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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찌하면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 19: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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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면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 19:13-22)

우리는 언젠가 이 세상을 다 떠나야하는 순간이 옵니다. 함께 하던 사람들과 이별하는 날이 옵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실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별로 투자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잠깐의 육체적 쾌락이나 유익을 위해서는 눈을 부릅뜨고 달려가면서 영원을 위해서는 눈먼 사람처럼 무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지요. 

가끔 이런 사람들을 봅니다. 마치 죽지 않고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세상이 너무 좋아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적당히 넘기려고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존 하퍼 목사님이라는 분이 타이태닉호(號)에 승선했다가 익사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익사하기 전 얼음 조각을 탄 채 목숨을 잠시 부지하고 있었습니다. 얼음 위에 서 있는 인생, 그 얼음의 수명이 자신의 수명이라는 것입니다. 

순간적인 삶, 찰나의 삶, 그런 가운데서도 하퍼 목사님은 어떤 젊은이에게 다가갔습니다. “젊은이!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물었답니다. 그 때 그 청년의 대답은 “아니오”였습니다. 곧 바로 목사님은 이 젊은이에게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러면 구원을 받습니다”라는 말이 마치는 순간에 파도가 밀려와 그 얼음이 조각나면서 그 목사님이 그만 물속으로 잠겨 버렸습니다. 

이 광경을 본 그 청년은 크게 깨달았습니다. 그 목사님의 말씀, 즉 말하자면 죽음 이후를 준비하라고 죽어 가는 얼음바다 위에서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물론 그 청년은 살아나서 어느 날 캐나다 해밀턴의 어느 집회에서 “그 날 나는 3000m 바다 위에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라고 구원의 탄성을 외치며 간증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한 청년이 등장합니다. 그는 큰 부자였고, 관원이었으며 엄한 율법을 어릴 때부터 잘 지키는 도덕주의자 내지 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좋은 환경에서 성장한 행운아였습니다. 그의 심령에도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 어떻게 하면 영생할 수 있을까? 하는 열렬한 구도자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할 수 있을까?

영원을 향한 노스탤지어(명) 연어는 넓고 넓은 바다를 헤엄치며 다니는 바다물고기로 생애 대부분을 보냅니다.그러나 몇 년이 지난 뒤 죽을 때가 되면 어려서 먹던 물맛을 기억해내고 수 천리 수 만리 떨어진 강물로 찾아와 알을 낳고 죽는 회귀성 어류입니다. 

나침반이나 이정표도 없이 수 만리를 돌아다니다가 찾아오니 참으로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이것을 회귀본능,혹은 회향병(懷鄕病) : Nostalgia- 고향을 몹시 그리워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도 하나님을 찾는 본능과 영원을 사모하는 노스탤지어를 갖고 있습니다.그래서 짧은 인생 기간에 아무리 높은 벼슬을 하고, 많은 돈을 벌어도 영(靈)의 문제,즉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참 행복과 만족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이 같은 인간의 덧없음을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다』(벧전1:24-25)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흙에서 난 풀은 푸르고 싱싱하게 자라다가도 쉽게 말라죽고 말며, 그 꽃은 풀보다 더 빨리 시들어 떨어지게 마련입니다. 

이와 같이 흙에서 난 육체는 조만간 다 늙고 병들어 죽어버리고 마는 것이며 육신적인 인간이 성취한 부귀영화와 행복 역시 잠시 피었다가 떨어지는 꽃과 같이 속히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연속사극에 나오는 조선왕조 5백년의 역대 임금들을 보면 각종 좋은 보약을 다 먹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다 죽어버렸고 피바람을 일으키며 정권을 탈취했지만 지금은 무덤에 차가운 비석 몇 개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참으로 허무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더 분명해 지는 영생 

프랑스의 시인이며, 소설가, 극작가로 유명한 위고는 죽음이 가까워짐에 따라 영생이 더 분명해 진다고 했습니다. 

"겨울은 내 머리 위에 있고, 영원한 봄은 내 마음 속에 있다. 내가 종말에 더 가까이 갈수록 내세의 영원한 교향곡은 내 주위에 더 분명히 들린다. 

