 아무리 물을 마셔도 시원치가 않아요. 여전히 타오르는 목마름이 있습니다. 어쨌든 필요한 만큼 물을 마셔야 몸이 견딥니다. 한데 그 물조차도 요즘은 마음 놓고 마실 수가 없는 때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시대의 특징 중의 하나가 물의 부족입니다. 물이 부족한데다 또 오염이 심각합니다. 온 세계가 지금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유역의 나라들, 에티오피아 등의 나라가 물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물을 잘 보존하면 물로 돈을 벌수도 있습니다. 물장사로 돈을 버는 나라가 석유를 수출하는 나라보다 수입을 더 올린다고 합니다. 프랑스와 스위스가 물로 돈을 벌고 있습니다. 
점차 온 세계의 물이 오염되어가고 있고 1970년부터 지금까지의 자연파괴는 지난 6천년 동안 인류가 자연을 파괴한 것보다 더 크다고 합니다. 물의 오염으로 생태계 생물들의 30%가 멸종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미래의 엄청난 재앙이 되고 있습니다. 예전부터 깨끗한 공기와 물은 우리나라의 자랑거리였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강물들도 믿을 수 없게 되었고, 농촌 산골에서도 깨끗한 물을 찾기가 어려우며 지하수의 55%가 먹을 수 없는 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깨끗하다고 했던 한탄강도 이제는 한탄을 하면서 흐르고 있고 이제 수돗물을 그냥 먹는 사람도 4%정도밖에 안된다고 합니다. 끓여 먹거나 물을 사서 먹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하여간 목마름이란 하루에도 수차례 경험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목마름이 있을 때 적절하게 생수를 섭취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지만 삶의 여정에는 육신적인 갈증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인생 자체에 대한 마음의 허전함이나 영적 갈증도 종종 찾아온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체득하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갈증을 채울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예측할 수 없는 바다를 뚫고 항해를 거듭한 끝에 대서양을 건너 남미대륙에 도착했던 스페인 선원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의 배가 아마존 강 하류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준비했던 물은 다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목이 타들어가지만 그렇다고 바닷물을 마실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지금 그들은 아마존 강에 들어섰지만 강의 폭이 워낙 넓고 방대해서 그곳을 여전히 대서양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아직도 바닷물 위에 있다는 생각에 그 물을 마실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으며 결국 선원들은 갈증 때문에 견디다 못해 탈진해서 한명씩 죽어갔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풍부한 생수의 원천인 아마존 강 한복판에 자신들의 배가 떠 있었지만 여전히 바다 위에 있는 줄로 알아 그 물을 퍼서 마시지 못하고 갈증으로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마치 우리 시대를 비유하는 것 같다며 필립 얀시는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일 만나를 내려주셨는데도 어떤 이들은 영적 굶주림에 허덕이며 고통스럽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생수로 소개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임을 선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 앞에서 목마른 인생의 길을 계속 가려는 사마리아의 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녀의 길을 막아섭니다. 아니 목마른 여인이 지나가는 길목에 앉아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오히려 물 항아리를 들고 오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이 목마르다며 물을 달라고 부탁하십니다. 

목마른 사람들을 찾으시고 공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인생의 생수이신 그분은 오늘도 우리가 가는 길목에 서서 우리의 하루를 채우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자신이 채우려는 항아리를 내려놓고 그분 앞에 멈출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을 그냥 지나치는 하루는 내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워도 여전히 목마르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목마르다는 것, 인생이 공허하다는 것은 신앙인에게 매우 비극적인 일입니다. 이제 눈을 열어 내 앞에 서 계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리고 그분이 공급하시는 말씀의 생수로 풍성함의 강을 체험하는 매일을 삽시다.

