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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땅에서 거기로 (대상 5: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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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역대상 5장 18-26절 
제목/그 땅에서 거기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이스라엘 왕정 시대에 요단강 동쪽에 살던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의 이야기입니다. 

5장 1절부터 이들의 계보가 나오고 있습니다. 다른 지파들이 모두 요단강 서쪽에 살았는데, 이들만 요단강 동쪽에 살았습니다.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지도를 한 장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도에 보시는 것처럼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지파의 절반은 요단강을 건너기 전, 즉 요단강 동쪽에서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본래 이 땅은 아모리 사람들의 땅이었는데, 모세가 점령하여 이들에게 분배한 것입니다.

<므낫세 반 지파>라고 부르는 이유는 므낫세 지파의 절반은 강 서쪽에 살았고, 절반만 동쪽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요단강을 기준으로 동쪽에 살던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는 한 덩어리처럼 살아갔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읽은 말씀은 대략 어느 시대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그것을 암시해 주는 기록이 17절에 나옵니다. <이상은 유다 왕 요담 때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때에 족보에 기록되었더라>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의 이야기를 하면서 <여로보암 때에 기록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내용은 여로보암 왕 시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로보암 왕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대략 주전 790년에서 750년까지, 햇수로 41년 동안 북 왕국을 다스린 사람입니다. 북 왕국을 처음 시작한 왕의 이름도 여로보암이기 때문에 구별하기 위해서 이 사람은 여로보암 2세라고 부릅니다. 당시 그의 영토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필적할 정도로 확장되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전쟁 이야기는 여로보암 당시에 있었던 전쟁 중 일부를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19절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가 싸워 이긴 적들을 언급합니다. <그들이 하갈 사람과 여두르와 나비스와 노답과 싸우는 중에>라고 되어 있지요. 

이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요? 일설에는 아람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타당한 해석은 이들이 이스마엘의 후손들이라는 견해입니다. 그 처음에 <하갈 사람>이 나오는데, 하갈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의 후처입니다. 

그러므로 하갈 사람이란 <하갈의 민족>, 즉 하갈의 후손이란 의미가 됩니다. 또 <여두르와 나비스와 노답>이 나오지요? 이들에 대해서는 역대상 1장 31절에 힌트가 나옵니다. 거기 보면 <여둘과 나비스와 게드마라 이들은 이스마엘의 자손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름들을 비교해 보면 <여둘>과 <여두르>, 같지요? 또 <나비스>도 같습니다. 문제는 <노답>과 <게드마>인데, 이 둘이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면 이들은 모두 이스마엘의 후손이 됩니다. 

여러분, <이스마엘>이 누구입니까?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입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은 대립관계에 있었습니다. 오늘날 아랍 사람들은 이스마엘의 후손들로 알려져 있고, 지금도 아랍과 이스라엘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지요. 

당시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는 그 수가 적에 비해 적었습니다. 본문 18절을 보면 <르우벤 자손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에서 나가 싸울 만한 용사 곧 능히 방패와 칼을 들며 활을 당겨 싸움에 익숙한 자는 사만 사천칠백육십 명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비해 적들은 매우 강했는데, 21절 끝에 보면 그들이 사로잡은 포로만 십만 명이라고 했으니, 실제로는 이십 만, 삼십 만의 적들과 싸운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의 승패는 군인의 숫자와 상관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강한 적과 싸워 당당히 승리했습니다. 영토가 많이 확장되었습니다. 

23절을 보면 <므낫세 반 지파 자손들이 그 땅에 거주하면서 그들이 번성하여 바산에서부터 바알헤르몬과 스닐과 헤르몬 산까지 다다랐으며>라고 했지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의 이해를 위해 다시 지도를 보면 위쪽에 파랗게 표시된 부분이 확장된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뿐 아니라, 엄청난 전리품을 얻었습니다. 

