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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분노를 다스리라 (엡 4: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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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를 다스리라 (엡 4:26-27)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선물 가운데 하나가 희노애락이라는 감정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복입니다. 기뻐할 때 기뻐하고, 노여워해야 할 때 노여워하고, 슬퍼해야할 때 슬퍼하고, 즐거워해야할 때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런 감정을 좋은 것과 나쁜  감정으로 구분하려고 합니다. 대체적으로 기쁨과 즐거움은 좋은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여움과 슬픔은 나쁜 감정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감정에 대한 평가도 주관적으로 하기 때문에 오해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내가 기뻐하고, 즐거워해도 그로 인해 다른 사람이 고통의 눈물을 흘리고 아파한다면 내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좋은 감정일 수만은 없습니다. 내가 노여워하고 슬퍼하지만 그로 인해 억눌리고,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된다면 그 노여움과 슬픔의 감정은 결코 나쁜 감정일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감정 자체가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누가, 어떤 때에, 무엇을 위해,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좋고 나쁜 것이 결정됩니다. 

희노애락의 감정 가운데 우리들이 가장 관리하기 어려운 감정이 분노의 감정입니다. 모든 감정이 그렇습니다만 분노는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좋은 약이 될 수도 있고 치명적인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대체로 분노에 대한 반응을 보일 때 두 가지 형태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분노의 감정을 억제합니다. 분노를 감추기도 하고 위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억제하고 위장한다고 해서 분노의 감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분노의 감정은 오히려 에너지와 같이 축적되어 그 사람 안에 쌓여 있습니다. 

이렇게 억압된 분노의 감정이 쌓여 신체적, 정신적인 질병을 일으킵니다. 이런 사람의 상태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활화산과 같습니다. 속은 벌겋게 끓어오르는 용광로와 같이 분노의 끓는 감정이 부글대고 있습니다. 이것이 터지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그 대표적인 한국인의 병이 ‘화병’입니다. ‘화병’은 세계 정신의학회에서 한글의 발음을 그대로 따서 ‘hwa_byung’이라고 공식적인 병명을 붙였습니다. 화병은 분노를 억제하는 가운데 생긴 한국인의 병으로 분노 증후군으로 분류했습니다. 화병은 억울한 감정을 풀지 못하고 억지로 참고 억누를 때 생기는 병입니다. 화병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여러 가지 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화병이 주로 나타나는 이유는 바로 ‘참기’ 문화 때문입니다. 억울하고 분한 일을 당해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사람을 좋게 평가하는 우리의 문화입니다. 과거에는 모질게 시집살이 하면서도 입 한 번 뻥끗하자 못했던 며느리들이 화병에 쉽게 걸렸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며느리만 화병에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시어머니가 도리어 화병을 호소합니다. 남편들이 화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도 화병을 앓습니다. 유치원 때부터 여러 개의 학원을 다니며 스트레스를 받는 아이들이 하는 말이 ‘내가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야’라고 말한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 사회는 어디에서 어떻게 문제들이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끌어 앉고 있는 상황입니다. 

분노의 감정을 억압하고 숨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분노를 그대로 드러내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는 자신의 분노의 감정을 절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분노의 감정에 적개심을 드러내며 거칠게 행동하고, 폭언을 합니다. 자신의 분노를 상대방을 향해 거침없이 다 쏟아 놓고는 자신은 뒤끝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분노를 말과 행동으로  다 쏟아 놓으니 자신은 시원해 합니다. 하지만 그의 거친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입은 사람은 몸과 마음에 피를 철철 흘리며 아파합니다. 절제되지 않은 분노의 표현은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최초의 살인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정성을 다한 아벨의 제사는 받고 믿음 없이 형식적으로 드리는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에 가인이 화를 냅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인류의 최초 살인의 원인은 분노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일어났습니다.

저는 분노의 감정을 홍수와 댐의 역할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홍수가 나면 주변의 산에서 흘려 내리는 황토 물이 순식간에 댐으로 몰려듭니다. 물이 댐의 위험 수위까지 찼을 때 댐의 수문을 갑작스럽게 열면 문제가 됩니다. 아무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댐의 수문을 열면 그 상황에 전혀 대비하지 못한 댐 아래의 사람들이 쏟아져 흐르는 물로 인해 큰 피해와 고통을 받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런 경고 없이 갑자기 분노의 감정을 와락 쏟아 놓으면 주변 사람들이 당황해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자신의 감정을 갑작스럽게 폭발시키는 사람의 주변은 항상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그 사람을 회피하고 주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싶어 합니다. 

분노의 감정을 표현할 때 자신이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미리 표현하거나, 분노를 조금씩 흐르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댐의 수문을 열기 전에 먼저 그 사실을 댐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 대비하도록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분노의 감정을 갑작스럽게 표현하지 않고 잘 조절해 표현합니다. 분노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압니다.  