반세기 동안 나는 산문(散文)과 시로써 내 사상을 기록했으나, 내 속에 들어 있는 것의 천분의 일도 발표하지 못한 줄로 생각된다. 내가 무덤으로 내려간 때에 나의 일생의 과업은 끝날 것이나, 다른 날이 그 다음 아침을 시작할 것이다. 인생은 황혼과 함께 끝나지만 새벽빛과 함께 열린다" 

신앙의 사람 위고는 죽음 뒤에 있는 영생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히11:13-16) 


세상에서 준비해 둘 영생 

인생은 우리가 영원을 위해 결정짓는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이 세상에서 영생을 준비하기에 실패한다면, 그의 모든 것은 성공한다 할찌라도 그 생(生)은 실패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경고하여 "이와 같은 큰 구원을 경홀(輕忽)히 여기면 너희가 어찌 피하리요"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신 

미국의 정치인으로 일리노이 주 검찰총장을 지냈고 무신론자로서 유명한 로버트 잉거솔(1833∼1899)은 반기독교 강연자로 유명합니다. 

그의 일화에 따르면 그의 임종시에 딸이 물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이 세상을 사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까?” 

그러자 잉거솔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주장한 무신론은 허무한 것이다. 나는 아직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너는 어머니를 따라 예수를 믿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죽음을 앞두고는 가장 진실된 말을 한다고 합니다. 평생에 그렇게 강조했던 그의 무신론 강의도 자식에게는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안됐고 안타까운 일인가? 여기에 그리스도인과 불신자의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훌륭하고 큰 일을 한 자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하여 내세의 확신이 없으면 죽음 저편의 영원한 삶은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후에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그런데도 세상에서 위대했던 인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 최후에 비참한 생애를 마친 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이 죽음 앞에서 한 말을 보면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프랑스 군대! 조세핀!” 이라고 외치며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외롭게 죽었습니다. 

독일의 시인 괴테는 “어둡다. 나에게 빛을 달라”고 했습니다. 

또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나는 하나님과 인간에게 버림을 받았다. 나는 지옥에 떨어진다. 오! 그리스도여 예수 그리스도여” 라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다릅니다.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라도 예수를 믿으면 다 구원을 받습니다. 강도도 구원받고 세리도 구원받고 창기도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거지 나사로는 죽음 후에 천사에게 받들려 아브라함 품에 들어갔지만 부자는 음부의 고통에 목말라 탄식하였습니다. 

역사 속에서도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내세의 확신을 갖고 천국에 들어간 훌륭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미국의 초대 대통령 워싱턴은 “좋다! 저 세상은 참 아름답군”이라는 말로 천국을 증거했습니다.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은 “나를 받아주시옵소서 이제 당신께 가나이다”고 했습니다. 또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전도중 순교하면서 “주의 손에 내 영혼을 돌려드리나이다”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확신에 차 있는 천국에 대한 증언인가? 이처럼 내세의 확신이 있는 자만 전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어둡고 불확실성이 극에 달해 표류하는 이 시대에 내세의 확신이 있는 복음 전도자가 많이 나오길 우리 문화교회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본문의 청년의 질문뿐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그 때 주님의 대답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그 때 청년이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이 때 주님은 5계명에서부터 나머지 십계명까지 말씀을 하십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공자에 의하면 군자가 지켜야 할 선(善)은 자기가 원치 않는 일은 남에게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공자는 하지 말라는 데 역점을 두었고, 예수님은 행하라는 데 역점을 두었습니다. 공자는 소극적 윤리를, 예수님은 적극적 윤리를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 나온 젊은 한 청년은 계명을 잘 알고, 도 어려서부터 잘 지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계명들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 외에는 모두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영생을 얻기 위해 하지 않는 일에 열심 하였습니다. 그 청년은 자신 만만하게 그러면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영생을 얻기 위해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은 근심하며 떠났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영생을 얻기 위해 성수주일을 잘 지키고, 십일조 생활을 하고, 경건한 모습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은 이런 인위적인 것으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빈손으로 들어가야 하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씀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내 모든 소유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함으로 모든 소유를 가난한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에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까? 아닙니다. 욥이 얼마나 부자입니까?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야곱, 요셉, 다윗 등을 보십시오. 모두가 거부였습니다. 

