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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위로 (살후 2: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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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위로 (살후 2:16-17)


기도해 주셔서 은혜 중에 영국 선교여행을 잘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선교여행은 제게는 아마도 평생 잊을 수 없는 여행이 될 것 같습니다. 너무도 힘든 여행이었기 때문입니다.

세미나 둘째 날이었습니다. 강의를 하기 직전 급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청소년부 수련회 도중 한 학생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큰 충격을 받은 채로 강의에 나섰습니다. 무슨 정신으로 강의를 했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강의 후 다시 자초지종의 상황을 파악하게 됐습니다. 유가족들 생각에 너무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충격을 받았을 청소년들 생각에 안타까웠습니다. 급하게 스케줄을 조정하여 장례식에라도 참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항공편을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런던 올림픽 기간이어서 항공편 마다 만석이고, 마땅한 비행기 연결편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안타까운 마음에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도하면서 마음속에 수 없이 되새겼던 말씀이 ‘하나님의 위로’였습니다. 사람의 그 어떤 위로도 슬픔 당한 유가족들과 충격을 받았을 청소년들 그리고 함께 슬픔을 나누는 교우들을 충분히 위로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위로만이 슬픔 당한 모든 이들을 위로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붙잡았고 기도했던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 말씀 그대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큰 슬픔을 당한 유가족들과 함께 슬픔을 나누고 있는 온 교유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위로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위로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칼레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곁에서 말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여기서 곁에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위로하시기 위해 곁에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3장에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에 던져졌다가 살아 나오는 기적적인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 왕이 자기의 권위와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두라 평지에 높이가 약 30미터가 되는 금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전국의 모든 고위 관리들, 모든 공직자들 낙성식에 모았습니다. 그리고 이 신상에 절하도록 했습니다. 만일 절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풀무 불에 던져 불에 타 죽게 하겠다고 공언을 했습니다.

나팔 소리와 함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그 신상에 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만 절하지 않고 서 있었습니다. 물론 느브갓네살 왕에게 이 사실이 보고되었고, 왕 앞에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당당하게 신상 앞에 절하지 않는 이유를 말하고 앞으로도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나 그 어떤 신에게 절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했습니다. 

화가 난 느브갓네살 왕이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겁게 풀무 불을 달구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그 풀무 불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런데 그 풀무불 속을 바라보던 느브갓네살 왕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 풀무불 속에는 세 사람이 아니라 네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네 번 째 사람의 모습이 신들의 아들과 같다고 소리쳤습니다.

바로 우리 주님께서 풀무불 속에 뛰어드신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 위험 가운데 던져진 그들 곁에 함께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풀무불 속에 감히 누가 뛰어들어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은 불가능합니다. 그 누구도 풀무불 속에서 이들과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만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세 사람을 생각해 봤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금 신상에 절하지 않고 신앙의 지조를 지킬 수 있었지만 막상 풀무불에 던져질 때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두렵고 무섭기까지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 속에 주님이 오신 것을 확인했을 때 얼마나 위로가 됐겠습니까? 주님께서 죽음의 한 복판에서 자기들의 손을 잡아주셨을 때 얼마나 힘이 됐겠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고난의 현장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감당키 어려운 마음의 상처로 아파하고 있을 때,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 손을 잡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감싸주시고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특히 슬픔과 고난 가운데 계신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지금 여러분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 불 속에서 함께 계시는 주님을 보았던 것처럼 우리 곁에 함께 계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16절을 보면 “영원한 위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위로가 일시적인 위로가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위로라는 뜻입니다. 

저는 늘 병원 심방을 갈 때마다 죄송한 마음이 있습니다. 병상에 몸져 누워있는 교우들을 찾아가 위로합니다. 교우들이 반가이 맞아주십니다. 그리고 그 병상에 위로가 임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잠시 머무른 후 자리를 뜰 수밖에 없습니다. 계속 머무르며 위로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죄송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늘 그 곳에 계십니다. 그리고 그 고통 중에 그 외로움 중에 그 슬픔 중에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위로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영원한 위로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위로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칼레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곁에서 말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에게 더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우리 곁에 찾아와 말하는 사람들이 있게 됩니다. 나름대로 위로하기 위해 찾아와서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위로는 제한적입니다. 때로는 오히려 위로보다는 상처를 주기도 하고 더욱 힘들게 할 때도 있습니다.