21절을 보세요. <그들이 대적의 짐승 곧 낙타 오만 마리와 양 이십오만 마리와 나귀 이천 마리를 빼앗으며 사람 십만 명을 사로잡았고>라고 했습니다. 그 후에도 그들은 매우 번성했는데, 유력한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24절을 보면 <그들의 족장은 에벨과 이시와 엘리엘과 아스리엘과 예레미야와 호다위야와 야디엘이며 다 용감하고 유명한 족장이었더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넓혀진 영토, 많은 전리품, 그리고 승리자의 명예, 탁월한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번성했습니다. 23절을 보면 <그 땅에 거주하면서>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서 <그 땅>이란 무슨 땅일까요? 그 땅은 하나님께서 주신 땅, 축복의 땅을 말합니다. 그들은 그 땅, 요단강 동쪽 땅에서 번성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축복이 우리에게도 임하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 기업,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곳에서 번성하길 원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부분으로 가면 내용이 완전히 반전되고 있습니다. 26절을 보면 이들이 더 이상 <그 땅>에 살 수 없게 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이 앗수르 왕 불의 마음을 일으키시며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의 마음을 일으키시매 곧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를 사로잡아 할라와 하볼과 하라와 고산 강 가에 옮긴지라 그들이 오늘까지 거기에 있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앗수르 왕들에 의해 포로가 되어 <하볼과 하라와 고산 강가>로 강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하여 <그 땅>에서 <거기로> 끌려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까지>, 이 말씀이 기록되던 당시까지도 기업으로 받은 축복의 땅에 돌아오지 못하고, <거기서>, 그 포로의 땅에서 비참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이는 마치 아버지 집을 떠나 돼지우리에서 살게 된 탕자의 처지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토록 번성하던 이들이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들의 상황을 결정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태도>였습니다. 그들이 적에게 이기고 번성할 때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이것이 승리의 비결이었습니다.  20절 전반부를 보십시오. <도우심을 입었으므로 하갈 사람과 그들과 함께 있는 자들이 다 그들의 손에 패하였으니> 

누가 그들을 도왔습니까? 그들을 도우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는 사람처럼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20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이는 그들이 싸울 때에 하나님께 의뢰하고 부르짖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응답하셨음이라>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시는 분입니다. 부르짖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전쟁을 앞두고 계십니까?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하나님께 여러분의 전쟁을 맡기시길 바랍니다. 불리하다고 해서 포기하지 마십시오. 여호와께서 도우시면 숫자의 많고 적음은 문제가 아닙니다. 

사무엘상 14장 16절을 보면 요나단도 이런 믿음을 가졌고, 승리하였습니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할렐루야! 요나단은 수행하는 사람 한 사람만 데리고 블레셋 적진을 휘저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만고 적음에 달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듯 하나님을 의지하던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 사람들은 나중엔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멸하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긴지라>. 이게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태도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보다 더 위대한 분을 찾아 섬긴 게 아니라, 형편없는 우상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섬긴 것은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멸하신 그 땅 백성의 신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누구나 자신보다 우수한 것을 배우고자 합니다. 이런 런던올림픽 양궁 경기가 끝난 후 <로이터 통신사>는 <한국은 반도체, 선박, 스마트폰에 이어 주력 수출품에 양궁 감독을 포함해야 한다.>고 재미있게 말했습니다. 

이번 올림픽에서 남자단체전 금메달을 딴 이탈리아, 은메달을 딴 미국, 동메달을 딴 한국, 그리고 남자 단체전 4위와 여자 양궁 개인전에서 은, 동을 가져간 멕시코까지 모두 한국 감독이었습니다. 왜 세계는 한국 감독들에게 배웁니까? 그것은  한국 양궁이 최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양궁이 뭔지도 잘 모르고, 양궁에서 입상한 적도 한 번도 없는 나라 사람을 데려다가 양궁을 배우려한다면 이처럼 바보 같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보였습니다. 자신들 앞에서 멸망한 나라 사람들이 섬기던 그 신, 자기 백성을 보호하지도 못한 그 신을 섬긴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승리를 안겨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들에게 패배한 나라의 신들을 섬기는 것은 정말 바보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멸망한 나라의 신들을 섬겼을까요? 그 이유는 그 신들, 우상들이 사람들의 본능을 자극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우상들의 축제는 화려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우상들의 축제는 쾌락이 있었습니다. 성적 쾌락이 난무했습니다. 먹고 마시고, 춤추고, 벌거벗은 무희들과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데는 경건함과 거룩함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제와 정결함을 요구하셨습니다. 안식일이 되면 하던 일도 멈추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볼 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재미없는 일이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쾌락과 화려함에 취하게 하는 재미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우상들을 선택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즐기고 싶은 자신들의 욕망을 숭배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 신을 이용했을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상 숭배는 곧 자기중심주의임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 탐심이 우상숭배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골로새서 3장 5절을 보면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달콤한 미끼로 사람을 유혹하는 것은 에덴에서부터 시작된 사단의 전략입니다. 사단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이 달콤한 유혹이 인류를 멸망으로 인도했습니다. 본래 시단은 속이는 자입니다. <이게 다 너를 위하는 거야! 얼마나 즐겁냐?>고 속삭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을 얻고 싶으십니까? 승리하는 성도가 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힘들어 보이고 재미없어 보여도 하나님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려면 소위 편리한 신앙을 포기해야 합니다. 

