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의도 : 성화, 견인, 영화 (롬 8:28-30)

첨부 1


하나님의 의도 : 성화, 견인, 영화 (롬 8:28-30)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지금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의도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죄 가운데 빠져 허덕이는 인류를 건져내어 영원한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절대 순종하셔서 십자가 희생을 통하여 구속의 대업을 성취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명--중생--회심--칭의--입양--성화--견인(堅忍)의 단계를 거쳐 영화(榮化)에 이르게 됩니다.  

지난 두 주간에 걸쳐 우리는 소명에서 입양의 단계까지를 우리의 정서적 심리적 문제들과 연계시켜 살펴보았습니다.  

소명 교리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통제에 절대 순종하기 위해 절제력을 키워야 함을 배웠고, 중생 교리를 통하여 우리는 성령님의 빛을 받아 우리 속에 예수님의 모습을 닮지 못하고 있는 부분을 자각(自覺)하고 이를 주님께 개방해야 할 필요를 배웠습니다.  

회심 교리는 우리의 변화의 가능성을 확신시켜주며, 칭의 교리는 죄책감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리고 입양 교리는 소속감의 욕구 충족을 보장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구원의 순서 중 성화와 견인, 그리고 마지막 단계인 영화에 관한 성경적 관점을 찾아보며, 각 단계와 연계되는 우리의 정서적 심리적 치유의 문제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성화 (聖化, Sanctification) 

성화는 새로 태어난 신생아의 성장을 가리키는 영적 상응 용어입니다. 믿음을 가진 자에게 즉시 부여되는 칭의와 입양과는 달리, 성화는 신자 내면에서 일어나는 단계적인 과정입니다.  

칭의에서 신자는 그리스도의 희생 덕분에 하나님에 의해 단번에 의롭다고 선언됩니다. 그런데 성화에서 신자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가운데 지속적으로 의롭게 만들어집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사도 베드로는 그의 첫째 서신에서 이 말씀을 되풀이해서 말합니다. 

벧전 1:15-16=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그 자신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에게도 역시 거룩해지기를 바라십니다. 성도들을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성화라 부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성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퍼져있는 죄의 오염을 제거합니다. 성화는 우리의 본성을 새롭게 하는 데 영향을 줍니다. 성화는 우리에게 주신 은사들을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방편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합니다. 즉 주님을 본받아 하나님과 같이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성화는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전쟁 고아가 어느 날 부잣집 양자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어디서 오늘 밤을 지샐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멋진 옷과 맛있는 음식이 지천에 널려 있고, 꿈에도 보지 못한 고급 장난감이 가득합니다. 꿈과 같은 나날이 지나갑니다.  

그런데 뭔가 불편함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냄새 나고 지저분한 거리, 아무데서나 먹고 자던 옛날이 그리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깨끗하고 화려한 침대를 빠져 나와 마구간에서 잠을 잡니다. 지저분한 환경과 악취가 오히려 익숙하여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가 끝까지 이처럼 과거의 습관을 고수한다면 양부모는 그대로 두고 보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겠다고 결단하고 거듭난 후 삶에 엄청난 변화가 온 것은 사실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영벌 아래 있을 우리가 영생을 소유한 자로 신분이 변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확실히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기주의 본능과 기분 따라 살던 옛 습관이 쉽사리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으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면서 우리의 죄성(罪性)을 없애지는 않으셨습니다. 대신 죄성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되시는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 삶 속에 예수님이 진실로 길과 진리가 되시어 생명으로 뿌리 내리도록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의 능력만으로는 끊임없이 밀려오는 죄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성령님은 잘 넘어지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자신을 보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도록 우리 마음을 계속 만지시며 주님의 마음으로 바꾸어 가십니다.  

성도 여러분! 성화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에 일치되도록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점점 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인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형상 회복은 우리 속에서의 하나님의 역사와 우리가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과정이라는 두 관점으로 고찰되어야 합니다.

성화는 먼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시켜 자기의 형상대로 회복시키신다고 가르칩니다.  

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그의 독생자와 같이 닮게 해서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로 만드시는 데 있습니다.  

