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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시 4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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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시 41:1-13)

시편 41편으로 시편 제 1권이 끝납니다. 다음 주부터는 히브리서 강해설교를 하고 다시 시편으로 돌아오려고 합니다.

오늘 설교하는 시편 41편은 브라질 집회 때문에 3주간 설교 준비를 했습니다.
그래서 더 충실한 설교 준비를 했다기 보다는, 시편 41편으로 기도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다윗은 몸이 많이 아픈 형편입니다. 사람들이 그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여길 만큼 중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합니다. 

4절 ..."주님,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나를 고쳐 주십시오." 

다윗의 이 기도가 그대로 저의 기도가 되었습니다. 기도만 하면 “주여,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번 눈물이 흘렀습니다. 특별히 어려운 형편이 아닌데도 제 심정은 갈급하였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오늘 “주여, 제게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 하며 눈물로 기도하게 되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누구나 부족한 것, 힘든 것, 잘못한 것, 병든 것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갈 때마다 이런 우리를 품어주시고 받아주시기를 사랑해주시고 치료해주시고 일으켜주시기를 갈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다윗의 기도를 통하여 매우 중요한 교훈 하나를 얻게 됩니다.
사람에게 은혜를 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형편에 처하면 쉽게 눈에 보이는 사람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은혜를 얻으려 할 때마다 반드시 실망하고 좌절하고 분노하게 됩니다.

5-9절에 보면 다윗이 병들자 원수들은 다 기빠하였습니다. 
8절 "몹쓸 병마가 그를 사로잡았구나. 그가 병들어 누웠으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다 겉으로는 부하요 친구들이었습니다.

6절 나를 만나러 와서는 빈 말이나 늘어놓고...
9절 내가 믿는 나의 소꿉동무, 나와 한 상에서 밥을 먹던 친구조차도, 내게 발길질을 하려고 뒤꿈치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람들이 은혜롭지 못하다고 해서 그가 특별히 나쁜 사람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렇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남미 브라질에 갈 때, 비행기만 24시간을 타야 하는 일정이라,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가야 한다는 생각에 온 가족의 마일리지를 다 긁어모아 비지니스 석을 예약했습니다.
비즈니스 석에 타면 몇 가지 편안함이 주어지는데, 그 중의 하나가 조그만 공간이지만 자신의 팔걸이가 확보됩니다. 그런데 바행기에 탑승해 보니 먼저 앉은 옆자리 승객이 자신의 소지품들을 나의 팔걸이에 걸쳐 놓은 것입니다. 나의 물 컵을 올려 놓아야 하는 곳 까지 그의 물건들이 놓여있었습니다.
순간 마음이 힘들어졌습니다.‘이 자리를 어떻게 마련한 것인데, 이게 뭐야?’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여기는 나의 몫이니 물건을 치워달라고 하나, 좌석을 구분하는 가림대를 올려 버릴까?’여러 가지 생각이 났습니다. 

목사인데도 제 마음이 그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참자, 나중에 내가 목사란 사실을 이 사람이 알게 된다면 얼마나 치사하다고 여길까?’걱정이 되었습니다. 조금이라도 권리를 침해당하거나, 불편한 것을 참지 못하는 성질, 그러고도 십자가 복음을 전한다고 하느냐? 하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웠습니다.

잠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왼쪽 팔걸이 부분을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비행기가 브라질에 도착하여, 내릴 때 한 승무원이 다가와 인사를 하면서 "목사님이시죠?" 하였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다윗은 사람에게 은혜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였습니다.
본문에서 11번이나 주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만 은혜가 있습니다. 
다윗이 병들었을 때, 두려움이 하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죄 때문에 이런 벌을 받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였습니다.

4절 ...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기도하여 즉각 병이 고침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즉각 은혜를 받은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13절을 보면 다윗이 은혜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주님, 찬양을 받으십시오. 영원에서 영원까지 찬양을 받으십시오. 아멘, 아멘.