욥기를 보면, 욥이 갑작스런 큰 재앙으로 커다란 시련에 빠지자 세 친구가 위로하기 위해 찾아옵니다. 욥 2:11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저들은 서로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욥을 위로하겠다고 서로 약속하고 그 먼 길을 마다 않고 한 걸음에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정말 욥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고도 컸습니다. 아마도 저들의 방문이 욥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처음에 저들이 욥을 위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욥의 참담한 광경을 보고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아무 말도 욥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레 동안 밤과 낮을 꼬박 욥 곁에 그저 말없이 앉아있었습니다. 이 또한 욥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욥이 친구들의 위로에 힘을 얻었는지, 드디어 말문을 열었습니다. 자기 생일을 저주하며 탄식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들은 나름대로 욥을 위로한다고, 자기 입장에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말이 욥과 논쟁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욥기를 보면, 4장부터 시작된 욥과 친구들 사이의 논쟁이 37장까지 무려 34장에 걸쳐 길게 이어집니다. 

사실 욥에게 이런 친구들과의 논쟁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욥은 이 논쟁 도중 더욱 큰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위로한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욥에게 말했지만, 그 말이 위로는 커녕 욥에게는 큰 고통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위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유익은 있지만 온전한 위로는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그 위로가 더욱 큰 고통을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의 위로를 너무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 위로가 부분적으로는 도움이 되지만 분명히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위로하고자 할 때,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 위로가 온전한 위로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렘 15:16을 보면 선지자 예레미야가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예레미야는 주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는 사역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사람들도 자기 곁을 다 떠났고, 가진 소유도 다 잃었습니다. 그 큰 고통과 눈물 가운데서도 오직 유일하게 남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  뿐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자신의 존재를 지탱할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삶의 자원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자기를 위로해 주었고, 자기에게 평안을 지키게 해 주었고 계속 사역을 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표현이 나옵니다.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먹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음식을 먹습니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단지 음식을 입으로 삼켰다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음식이 우리 몸 안에 들어와 소화가 됩니다. 음식의 영양분이 우리 몸 구석구석까지 스며듭니다. 그 에너지로 우리가 살아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단지 그 말씀을 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의 뜻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 마음과 존재 구석구석까지 스며듭니다. 나아가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이끌어갑니다. 그 말씀대로 살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자기 생각대로 살면 두려움과 슬픔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빨리 벗어나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인 상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온 마음과 생각이 그 말씀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이 예레미야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큰 위로를 얻게 되었습니다. 견디고 이길 만한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 중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 말씀을 먹는 사람들 그들이 위로를 받고 새 힘을 얻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 말씀을 온 마음으로 받으십시오. 그 말씀이 여러분을 위로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새 힘을 얻게 해 줄 것입니다. 눈물의 골짜기를 성공적으로 통과할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위로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칼레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곁에서 말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말씀하심으로 우리가 큰 위로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위로가 고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 고난을 이길 새 힘을 준다는 것입니다.

왕상 19:1-8을 보면 엘리야가 주님의 위로를 받고 새 힘을 얻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 도합 850:1의 싸움에서 큰 승리를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이세벨의 전갈을 받는 순간 인간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 유대 브엘세바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거기 광야에 있는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여호와께 차라리 죽기를 부르짖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엘리야가 잠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일어나 먹어라”고 했습니다. 일어나 보니 이제 막 구운 빵 하나와 물 한 병이 머리맡에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그것을 먹고 마신 다음 다시 누웠는데 여호와의 천사가 또 와서 “일어나 좀 더 먹어라 네가 갈 길이 너무 멀다”하며 그를 어루만졌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일어나 먹고 마시고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는 40일 동안 밤낮으로 걸어 하나님의 산인 호렙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단지 고통을 잊게 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허약해진 우리의 몸에 힘을 불어 넣어주십니다. 상처받은 우리의 마음을 치료해 주십니다. 새롭게 힘을 주셔서 일어나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고난과 싸워 이길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복음성가 가운데 [일어나 걸으라]라는 곡이 있습니다. 가사가 이렇습니다.

1.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 주시네

2.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평안히 길을 갈 땐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시네

3.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때때로 뒤돌아보면 여전히 계신 주
잔잔한 미소로 바라보시며 나를 재촉 하시네

후렴/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더 이상 걸을 힘이 없어 주저 않고 싶을 때 우리의 등을 밀어주십니다.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손잡아 주십니다. 혼자 인 것 같아 뒤 돌아볼 때면 여전히 곁에 계시며 격려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원치 않는 시련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뜻하지 않던 고난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때론 하나님께서 시련과 고난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때도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슬픔 가운데 있는 성도 여러분!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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