고후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화는 또한 우리의 노력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위해서 노력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본에 따라서 더욱더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 위해서 분투해야 합니다. 환언하자면 하나님 형상의 회복은 직설법인 동시에 명령법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그리고 모든 신자들에게 겸손히 주님 자신의 모범을 따르라고 지시하셨습니다(눅 22:25-27). 주님의 사도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하며 하나님과 같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을 역설했습니다. 

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롬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위의 말씀들을 종합해보면, 성화란 성도의 노력을 포함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해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우리에게 노력할 수 있게끔 해주는 강력한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성화 교리는 성도에게 성장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각 크리스천이 자신의 독특한 재능과 은사를 가능한 한 완전하게 개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나님이 각자를 위해 세우신 계획에 따라 모든 지체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크리스천의 성장은 자기중심성이나 두려움에 의하여 내면으로부터 억압당하고, 외부적으로는 새신자들을 이미 고안된 틀에 짜 맞추는 교회의 성향 때문에 종종 억제되고 있습니다.  

심리학자 매슬로우(Maslow)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마음속에 두 가지 세력을 지니고 있는데, 한 세력은 뒤로 퇴행하고 과거에 매달리며 위험을 무릅쓰기를 두려워하고 독립과 자유와 분리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그 두려움 때문에 안전과 방어적 태도에 매달립니다. 그 반대 세력은 자아의 완전함과 외부세계에 직면하는 자신감을 향하여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매슬로우에 따르면, 안전은 불안과 기쁨을 둘 다 지니고 있으며, 성장도 불안과 기쁨을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장에 대한 기쁨과 안전에 대한 불안이 성장에 대한 불안과 안전에 대한 기쁨보다 더 클 때 성장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성장을 두려워하고 우리를 성장하지 못하도록 하는 성격적 특징에 매달리게 하며 심지어 퇴행하도록 하는 타고난 성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장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크리스천들은 성장할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협력하시고 성령님은 그들의 선생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입양하시고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사실은 안전에 매달리고 싶은 우리의 갈망과 필요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며 그리스도를 향하여 성장하도록 해줍니다. 

성도의 영적 성장에 대한 가능성에 관한 한 기독교 신앙은 한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크리스천의 성장은 하나님의 성화의 지속적인 역사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이르기까지 성장 가도를 달려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견인 (인내, Perseverence) 

어떤 목사님이 병으로 위독한 노년의 성도님을 방문했습니다. 병세가 어떠냐고 묻는 목사님에게 환자가 대답합니다. “목사님, 사실 저는 너무 약해서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이 점에 대해 걱정합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병석에 있는 동안에 어느날 예수님에게서 멀어져 버림을 받을까 두렵습니다.”

이때 목사님은 요한복음 10:28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리고 목사님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우리를 끝까지 안전하게 지키신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예수님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하나님은 결단코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습니다.” 

견인의 교리는 분명히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교리는 모든 예배 참석자들이나 교회 회중들이 그들의 신앙 안에서 끝까지 인내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또는 공적으로 신앙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은 영원히 안전하게 된다는 것이나 우리에게 참 신자로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결코 신앙에서 떠나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시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 교리는 성경이 분명하게 언약을 깨뜨리는 사람이 있다고 증거하기 때문에 구속사 가운데 드러난 은혜 언약 속으로 결합된 모든 사람이 영원히 안전하게 된다는 개념도 아닙니다. 참 신자의 견인 교리가 의미하는 바는 “참된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은 믿음을 전적으로 또는 마침내 잃어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견인 교리에 관한 훌륭한 정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발견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아들이시고 그의 성령에 의해 유효적으로 부르시고 성화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로부터 전적으로 또는 최종적으로 타락할 수 없고, 그 상태에서 끝까지 확실히 견인하여 영원히 구원얻을 것이다”  

성도 여러분! 성경은 거룩한 인내를 가르칩니다. 이것은 2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경은 한편으로 하나님이 구원하는 과정에 있는 사람을 견인하실 것임을 가르칩니다(롬 8:28-39). 특히 30절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 반면에 성경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사람들이 모든 고난에 인내함으로 그들이 구원받았음을 보여주라고 촉구합니다(벧후 1:3-11).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10절). 

따라서 우리는 인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반석 위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인내”는 더 적절하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인내”라 불러야 마땅합니다. 