몸은 병들고 사랑하는 사람 믿었던 사람들에게서도 배신을 당했지만 그는 찬양합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했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정말 얻고 싶었던 은혜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시며 여전히 함께 하심을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11절 주님이 나를 사랑하심을 나는 알게 될 것입니다.
12절 주님께서 나를 온전하게 지켜주시고 나를 주님 앞에 길이 세워 주십시오. 

이것이 다윗이 원하는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응답받은 것입니다. 

다윗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몸이 건강해지거나 원수를 이기거나 왕국이 확장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하였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믿되, 결코 지식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실제로 함께 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목동일 때, 들판에서 양들과 함께 있을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그는 악기를 연주하며 찬양을 불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정말 친밀히 알았고 사랑하였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운 것도 단순히 장래성이 있는 용감한 소년이 아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정말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3주간 브라질 여행, 떠날 때도 주님이셨습니다. 돌아올 때도 주님이셨습니다.
내내 함께 하셨습니다. 영성일기를 쓰면서 더욱 분명하였습니다.
한국으로 떠나 오눈 날 아침에 묵상하면서‘나를 따르라’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주님은“교회를 부흥시키라”,“열심히 목회하라”,“선교사로 나가달라”하시지 않으시고 그저‘나를 따르라’하셨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였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것이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는 제가 명심할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얼마나 많은 교인이 모이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과 친밀하며, 온전히 주님을 따르는 교인이 몇 명인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브라질에서도 파라과이에서도 미국에서도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을 만났습니다. 다들 힘들어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환경, 여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늘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알면 그것으로 충분하였습니다.

파라과이 선교지, 목회하는 한태희목사, 교인들에게 제대로 성경을 가르치지도 못하여 안타까와 하셨습니다.
그래도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가르치는데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선교지가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데는 아무 지장이 부족함이 없고 오히려 더 좋은 환경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 이전에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삶의 시작입니다. 초대교회가 그랬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아는 단계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분명히 함께 하셨습니다. 은혜를 사모하고 예배자리로 나아가고, 기도하고 싶고, 죄지으면 마음에 근심을 느끼는 것이 다 예수님입니다.
이것이 마음에 오신 주님의 역사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들어도 사랑을 느끼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무조건 믿으라? 안됩니다.
예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지만 예수님께서 마음에 계시다는 것을 좀처럼 깨닫고 믿지 못합니다. 자꾸 바깥을 바라봅니다.
이유는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는 결단이 아직도 분명치 않기 때문입니다.

집에 아이가 있다면, 부모님이 계시다면, 입시생이 있다면, 머리 속에서 그 생각이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정말 마음에 영접하였다면 항상 그 생각 뿐일 것입니다. 예수님 생각 뿐일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임재를 느끼게 마련입니다.
 
마 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도무지 알지 못하노니”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큰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럴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누가 사무실에 찾아와서 저를 잘 안다고. 그런데 저는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구세요! 도무지 알지 못하겠는데요.” 저에 대하여 잘아는데요, 제 책도 알고 제 이름도 과거도 잘 알았다 하더라도, 문제는 친밀한 교제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문제이지 사람과의 문제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다윗은 아들과 싸우지 않고 조용히 예루살렘 성을 떠나 피합니다. 그 때 시므이라는 노인이 길에서 도망가는 다윗을 저주하였습니다. 그것을 보고 신하들이 격분하여 시므이를 죽이려 할 때 

삼하 16:10 이하에서 보면 다윗이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만 바라보았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세우셨던 것입니다.  

에서가 장자 축복을 잃어버린 것은 하나님께 복이 있음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에서가 사냥하고 돌아와 배가 고팠을 때, 팥죽을 쑤고 있는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만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야곱은 장자의 복을 주면 팥죽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에 에서가 말했습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것이 에서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장자 축복이 팥죽만도 못해 보인 사람입니다. 이 장면을 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하였겠습니까? 

예배 중에 축도 시간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 시간이 소중합니까? 솔직히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라고 여기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빨리 나가야 엘리베이터도 타고 식당에서 자리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에서와 같은 생각입니다. 야곱 같으면 펄쩍 뛸 일입니다. ‘축도를 놓치다니!’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알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은혜롭게 됩니다.
1절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복이 있다.”

