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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약속을 가진 자의 삶의 자세 (창 17: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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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을 가진 자의 삶의 자세 (창 17:9-14)

1. <사랑의 약속 Appointment with Love>이라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by Sulamith Ish-Kishor).

1) 공군 조종사인 남자 주인공 블랜포드는, 도서관에서 섬머셋 모옴의 <인생의 굴레>라는 책을 빌려서 읽는데, 자신이 감동받은 그 부분에 누군가가 밑줄을 쳐 놓은 것을 발견합니다.

자기랑 생각이 너무 잘 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반가워서, 자기보다 먼저 대출받아서 그 책을 읽은 여자 주인공의 주소를 알아내어서 편지를 보냅니다. 

2) 블랜포드는 곧 전쟁이 일어나서 전쟁에 나갔지만, 두 사람은 계속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서로에 대한 사랑이 싹트게 됩니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나고, 두 사람은 뉴욕의 지하철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3) 블랜포드가 약속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약속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에, 아주 눈부신 미모를 가진 한 아가씨가 지나갔습니다. 블랜포드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녀 앞에 다가갔지만, 서로 약속한 장미가 그녀의 가슴에 꽂혀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블랜포드에게 매혹적인 미소로, '저랑 같이 데이트를 하실래요?',,, 하면서 속삭입니다. 그녀의 황홀한 미모에 넋을 잃고 어쩔줄 몰라하는데, 저만치서 마흔이 넘어 보이는 뚱뚱한 한 여인이, 초라한 옷차림새로 걸어오는데, 가슴에 붉은 장미를 꽂고, 손에는 <인간의 굴레>라는 책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블랜포드는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다가가서,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너무 뵙고 싶었습니다”... 하자, 

4)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하기를, 조금 전에 지나간 그 아가씨가, 저에게 이 장미꽃과 책을 주면서,, 여기 서 있다가, 어떤 남자가 와서 데이트를 신청하면, 제가 길 건너편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좀 전해 달라고 해서,,, 저는 여기에 온 것 뿐입니다..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5) 약속을 가진 자가,, 그 약속을 소중히 지키는 것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약속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2. 지난 주일 말씀에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지키실 마음이 있으신 신실하신 하나님이요, 또,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실 능력이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서, 약속한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 앞에서, 약속을 가진 자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신 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서, 우리도 약속을 가진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 약속을 가진 자의 삶의 자세> 

I. 먼저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것입니다. 

1. 1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셨습니다 (1절). 

1)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 –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6장 9절에 보면, "...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1)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도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게 여기셨다 – 즉, 의인이라 하셨고, 또, 노아처럼 아브라함에게도 “내 앞에서 행하라 – 동행하라” 말씀하셨습니다.

(2)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언약을 맺으시면서, 무지개를 언약의 증표로 주셨듯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면서, 할례를 언약의 증표로 주셨습니다. 

2) 또 "완전하라" 하셨는데,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라"는 명령의 결과로 주신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행해서, 그 결과로 완전하게 되라는 것입니다.  "완전하라" (blameless)는 말은,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책망할 것이 없는" 혹은, 영어로 "whole" 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온전하라"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3)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한 것 - 이것이 약속을 받은 자가 가져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2.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 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1)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 아래 있다"는 말인데, 라틴어로 Coram Deo라고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매우 좋아하는 말이었습니다.

특히, 종교개혁자 루터는 하나님 앞에 있는 자신 - 즉, 하나님의 임재를 매우 강하게 느꼈던가 봅니다. 루터는 이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 두려워서,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가고자 애를 썼던 사람입니다. 한번은 길을 가는데 천둥번개가 치는 것에 깜짝 놀라서, 그 자리에서 엎드려, 하나님께 신부가 되겠다고 서원할 정도로, 하나님의 임재를 매우 두려워했던 사람입니다. 

2) 그런데 왜 하나님의 임재(하나님 앞에 있음)를 두려워 하는가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텐데요,  여러분,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훤하게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 있다고 생각할 때에, 두렵지 않습니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다 파악되는데, 어찌 그분 앞에서 도망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정말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임재를 정말 경험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고자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래서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정말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3) 여러분, 우리는 우리와 별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서 도망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도망치고 싶고, 숨고 싶은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는 아직 하나님을 덜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거룩하심 앞에 설 때에, 내 마음과 생각이 부끄러워서 도망치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그 놀라운 영광 앞에 설 때에, 나의 추한 모습 때문에, 어찌 피하여 숨고 싶지 않겠습니까?

4)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행하라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도망가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오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자라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고 싶다고 했는데,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가까이 나아올 수 있겠습니까? 

5) 그것은 아버지 앞에서 도망갔던 탕자가 어떻게 다시 돌아왔는가 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엇이 탕자가 돌아오게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두려움은 도망가게 하지만, 사랑은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 아버지 없는 곳으로 갔지만, 그러나 아버지가 없는 곳은 없었습니다. 비록 아버지의 얼굴은 없었지 몰라도, 탕자가 가는 모든 곳에 아버지의 사랑이 충만하게 있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그 전능자의 눈은, 동시에 무한히 은혜로우시며, 지혜가 충만한 눈이요, 사랑이 가득한 눈이기 때문에, 그 아버지의 사랑이 결국 탕자를 돌아오게 했습니다. 

