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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영광(5) (마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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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영광(5) (마 17:1-8)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 생애에 걸쳐 자신의 영광을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신 것은 변화산 위에서입니다. 지정학적으로 변화산이 다볼산 인지 헬몬산 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그것이 시비거리가 될 필요가 도무지 없습니다. 

Ⅰ. 주권적 선택을 통해 나타내신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본문 17장 1절에 『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라고 했습니다. 

창세 이후로 하나님은 따로 구별된 사람들에게 신앙세계의 역사주권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식솔들을 따로 불러내시므로 하나님의 심판 날에 구원의 표징이 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따로 불러내어 신앙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그 형제 중에 따로 불러내어 형통케 하시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선민 구원의 표징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드로의 양을 치던 모세를 선민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지도자로 따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그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 기드온을 따로 불러내어 선민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미디안을 쳐서 승리하게 하므로 구원이 여호와께 있음을 알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은 법궤가 있는 성전 안에 누워 있던 어린 사무엘을 따로 부르셔서 당신의 뜻을 고지하는 이스라엘의 등불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그 형제 중에 따로 불러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시고 그의 왕국을 여호와 하나님의 소원대로 치리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거룩한 씨 운동을 계승하기 위하여 이사야 선지자를 따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그 입에 두시기 위하여 예레미야를 따로 부르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여러 시대 여러 종들을 자기 백성들 중에서 따로 부르셔서 신약에 나타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토록 했습니다. 
주님은 12제자들을 따로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바울과 그의 교부들을 따로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루터를 따로 부르셔서 중세기 타락한 기독교 개혁의 발화점이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칼빈을 따로 부르셔서 개혁주의 신앙의 봉화가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하지(C. Hodge)와 메첸(J. Gresham. Machen)등을 따로 부르셔서 개혁주의 신학의 초석이 되게 했습니다. 
주님은 손양원 목사, 주기철 목사, 한상동 목사, 박관준 장로, 조만식 장로를 따로 부르셔서 거룩한 교회운동을 계속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한창 무르익어 갈 때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 중에 베드로,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따로 불러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 가셨습니다. 
본문 17장 1절에 『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라고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산 아래 두고 예수님은 특별히 이 세 사람만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제자들 간에 편애된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제자들 중에 자신의 영광을 보이시기 위한 선택에 있어서도 주권적입니다. 
그는 하필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은 이 세 사람이 받은 축복이지 예수님이 그들이 필요해서 택한 것은 아닙니다. 

Ⅱ. 변형되신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본문 17장 2절에 『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고 했습니다. 

세 제자들은 예수의 변화된 모습을 실제로 목도했습니다. 
여기에 『 변형 』이라는 말은 "본질적인 형체"(Essential Form)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은 신비롭게 변화된 모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 변형 』이라는 말 "메테모르포데"는 변화라는 "메타"와 형상을 뜻하는 "몰프헤"의 합성어로 내면으로부터 변화되는 "본질적인 형체"(Essential Form)의 변화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가리워져 있는 본질적이고 영원한 영광의 광채를 능동적으로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이교도들의 신화에 나오는 변신(Ovidius의 Metamorphoses)이 아니라 장차 필연적으로 나타날 당신의 신적 본질을 잠시 계시하신 것입니다. 

고故 박윤선 박사는 주석하기를 "이 변화는 장차 천계에서 가지실 영광을 이 세상에서 잠깐 동안 참되이 가지시어 제자들에게 그의 재림의 영광을 미리 보이심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있어서 이 황홀하고 신비한 광경이야 말로 기상천외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롬 8:3)오신 인성 이면에 계시는 신성의 본질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그 몸 안에는 여전히 죄가 없으시다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확증하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변화된 모습이 장차 성도들이 가질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빌립보서 3장 21절에 『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모습이 입고 있는 옷 까지도 그 빛의 영향을 받아 희어졌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 요한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 독생(only begotten)이란 말은 그리스도를 대용품이 없는 유일한 위치에 둔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우월성에 대해서 히브리서 1장 1-3절에 『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신적 영광의 광채를 반사하는 반사체가 아니라 그 분 자신이 신적 영광의 광채이십니다. 

따라서 그 분의 영광은 모세의 얼굴에서 볼 수 있었던 반사된 영광과 차별화됩니다.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났다는 말은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빛을 말합니다. 