주님이 하고자 하는 말씀은 네가 무엇을 더 의지하고 중히 여기느냐 하는 가치관 문제입니다. 이 청년이 영생의 문제에 대해 민감하였던 것처럼 그의 소유에 대한 애착심도 강렬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구원이 무엇입니까? 영생이 무엇입니까?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뿐입니다. 이 믿음은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말씀대로 철저하게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요 이것이 곧 영생이요 구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합니다. 한 물에서 단물과 쓴물이 날 수 없다고 합니다. 

이 청년은 주님을 섬기기보다 재물을 더 섬겼습니다. 주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세상부귀를 더 의지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좇는 것보다 이 청년은 세상을 떠 좇았습니다. 청년의 마음에는 영생에 대한 구도심은 있었지만, 이는 그의 욕심에 불과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소유하는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삶의 변화와 사랑의 실천이 영생이다 

한 잔의 물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목마르다고 하면서 물을 찾는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어리석은 짓을 행하고 있습니다. 자기 앞에 있는 행복을 누릴 생각은 하지 않고 자꾸 엉뚱한 곳에서 행복을 찾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통계가 있습니다. 어디에서 어떻게 조사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교인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더니,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25%의 교인이 기도를 안하고 있고, 

35%의 교인이 성경을 읽지 않고, 

60%의 교인이 신앙 관계 서적을 읽지 않고, 

70%의 교인이 교회 활동을 외면하고 있고, 

85%의 교인이 한 명의 영혼도 인도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해서 100%의 교인이 하나같이 구원받아 천국에 가고 싶다는 반응을 보였고 합니다. 

얼마나 이율배반적입니까? 믿음 생활 그 자체가 복된 길이요, 영원한 하늘나라를 향한 영생의 삶입니다. 그런데도, 이 믿음에 있어서의 알짜 알맹이들은 다 빼놓은 채, 교회를 다닌다고 하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알맹이 없는 빈 강정으로, 빈껍데기만 가지고 살아간다는 말씀이지요.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5:1) 

말씀처럼 땅에 있는 장막이 무너지는 날이 옵니다. 여기 장막은 인간의 육체를 상징합니다. 인간은 천막집과 같아서 영구히 존재할 수 없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계가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해어지고 세월이 흘러갈수록 약해집니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때로는 병들어 추해 보입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무너지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를 준비하는 사람은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영원한 집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삶의 위대함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원을 위해 기꺼이 투자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행복을 위해 얽어매는 것들을 과감하게 벗어 던지는 승리자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등장한 청년처럼 근심하며 돌아가는 심령이 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 시간 기도할 때 주의 구원의 은총이 충만하길 바랍니다. 주님의 구원손길을 붙드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설교 뒤에 부르게 될 찬송가 94장은 수많은 사람의 삶을 바꾸어 놓은 복음성가입니다. 이 찬송은 목사의 아내인 밀러가 그의 아들 쉐어를 위해 지은 시인데, 어느 주일 아침 피아노 악보대에 놓여있는 그 시를 쉐어가 보자 그 자리에서 곡을 붙인 찬송입니다. 

우리 가사도 참 은혜스럽게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1절에 있는 본래의 가사, 영어 가사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금이나 은보다 나는 예수님을 더 갖고 싶어라 

많은 재물을 갖기보다 나는 주님의 것이 되고 싶어라 

집이나 땅보다도 나는 예수님을 더 갖고 싶어라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왕이 되거나 무서운 죄에 매여 사는 것보다 

나는 못에 찔린 그의 손에 이끌리고 싶어라 

오늘 이 세상이 주는 그 어떤 것보다 나는 예수님을 갖고 싶어라 


이 아름다운 찬송이 나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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