요즘 자판기는 정말 놀랍도록 발전했습니다. 500원만 넣으면 카펫을 빨아주기도 하고, 청소기로 먼지를 빨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미국에는 유타주에는 동전을 넣으면 이혼서류가 나오는 자판기가 있다고 합니다. 파리에는 솔향기 산소를 뿌려주는 자판기가 있고, 동전을 넣으면 담배 한 개비에 불까지 붙여주는 자판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자판기처럼 믿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동전 넣을 테니, 내가 원하는 것을 주세요...> 설교도 귀에 즐거운 설교를 좋아합니다. 꾸지람하는 설교는 좋지 않습니다. 방송을 통해 듣고 싶은 설교를 하는 목사님들의 설교를 골라 듣습니다. 이러다보니 하나님의 뜻대로 믿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믿습니다. 꾸중하는 하나님, 엄한 하나님은 매력이 없고,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 매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은 우리를 진정한 축복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게 아니라, 자기 욕심을 섬기는 것이요, 이름만 하나님 신앙일 뿐, 우상숭배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하나님은 엄한 아버지와 같습니다. 그 어떤 아버지가 자식이 하고 싶은 대로 무슨 일이든 다 하게 하겠습니까? <너 하고 싶으면 마약도 하고, 도둑질도 해라>, 이렇게 말하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사랑하여 엄격합니다. 

우리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 되도록 엄격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따라 단정하길 원하십니다. 명예를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 대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지십니다. 승리를 주십니다. 편리한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께 우리를 맞춰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보다 하나님만 의지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만이 모든 것의 원천이시기 때문입니다. <건강과 생명>이란 잡지가 있지요. 지난 6월호에 보면 작가 김재욱씨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이 분이 직장에 다닐 때 파평 윤 씨인 직장 상사가 있었는데, 늘 이 분을 비웃었다고 합니다. <이 보게. 자네는 왜 하나님을 믿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이야. 왜 자네가 그들의 들러리를 서려고 하는가? 자넨 안동 김 씨니, 자네 뿌리를 찾아보게..> 이런 식으로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재욱씨는 그 글에서 여기에 대해 반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하나님이 아니고, 온 인류의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들러리를 서는 게 아니라, 마땅히 섬길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분은 명창 고 박동진 선생님이 우리 고유의 것인 판소리를 하면서도 교회 장로님으로 만물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긴 것을 예로 들었습니다. 

본래 인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는데, 바벨탑에서 흩어졌습니다. 그래서 각 나라에 비슷한 점들이 참 많습니다. 이 분은 그 몇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참 재미있습니다. 우리 말고도 김치를 먹는 민족이 있고, 우리나라에서 옛날에 동지에 팥죽을 문에 바르던 풍속이 이스라엘 백성의 유월절 풍속과 비슷하며, 국립중앙박물관에 가 보면 히브리어가 새겨진 기왓장이 있다고 합니다. 

또 현재가 단기 4,345년인데, 이는 노아 홍수가 지금부터 4,352년 전인 것과 흡사하다고 말합니다. 또 예수님을 상징하는“샤론의 장미”는 수메르가 원산지인 무궁화를 말하는 데, 이게 우리의 국화라는 게 신기하다고 합니다. 또 중국 사람들은 하나님을 <상제, 즉 샹다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창세기 17장 1절에 나오는 <전능자 하나님>을 말할 때의 <샤다이>와 발음이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과 나라의 근본임을 주장하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근본입니다. 진정한 복과 생명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행복한 인생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그 땅>에서 번성하는 것입니다. 그 땅에서 번성하는 비결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거기서> 끌려가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 땅에서 거기로 가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거기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땅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듯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부디 우리 모두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 하나님만 섬기는 사람,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만 부르짖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 땅에서 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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