먼저 생각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목마른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초막절 마지막 날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많은 군중들을 향해서 성령의 놀라운 은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초막절은 유대인들의 삼대 명절 가운데 하나로써 10월에 지키는 명절입니다. 이 절기가 오면 유대인들은 자기 집을 떠나 작은 초막에서 7일을 지내고 8일째 되는 날에 초막을 걷어 냅니다. 초막절에는 어느 곳에나 초막이 들어섰습니다. 평평한 지붕 위나 정원은 물론 길거리나 광장 심지어는 성전 뜰에까지도 초막이 세워졌습니다. 초막은 나뭇가지와 잎으로 되어 있고 햇빛은 가리지 않도록 나뭇가지를 듬성듬성 엮었으며 지붕도 저녁에는 별들을 볼 수 있게 했습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출애굽 때 광야에서 집 없이 나그네 되어 지붕 없는 초막에서 지내던 일을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 초막절을 지키는 이들은 실로암 못에 가서 물을 길어와 성전 제단에 부었습니다. 이 의식이 있을 때 성가대는 시편 113편에서 118편으로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이 의식 전체는 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의 생활에서 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반석에서 솟아오른 물을 기억하게 하는 거룩한 예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초막절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는 수많은 순례객들 앞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시면서 여전히 심한 갈증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초청하셨습니다. 이 초청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타는 듯한 목마름 때문에 모세를 원망하며 돌로 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물을 내어주셨던 배경을 염두에 둔 것이었습니다. 
광야에서의 선조들처럼 그들 역시 목말라 생수를 갈망하는 자들이며 이것을 주님께서는 안타깝게 보시고 자기가 그 갈증을 채워줄 수 있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옛날 광야에서 물을 낸 반석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며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물의 공급이었습니다. 먹는 음식보다도 더 귀한 것이 물이었습니다. 물론 음식도 없어서는 안 되겠지만 광야에서 물은 며칠만 마시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러기에 물은 곧 생명이었습니다.
그들의 광야 40년은 사막에서의 생활이었기 때문에 물처럼 귀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의 백성들은 물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었지만 허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서 반석을 쳤더니 거기서 물이 솟아올랐습니다. 이 물을 낸 반석은 신비의 바윗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바윗돌이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상징합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내려치자 반석이 깨져 생수가 솟아났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로마병정의 창에 찔려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다 쏟아내셨습니다.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자기를 꺾지 아니하고 그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여기서 물은 회개의 세례를 말하고 피는 십자가에서의 속죄의 죽음을 나타냅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와 물은 영원한 생명수 샘물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구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또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고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아담 이후 죄로 얼룩진 인간들은 모두가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진리를 찾아 방황하는 자들입니다. 이 같은 인간의 실존적인 모습이 광야에서 목말라하며 애타게 물을 찾아 헤매는 이스라엘로 표현되었고 이는 또한 삶에 부대껴 어찌할 바를 모르며 불안해하는 현대인 모두를 상징합니다. 이런 모든 자들에게 우리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오늘 영원한 생수를 주시겠다고 초청하시는 주님께 다 나와서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의 갈증은 해소될 수 있음을 기억하고 주님을 우리 심령에 모시고 주님의 뜻대로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결국 모든 해결책은 성령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삶을 두 가지 양식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소유의 양식입니다. 사람들은 물질, 명예, 권세를 소유하기 위해 발버둥 칩니다. 둘째는 존재의 양식입니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사명감을 갖는 인생입니다. 이런 사람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따라 행복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에 충실함, 그 자체로 행복을 느낍니다.

불행은 보통 욕심을 이기지 못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욕심은 항상 고독과 불행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삶의 길이에 따라 평가되는 것은 아닙니다. 
므두셀라는 무려 969년을 살았지만 성경은 그의 업적과 가르침을 단 한 줄도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므두셀라를 성공적인 인생으로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단 3년간의 공생애를 보냈지만 그의 가르침과 진리는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 세계에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주님은 사람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구별 없이 누구든지 주님께 나올 수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 살기가 고달픈 인생은 누구든지 주님께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죄악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는 인생도 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인생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나가’ 아닙니다. “목마르거든”이라고 해서 스스로 목마름을 느끼는 사람에 한해서입니다. 심령의 기갈을 느끼는 사람이 주님께 나옵니다. 스스로 영적 갈증을 못 느끼는 사람은 오지도 않거니와 올 필요도 없습니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일단 주님께 나와야 합니다. 주님께 나아와야 만이 심령의 기갈과 영적 갈증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나와야 만이 심령의 문제가 해결되고 육신의 문제까지 해결됩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고 사 55:1~3은 말씀합니다.

주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지만 주님께 오지 않는 사람,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찾아가서 은혜와 복을 가져다주시지 않습니다. 저는 한때 이 문제를 가지고 많이 고민했습니다. 어떤 사정으로 주일예배에 출석하지 못한 성도에게 그 주일 설교말씀의 원고를 복사하여 갖다 주어 읽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령께서 이를 막았습니다. 그 이유는 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기도하며 고민하는 중에 마음속에 느껴온 것은 대략 이런 것입니다. 첫째, 말씀을 갖다 주어도 말씀을 읽어보지도 않고 결국 쓰레기통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둘째, 말씀을 들으려는 간절한 마음이 없는 자는 말씀을 코앞에 갖다 주어도 안 읽는다는 것입니다. 셋째, 육신의 일이나 세상의 일을 중요시하고 주님께 안 나오는 사람에게 말씀을 가져다주는 것은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꼴이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주일을 지키지 못한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친절히 말씀을 읽을 기회를 드리려고 한 일인데, 이 일을 못하게 하시니 참 안타까운 마음이 그지없습니다. 솔직히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금하시는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불가피한 일로 주일을 지키지 못하고도 말씀 읽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있으시면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십시오. 그러면 말씀이 그대로 다 실려 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을 믿어야 신령한 영적 문제부터 시작해서 육신의 모든 문제까지 모두 해결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고, 복을 받는 오직 한가지의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롬 1:17은 말씀하시며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롬 5:1이 말씀합니다. 또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갈 3:9은 말씀하고 있으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갈 3:14이 말씀하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딤후 3:15이 말씀하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라고 벧전 1:5이 기록합니다. 