성도 여러분! 크리스천들은 위기와 갈등의 시기에 하나님께서 그들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위기나 갈등도 우리를 압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인생의 모든 상황들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확신을 가지고 안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어떠한 어려움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처하는 데 필요한 모든 자원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흔들리지 않는 견인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 

성령 안에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천국에서의 영광스러운 삶의 전조입니다. 견인의 교리는 은혜가 넘쳐흐르는 주님의 손이 우리를 늘 지탱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3. 영화 (榮化, Glorification) 

30절=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제 우리는 구원의 순서의 마지막 단계에 왔습니다. 영화는 하나님께서 미래에 우리로 하여금 맏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완벽하게 반영하도록 해 주시는 단계의 일입니다. 우리는 이미 부활 승천하셔서 영화롭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덕분에 이 잠재력을 현재 소유하고 있습니다.  

30절의 동사들은 과거시제로 되어 있어 이미 영화롭게 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부활의 날, 즉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고전 15:50-57)에야 영화를 실제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영화의 순간에 하나님의 형상이 신자에게 온전히 실현될 것입니다. 회심 때 부분적으로 성취된 것이 영화의 단계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이 과정의 결과는 너무나 엄청나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아무도 영화된 우리의 모습을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완전히 변할 것이며, 우리가 소망하던 집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 집은 “의의 거한 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보는 순간 우리는 그분의 형상대로 변하게 됩니다. 

요일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고후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은 죄 가운데 빠져 허우적거리는 우리를 건져내어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는 데 있습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우리의 구원은 소명--중생--회심--칭의--입양--성화--견인 그리고 영화의 단계로 진행됩니다.  

이 구원의 교리들은 인간 인격의 ‘존재’ 측면을 하나님께서 점진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핵심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구속 과정의 8단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이 원래 창조하셨던 모습, 즉 창조주를 경배하는 온전한 존재대로 만드시면서 우리 마음속에서 행하시는 역사입니다.  

소명 교리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통제에 절대 순종하는 절제력을 요구합니다. 성령님은 중생의 역사 안에서 우리의 부족을 자각하게 하시는데, 우리는 그리스도께 마음을 온전히 개방해야 합니다.

회심의 교리는 우리가 변화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줍니다. 회심은 우리에게 범죄함으로 훼손된 하나님의 형상을 부분적이나마 다시 실현하는 수준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칭의의 교리는 죄책감으로부터 자유케 됨을 보장합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우리 속에 죄책감이 일어날 때 우리는 잘못을 회개하고, 화해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에 온전히 헌신해야 합니다. 

입양의 교리는 교회 공동체의 필요성을 환기시켜주며 소속감에 대한 원초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줍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성도는 불안과 불안정감을 떨쳐버릴 수 있습니다.   

성화의 교리는 우리에게 성장으로의 대장정을 결심하도록 만듭니다. 견인의 교리는 위기를 만났을 때에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능히 이길 수 있음을 확신시켜 줍니다. 그리고 영화의 교리는 우리에게 주님의 형상대로 변화될 영광의 날을 꿈꾸도록 소망을 부여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속에서 죄로 인해 타락한 자아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여러분 속의 갈급한 자아는 외칩니다: “나는 소속될 필요가 있다,” “나는 자존감이 필요하다,” “나는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갈급한 자아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우리를 끊임없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향해 달려가도록 충동합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불러내십니다. 말씀과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하여 중생과 회심을 거쳐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 칭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정체감을 회복하고 통합된 자아를 갖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나는 정말로 하나님께 속한다; 나는 더 이상 거부되지 않는다,” “나는 가치 있는 존재이다; 나는 더 이상 부끄럽지 않다,” “나는 통제력이 있다; 나는 더 이상 약하지 않다!” 

여러분 가운데 불안이나 수치심 때문에 고민하시는 분은 안계십니까? 무력감이나 우울한 기분 때문에 생산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분은 안계십니까? 

우리의 구원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에 의지하십시오. 우리를 ‘의롭다’ 칭하심으로 죄책감을 제거해 주시는 하나님, 우리를 자녀로 입양하심으로 불안과 수치심으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주님의 언약의 말씀을 확신하십시오. 그리고 성화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성장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영화로운 몸으로 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가기까지 어떤 위험으로부터라도 반드시 지켜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