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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교회 (고전 8: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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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교회 (고전 8:1-13)   
 
  
옛 그리스-로마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그들이 믿는 신들에게 정기적으로 짐승을 잡아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리고는 그 고기를 나누어 먹곤 했습니다. 그래서 흔히 그들의 신전에는 사람들이 모여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들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고린도에도 여러 신들과 로마의 황제들을 위한 신전들이 있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은 옛 고린도 시의 터에서 여러 식사공간을 가진 신전을 두 개나 발견했습니다. 물론 그 신전에 딸린 식사장소는 종교행사뿐 아니라 사교적 행사에도 사용되곤 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러 온 것은 아니지만 이교도 친구의 초청으로 그 식사자리에 와 앉아 있게 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 그 그리스도인이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의 고기를 먹는 자리에 참석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는 일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전에서 제물로 바쳐졌다가 신전식당에서 소비되고 남는 고기는 시장으로 팔려나갔습니다. 실제로 고린도의 시장에서 팔리는 고기의 대부분은 이교 신전에서 제물로 바쳐졌던 짐승으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에서도 그런 고기를 먹게 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 또 어떤 조건에서는 되고 안 되는지 하는 문제가 고린도 교회 신자들 사이에서 제기되곤 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 가운데는 우상숭배관행에 예민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것은 옛 우상숭배에로 되돌아가는 것이거나 조금이라도 우상숭배에 관여하는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일이 아니냐 하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신자들이 그런 고기를 아무 거리낌 없이 먹는 것을 보며 시험에 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제기된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본문 1절에서 사도 바울은 쓰기를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안다”고 합니다. 원론적인 대답이 무엇인지는 다 알고 있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그 원론적인 지식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그는 본문 4-6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참되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 우리가 믿는 만유의 창조주 하나님뿐이시라는 것입니다. 다른 신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신이라 여기며 만들어 놓은 우상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우상에게 제물이라고 바쳐졌던 고기를 먹고 안 먹고 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인지 아닌지 물을 필요 없이 먹으면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른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지식을 누구나 다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었습니다. 아직도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은 신자들은 옛날에 우상을 숭배하던 때 행하던 대로 고기를 먹을 때는 그것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으로 여기고,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은 곧 우상을 섬기는 신앙행위의 일환으로 여전히 생각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에게는 우상숭배행위인 줄 알면서도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으면 그것은 양심을 약화시키는 것이고 양심을 더럽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7절이 그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어떤 신자들은 자기는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것이 자기의 신앙양심을 더럽히는 일이라 여겨져 먹지 않는데 다른 교인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그런 고기를 먹는 것을 보면 그들을 의심하거나 경멸하는 시험에 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고기는 먹고 싶고 신앙이 더 깊은 것 같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고기를 먹기도 하니까 먹어도 괜찮나 보다 하면서 따라서 먹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우상숭배행위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면 그것은 자기의 양심을 속이고 마비시키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모르겠는데 그런 사람들이 있으므로 시험에 드는 다른 사람들이 있다면 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지식도 좋고 자유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을 봅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문제에 관한 지식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지식이 교만하게 한다는 것은 아직도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것을 우상숭배행위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아직 신앙이 부족해서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깔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스스로 지식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사실은 정말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한 자들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한 것입니다. 즉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그들이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쓰기를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합니다. 이 말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교회의 덕을 세우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덕을 세우는 사람은 같은 신앙공동체 안의 모든 사람을 배려하고 자기의 신앙지식에 대한 확신과 그 위에서 행하는 자유로운 행동 때문에 그 누구도 시험에 들거나 실족하지 않도록 자기를 절제하고 필요하면 자기의 지식을 내세우지 않기도 하며 자기의 자유를 포기하기도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인을 사랑하고 교회의 덕 세우기를 힘쓰는 사람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도 바울의 확고한 기본적 입장에서 나온 말이 본문 8절의 말입니다: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어떤 음식을 먹고 안 먹고 하는 문제에 대한 지식이나 행동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서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것은 신앙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그것을 자유롭게 먹는다고 해서 우리가 더 잘 사는 것 아니라는 말입니다. 

반대로 그런 음식을 먹어도 신앙양심에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음을 알지만 그런 음식 먹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을 배려하여 먹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잘 못사는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일에 관한 지식과 그 지식에 기초한 행동의 자유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내세울 만한 것이 못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중요히 여기시고 귀하게 인정하시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든 간에 신앙공동체 안의 모든 신자들에 대한 사랑의 배려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의 배려가 없어서 교회 안의 믿음이 약한 형제자매가 시험에 들고 실족하는 일이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되지 않겠느냐고 사도 바울은 반문합니다. 본문 9-10절을 봅니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이란 말은 바로 같은 교회의 신자가 우상을 섬기는 신전에 딸린 식사공간에 누군가의 초대를 받아 앉아서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다른 교인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용기를 얻어서 자기도 그 고기를 먹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제물을 먹는 행위는 제사에 참여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남을 따라 먹기는 먹으면서도 그렇게 하면 죄를 짓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그를 실제로 죄 짓게 하는 것이 되고,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의 대신 죽으심으로 구속하신 믿음의 형제를 망하게 하는 것이며, 바로 주님께 죄를 짓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1-12절입니다: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렇게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문제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 값으로 사신 형제나 자매를 실족하게 하여 결국 주님께 죄를 짓게 만들 것이라면 차라리 그 문제에 관한 지식과 자유를 다 포기하고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는 영원히 먹지 않는 편을 택하여야 한다고 사도 바울은 결론을 내립니다. 본문 3절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교회 안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분명하게 밝힌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는 그때 그 교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의 교인들 사이에서도 제사상에 차려졌던 음식을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사상에 차려졌던 음식을 먹는 문제만이 아니고 더 많은 논란이 되는 것이 음주흡연의 문제입니다. 교인들 가운데는 음주흡연의 문제에 관하여 아주 관대하고 자유로운 의견을 갖고 있고 그렇게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압니다. 음주흡연의 문제는 신앙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학적으로는 음주흡연이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해도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 교회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말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는 두 가지 면에서 잘못된 사고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주신 몸을 가능한 한 최고로 건강하게 관리하고 유지하여 하나님의 일에 더 크게 쓰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일은 결코 신앙과 무관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한국교회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음주흡연을 하는 것은 비신앙적이라고 여기며 그런 신자들 때문에 근심하는 성도들이 있다면 그들을 배려해서 음주흡연을 삼가는 것이 오늘 사도 바울이 말한 바른 신앙의 자세이고 교회에 덕을 세우는 일이며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결코 신앙과 무관한 일일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비단 무엇을 먹고 마시고 피우는 일에 관한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다른 모든 문제에 있어서도 한 믿음의 형제자매들에 대한 사랑의 배려가 최우선적인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보면 어떤 사람은 자신의 전문지식이나 경험을 내세우며 매사가 자기의 주장대로 되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고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금방 화를 내고 싸우자고 덤벼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자기는 오직 자신의 양심을 따라 자유롭게 행동한다 하며 남의 말에는 귀를 막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설령 그런 이들의 지식과 주장과 행동이 다 옳거나 틀리지 않는다고 해도 그렇게 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깨우쳐주는 것입니다. 

자기와 생각이 다른 남에 대한 사랑의 배려가 결여된 언행은 결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시는 하나님 사람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를 힘쓰는 사람이며, 그러기 위하여 자신의 지식과 주장과 자유로운 행동 때문에 상처 받거나 시험에 들거나 실족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가르침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교회 이루어갈 수 있기를 빕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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