『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 』는 말은 예수님의 옷의 흰색은 세상의 어떤 흰색의 강도의 천이나 세탁 방법으로도 가질 수 없는 흰색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3절에 『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4-5절에 『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이 빛은 피조 세계에 있는 빛이 결코 아닙니다. 평소에 경험하는 태양 빛이나 과학자들에 의해 발명된 섬광이나 실험실의 빛도 아닙니다. 
해 같이 빛나는 예수님의 얼굴은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그런 광선은 아닙니다. 


Ⅲ.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씀하는 가운데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본문 17장 3절에 『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라고 했습니다. 
여기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다같이 시내산과 호렙산에서 계시를 받았습니다(출 31:18).
우리가 알고 있듯이 모세는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사람이며,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선지자의 대표격입니다. 

모세는 땅 위에서 죽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육신을 어디에 두셨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엘리야는 육신으로 불수레를 타고 회리바람으로 승천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이곳에 있다는 것은 그들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세 분의 대화 내용은 누가복음 9장 31절에 『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와 예언의 성취를 위해 한 마리의 속죄양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메시야라는 말입니다. 

본문 17장 12절에 『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라고 했습니다. 

여기 "이미 왔다"고 한 엘리야는 세례요한입니다. 그가 예언한 말씀에 따라 이 땅에 왔으나 결국 헤롯이 죽였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대우 받지 못하고 고난당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이 대화를 통해 모세와 엘리야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지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두 사람의 모든 역할을 완전하게 성취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자기 영광입니다. 
성육신 하신 사실이 변화산에서 그리스도의 영광 가운데 율법(모세)과 예언(엘리야)에 의해 증거되었습니다. 

변화산에서 세 분의 대화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나눈 대화와는 크게 대조가 됩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실 때 베드로는 이 일이 결코 주께 이르지 아니한다고 단언했습니다. 

이때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 23절에 『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의 제자들과는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광인지 몰랐습니다. 


Ⅳ. 구름 속에서 소리 가운데 나타난 그리스도 의 영광입니다. 

본문 17장 5절에 『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성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같은 성부 하나님의 음성은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도 똑같이 들렸습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에 『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수난당하기 바로 직전에도 들렸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8절에 『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각각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막 9:7) 『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눅 9:35)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말씀은 예수는 본래부터 사랑하는 아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 됨에 있어서 시간적으로 제약을 받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교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기독론을 변증하는데 중요한 성경입니다. 만약 양자론자들의 주장이 이유가 있다고 하면 여기에 "지금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성경 그 어디에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데 대해서 시간의 제약을 의미하는 단어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여기에 관계된 기독론의 여러 이단들의 주장에 쐐기를 박는 말입니다. 예수는 모세와 엘리야를 초월한 신적 권위를 지니신 자신만의 유일한 위상을 확실히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황홀한 광경을 오래 유지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본문 17장 4절에 『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누가는 본문과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9장 33절에 『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제안에 예수님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대답은 바로 하늘에서 왔습니다.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을 듣고 심히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제자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했습니다(마 17: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변화산의 영광을 본 세 제자들에게 본문 17장 9절에 『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 베드로는 이때를 기억하면서 베드로후서 1장 15-18절에 『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고 했습니다. 

이제 율법의 사람 모세도 가고, 예언의 사람 엘리야도 갔습니다. 그들이 일러준 실체가 오시니 그림자는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도, 예언도 십자가만 남겨놓고 갔습니다. 이제는 율법의 시대와 예언의 시대가 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새 시대가 왔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요구에 따라 십자가에서 죽는 순서만 남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언의 성취요, 율법의 완성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는 새로운 지식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에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실천이 곧 우리 삶의 의의요 우리의 존재 목적입니다. 그 사랑 실천의 활동 무대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입니다(행 20:28). 

그렇다면 오늘의 변화산은 신구약 성경입니다. 오늘의 변화산은 하나님의 자기 피로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단(교회)을 따로 부르셔서 개혁주의 신앙운동을 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따로 데리고 다니신다고 이 땅에서 특별한 예우를 기대하십니까? 당연합니다. 기대하십시오. 

마태복음 19장 29절에 『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샤머니즘은 천국이 없습니다. 오직 현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 『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궁극적 위로는 하늘에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17절에 『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고 했습니다. 

참된 기독교는 금세와 내세를 균형 있게 취급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소망은 하늘에 있습니다. 땅엣 것을 취하는 자들은 하늘의 것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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