6) 그 아버지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가겠다고 말했을 때에, 그 아들을 붙잡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집을 떠난 아들이 어떤 대가를 치를지를 아셨을텐데, 그리고 아들을 보내고 아버지 자신이 어떤 고통을 당할지를 아셨을텐데,그래도 아들을 보내주었던 것은,, 바로 아버지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었기 때문에, 아들이 집을 떠날 자유까지 주셨고, 아버지를 배신하고 불순종할 자유까지 주셨고,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할 줄 알면서도,, 말리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 전지전능하심에 조금도 못지 않게,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7) 오늘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불순종할지를 아시면서, 이스라엘을 한없이 사랑하겠다고, 스스로를 그 약속에 붙잡아 매시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아들을 내어주는 희생을 치러야 함을 아시면서도, 아브라함과 이런 약속을 맺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셨는데, 이것은 죄를 짓지 말라는 그런 차원의 말씀이 아니라,  나의 무한한 (완전한) 사랑안에 영원히 거하라는 초청의 말씀입니다.
 

3. 믿음이라는 것이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무엇을 얻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안에 거하는 것이 믿음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안에 거하는 것 -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귀하고 필요한 것입니다.
 

II. 그리고 두번째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9-10절에서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는 것 외에, 그것을 외적으로 나타내는 표시로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10절). 

1) 결혼식을 할 때에, 예물로 반지를 서로 교환합니다. 반지교환을 하기 전에, 주례 목사님이 반지의 의미를 설명하는데, 반지가 둥글게 생긴 것은 두사람의 사랑이 끝이 없다는 의미요, 반지가 금이나 비싼 보석으로 만들어진 것은 두 사람의 사랑이 결코 값싼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라고 말하고, 서로 반지를 주고 받습니다. 

2)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면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금반지를 끼워 주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과 후손들은 할례를 행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과 약속을 맺은 언약백성이다.... 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이처럼 우리의 신앙은 내면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외부적인 면도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영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는 분명히 실재적인 것이요, 육체적이고, 외형적인 측면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4) 이미지 컨설턴트 전문가인 정연아라는 분이 나와서 인터뷰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인터뷰에서 정연아 씨가 강조했던 것은,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외모나 지식이 아니라, 매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력이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에, 내면이 좋아야 그것이 외면으로 표현된다고 하면서 내면만 강조하는데,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표정과 태도가 우리의 내면을 가꿀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내면은 그렇지 않은데, 외면을 가꾸는 것을 가식이라고 하는데, 가식이란 거짓을 말하는 것이지, 자신의 외면을 가꾸는 것은 가식이 아니라, 내면을 다루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5) 할례도 마찬가지입니다. 할례라는 외면의 표시를 보면서,, 항상 하나님과의 약속/언약관계를 돌아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표시가, 내면의 신앙을 다루는 하나의 힘이 되어야 합니다.


2.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즉, 할례의 의미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남용하게 됩니다. 

1)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루는 수단으로 할례를 주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할례를 특권화해서, 이웃과 차별하는 표시로 남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할례당이라고 자랑하고, 이방인을 무할례당이라고 비난하고 무시했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은 결코 선택받은 사람들을 위한 특권으로, 자랑으로 할례를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이 처음 만드신 제도가 아니라, 이웃나라에서 이미 행하고 있던 것을 빌려온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의 자녀에게만 할례를 행한 것이 아니라, 약속의 자녀가 아닌 이스마엘도 할례를 받게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뒤로갈수록 몸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고 강조하게 됩니다. 

3) 이렇게 우리의 신앙은 금방 형식만 남고, 내용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달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니까, 제자들은 공자가 가리키는 달은 쳐다보지 않고, 공자의 손가락만 쳐다본다고 하듯이.. 주일이나, 예배나, 각 기관이나, 행사나.. 교회의 모든 것은,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행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데, 어느덧 사람이 편의로 만든  제도와 형식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대신할 우려가 있게 됩니다. 

4)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귀중한 피를 흘리시면서, 구약의 모든 피흘림의 언약적인 요구들을 폐하셨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7장 19절에서는, "할례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갈라디아서 5장 6절에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5) 그리고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새로운 표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할례를 행하면서, 언약백성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스라엘의 범했던 과오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형식주의가 되지 않고, 종교화되어서 아무런 생명도 없고 열매도 없고, 잎만 무성한 종교가 되지 않고, 주신 은혜를 특권화해서, 남을 차별하고, 자랑의 도구로 삼고,,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 맺는 말씀 > 

1. 우리가 바라보며 항상 기억해야 할 표시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을 반드시 이루셨다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표시입니다. 우리 대신 자기 아들을 그 나무에 달리게 하신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에 대한 표시입니다. 

2. 여러분, 삶의 문제가 있습니까? 어려운 일, 힘든 일, 속상한 일이 있습니까?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심령이 메마르고 곤고하십니까?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풍성한 약속,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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