결국 믿음이 성도에게 있어서 최고의 덕입니다. 성도가 믿음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믿음만이 성도가 사는 길이요 믿음만이 성도가 의로워지는 길이며 믿음만이 성도가 구원받는 길이요 믿음만이 성도가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받는 길입니다. 믿음만이 성도가 성령을 충만하게 받는 길이요 믿음만이 성도가 하늘의 지혜를 얻는 길이며 믿음만이 성도가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길입니다. 성도에게 믿음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성도는 세상의 모든 것 다 잃어버려도 믿음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성도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었어도 믿음만 있으면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을 소유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배”는 ‘사람 심령의 가장 깊은 곳’을 의미합니다. 성도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으면 여러분의 심령 깊은 곳에 하나의 강이 열리고, 그 강에서 생수가 솟아 흘러넘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생수는 문자 그대로 ‘살아있는 물’을 말합니다. 물은 사람의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물이 없이는 살지 못합니다. 생명체가 어떤 물을 섭취하느냐에 따라서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기도 하고, 그러지 못하고 각종 질병에 걸려 쉬 죽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물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이 좋은 물을 얻기 위해서 그 야단들입니다. 요즘 지하수는 공해로 너무 오염되어서 먹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수돗물도 믿을 수가 없고 비싼 돈을 들여 정수기를 구입하여 그 물을 받아먹어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무슨 물을 먹어야 할까요? 가장 깨끗하고 믿을 수 있는 물은 바로 우리들의 배에서 나오는 생수를 먹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날 수 있겠습니까?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우리들의 심령이 쪼개져 강이 생겨야 하며 성령을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야 하고, 또 우리들이 믿어야 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백성들을 인도할 때, 물이 없어 곤란한 적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물이 없어 죽겠다고 아우성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백성의 장로들을 데리고 백성의 앞을 지나 반석을 지팡이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반석을 쳤습니다. 반석이 쪼개져서 물이 솟아났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반석에서 나온 물을 마시고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마가 찢어져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양손과 두 발에서, 창에 찔리신 예수님의 허리에서 피가 강물같이 흘러내렸습니다. 반석이신 예수님의 몸이 쪼개져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이 예수님의 피와 물이 생수의 근원입니다.

사마리아 수가성 야곱의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은 성령을 통해서 넘쳐흐르게 하시는 각양 좋은 은사들입니다.
그러기에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내리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먼저 주님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배워 생활 가운데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거짓 없고 진실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허물과 죄를 깨닫고 통회하며 가슴을 쪼개고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깨끗한 심령으로 성령 받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깨끗한 심령에 성령을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말씀을 배워야 잘 살 수 있습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내리게 됩니다. 믿음으로 생수의 강이 저와 우리 모두의 심령에 차고 넘치게 흘러내리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고 들음은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들은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하는 반면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고 하며 그 근거로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여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할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시어 깨닫게 하시고 우리 안에 믿음을 심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은사로서의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그 성령의 은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기에 어떠한 경우에도 이제는 다시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이 수증기가 되려면 100도가 되어야 합니다. 0도의 물이건 99도의 물이건 끓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 차이가 자그마치 99도나 되면서도 말입니다.
수증기가 되어 자유로이 날아갈 수 있으려면 물이 100도를 넘어서부터입니다. 그런데 99도에서 100도까지의 차이는 불과 1도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혹시 99도까지 올라가고도 1을 더 하지 못해 포기한 일은 없습니까? 1보다 더한 99를 노력하고도 말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일들이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종종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은혜 받고 성령 충만해 곧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 태어날 우리가 이런저런 이유로 그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하고 다시 세속적인 모습으로 되돌아가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고비를 지혜롭게 넘길 수 있을까요?
중앙아프리카에서는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많은 원시족속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그들의 감사표현은 각 부족마다 독특한데 그 중 카렌 족은 감사한다는 말을 “하나님 앞에서 땅 위에 앉는다.”라고 합니다. 감사할 줄 아는 카렌 족 사람은 은인의 집에 가서는 그 집 땅 위에 앉습니다. 아무런 말도 아니하고 가서 고요히 앉아 있는 것으로 자신의 감사한 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1도의 신앙이 부족할 때, 우리는 카렌족처럼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앉아 오직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의지하고 감사하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비등점을 넘어 그 영혼이 하나님 나라를 향할 수 있을 때, 때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그 앞에서 땅 위에 앉아 있을 시간을 내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은혜를 준비해 두고 계십니다.
이 모든 은혜를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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