어떤 분은 분노가 일어나면 노트에 하고 싶은 말을 글로 표현합니다. 욕도 쓰고, 미운 감정도 쓰고, 죽고 싶은 심정도 씁니다. 남편에게 화가 나면 화를 낼 수 없어서 혼자 노트를 펴 놓고 남편을 향해 미운 감정을 글로 다 쏟아냅니다. 어떤 분은 자녀들로 인해 화나는 일이 있으면 돌아가신 남편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식들에게서 느끼는 서운한 감정을 다 일러바칩니다. 그리고는 ‘당신은 내 마음을 다 알지?’ 하면서 위로를 받습니다. 

어떤 분은 눈물을 한 없이 흘립니다. 엉엉 울면서 분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실컷 울고 나면 그래도 마음이 시원합니다. 좋은 방법입니다. 눈물은 분노와 상처 치유의 특효약입니다. 남편으로 인해 분노가 일어나면 어떤 사람은 빨래를 해서 남편의 옷을 막 흔들어 털며 화를 풉니다. 자신의 분노의 감정을 마음에 쌓아두지 않고 이런 저런 방법을 통해 조금씩 표현하는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건강하게 사는 길이고 상대방과 가정,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는 길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성숙한 방법은 ‘I MESSAGE’를 하는 것입니다. 분노가 일어날 때 상대방을 향해 당신이 그렇게 말을 하고 행동하니 내가 지금 화가 난다고 내 감정을 내 말로 전달하는 것입니다. 화를 벌컥 내기 전에 내가 화가 났다는 사실을 상대방에서 말을 통해 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그 상태만으로도 내 안에 일어나는 분노가 30-50%가 이미 분출된다고 합니다. 분노의 수문을 활짝 열기 전에 내가 지금 분노가 끓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 열어 상대방에게 전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생활 속에서 훈련을 하다보면 이것이 가능합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잠시 그 자리를 떠났다가 돌아오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면 심호흡을 크게 몇 차례를 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는 것입니다. 분노가 일어날 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있는 그대로를 다 고하는 것입니다.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자식 때문에, 목사 때문에, 성도 때문에 분노가 일어나면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 다 고하는 것입니다. 꼭 거룩한 언어를 가지고 기도할 필요 없습니다. 내 감정에 일어나는 그대로 하나님께 다 일러바치는 것입니다.

다윗이 지은 시편을 읽다보면 어떤 때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억울한 일을 당해 분노가 일어날 때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분노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다 고했습니다. ‘언제까지 저 원수를 그대로 두실 것입니까? 저들의 목을 언제 꺾어 주실 것입니까? 저는 너무 억울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분노의 감정을 쏟아 놓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의로운 팔로 붙들어 지켜 주실 것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을 지켜주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모든 분노의 감정을 토해내는 기도를 다 들어 주셨습니다. 다윗이 분노의 감정을 하수도에 다 쏟아내는 것처럼 내뱉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다 들어주시며 품어 주셨습니다. 

분노가 일어날 때 사람을 찾지 말고 하나님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분에게 눈물로, 외침으로, 몸부림으로 고하는 가운데 그 모든 것을 품어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다시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어루만짐 가운데서 우리의 상한 심령이 치유함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분노와 관련해서 세 가지를 권면하십니다. ‘분을 내어도’라는 말은 분노의 감정 자체를 거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분노가 ‘죄를 짓지 말게 하라’는 것입니다. 분노의 가장 큰 피해자는 본인 자신입니다. 분노를 하면 자신의 영과 육이 피폐해집니다. 의로운 분노가 아닌 잘못된 분노는 상대방과 가족, 이웃에게 커다란 상처를 줍니다. 분노로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노를 해가 지도록 품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의 하루 개념은 저녁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분노의 감정을 가지고 새 날을 맞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루의 시작을 분노의 감정의 지배 아래에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분노의 감정의 지배를 받으면 마귀가 그 틈으로 헤집고 들어와 똬리를 틀고 앉아 삶의 자리를 지옥으로 만들게 하니 마귀에게 그런 틈을 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가 어린아이에게 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비행기, 자동차, 호랑이 코끼리 등등, 열심히 그림을 그려 보여주면서 말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것을 따라 하던 아이가 갑자기 아빠의 볼펜을 빼앗습니다. 자기가 그려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그림을 그리려고 애쓰는데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이를 도와줍니다. 아이를 품에 안고는 아이의 손을 붙잡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습니다. 아이가 아버지의 손에 붙들린 자기 손에서 힘을 빼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손길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림을 그려주시듯이 우리의 분노의 감정을 올바르게 그려주시려고 합니다. 우리의 분노의 감정을 주님의 손길로 다듬으려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혀 거칠게 표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과 고집대로 분노의 감정을 표현하려고 힘을 빼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분노의 감정 그림을 주님의 손길에 맡겨야 합니다. 그 분 안에서만이 우리의 분노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한 주 동안 살면서 분노의 감정을 잘 다스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의 영역이 분노의 감정에 따라 거침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분노의 감정에 지배를 받는 삶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마귀에게 틈을 주어 그의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분노의 감정이 일어났을 때 성령님을 의지해 그 분의 지도에 따라 우리의 분노를 성숙하게 다스려가는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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