1 “...재난이 닥칠 때에 주님께서 그를 구해 주신다. 2 주님께서 그를 지키시며 살게 하신다. 그는 이 세상에서 복 있는 사람으로 여겨질 것이다. 주님께서 그를 원수의 뜻에 맡기지 않을 것이다. 3 주님께서는, 그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에도 돌보시며 어떤 병이든 떨치고 일어나게 하실 것이다.”   

다윗이 담대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은혜로운 자입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가장 분명하게 경험할 수 있는지 아십니까? 남을 용서해 볼 때입니다. 그 때 죄인을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정확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은혜로운 사람입니까? 가족 사이에, 교인들에게, 사화생활을 하면서 남의 허물과 부족함을 얼마나 잘 받아주는 사람입니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그들이 겪는 더러움을 함께 겪는 것입니다.
파라과이 임동수선교사, 원주민들과 함께 더러워졌습니다. 그렇게 함께 살고 함께 먹으니 마음이 열렸습니다. 
주님이야 말로 친히 더러워지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오신 것은 더러워지신 것입니다.
이 주 예수님을 알고 믿을 때 우리 마음에 은혜가 충만하게 됩니다.

지난 금요일 성령집회 때, 김병년목사님의 특별 설교가 있었습니다.
어떤 교인들에게는 김병년목사님의 설교가 듣기 힘든 간증이었을지 모릅니다.
아직도 젊은 목사님인데도 사모님이 뇌경색으로 쓰러진 지 7년 째, 식물인간처럼 지내시고, 게다가 목사님의 실수로 인하여 찜질팩 중화상을 입어 두 다리를 절단하게도 된 일도 그렇지만“기도한다고 모든 병이 다 낫는 것은 아닙니다!”하고 외치는 목사님의 설교가 기도 응답을 받고자 금요일 밤 교회로 달려온 많은 성도들에게는 당황스러움을 넘어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개척교회를 시작한데다가 사모님이 이렇게 되자 목사님은 엄청나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면서 기도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꼭 기도가 부족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기도의 태도가 불량해서도 아닌데, 기도로 해결되지 않는 삶의 문제가 있음을 알았답니다. 
그때부터 기도가 바뀌기 시작했답니다. 무엇을 바꿔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품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성령집회 때 옆에서 기도하는 김병년목사님을 보면서 그가 기도의 용사임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김병년목사님은 지금도 기적을 포기한 것이 아니고, 기도를 꾸준히 하지만 기도할수록 약함 가운데 살아가는 사랑의 법을 가르쳐 달라고 졸라대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기적을 바라는 기도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랑을 구하는 것으로 기도의 중심을 바꾸었다고 했습니다. 아내 곁에 머물고, 아내에게 말을 걸고, 아내를 사람으로 인정하며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기도하면서 삶을 사랑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목사님이 배운 기도의 교훈이요 목사님 안에 일어난 변화였습니다.
기도와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은 한 쌍입니다. 그러나 기도와 사랑 또한 중요한 한 쌍입니다. 

삶이 어려울 때, 누구든지 상황을 변화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취직하고,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밥을 먹고, 자기가 원하는 때에 결혼하고 싶어 합니다. 기도응답도 자기가 원하는 때, 자기가 원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이 오히려 진정한 기도의 역사,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것을 모릅니다.
주어진 상황을 바꾸려고만 하지 말고, 주어진 일상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더 큰 응답입니다. 기적 중의 기적은 사랑하는 것, 찬양하는 것입니다.

타락 멸망으로 치달아가는 인류를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사랑으로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했던 자신을 회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김병년목사님의 말씀 후 기도 시간에 주의 성령님께서 많은 교인들이 마음 깊이 역사하시고 만지시고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 예수님과 친밀하게 사는 것, 예수님과 하나되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미 함께 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주 예수님과 친밀해지면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벌떼같이 해하려 일어나더라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찬송할 수 있습니다.
(유기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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