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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 (고전 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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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 (고전 13:1-13) 

요즘 일본과 여러 분야에서 관계가 좋지 않습니다만, 일본에 일본의 성자요 일본의 사도 바울이라고 불리는 가가와 도요히코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빈민 운동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했던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원래 첩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게다가 그는 부모님 두 분을 일찍 여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매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는 15살이 되었을 때 그의 고향 고베를 떠나서 동경으로 무작정 올라와 어느 인쇄소에 취직을 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많은 고생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20대 초반에 폐병에 걸렸지만 제대로 치료를 받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결국 의사로부터 전연 희망이 없다며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서 그가 출석하던 교회의 성도들이 찾아와서 마지막 예배까지 드려 주었습니다. 성도들이 돌아가고 난 그날 그는 밤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했습니다. 그는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찾아오는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목숨을 끊어 버리는 것이 더 남자답지 않겠는가?’ 

그러다가 그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지금 모든 희망이 사라져서 자살을 계획하고 있다. 만일 내가 믿는 예수님이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도 자살을 생각하셨을까? 그렇지는 않겠지. 그러면 예수님은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고 섬기러 오셨다고 했으니까 예수님은 분명 마지막 순간까지 섬길 자를 찾아가셨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그는 자신의 자살 계획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 남은 날까지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섬기면서 살리라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빈민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날 그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자살을 계획했던 사람이다. 따라서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이제 나는 사선을 넘어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믿음의 스승이 되는 나가노 목사님의 뒤를 이어 어려운 사람을 위해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사선을 넘어서’ 이것은 훗날 그의 유명한 자서전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그는 빈민굴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폐병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섬기다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그곳으로 찾아 간 것입니다. 그는 빈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뜨거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그들을 섬겼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건강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하루는 어떤 술주정뱅이가 그를 찾아왔습니다. 술주정뱅이는 그에게 돈을 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빙긋이 웃으면서 달라는 대로 돈을 주었습니다. 그 술주정뱅이는 그 길로 술을 사 마셨습니다. 그러더니 돌아와서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옆에 있는 사람이 그에게 이런 충고를 했습니다. ‘여보시오, 저런 몹쓸 인간에게 돈을 주는 것은 그를 돕는 것이 아니라오. 도리어 그를 깊은 죄악의 구렁텅이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이 된다오.’

그 때 가가와 도요히코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도 사람들에게 속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도 배반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같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사람들의 마음에는 비로소 작은 사랑의 씨앗이 싹트지 않았습니까?’

그는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아름답게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폐병으로 죽도록 내버려두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그리고 신학교에 들어가서 목사가 되었고 미국에 유학을 해서 프린스톤에서도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돌아오고 난 뒤에도 그는 일생토록 빈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는 7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떴습니다. 그가 머물다 간 자리에도 작은 사랑의 씨앗들은 무수히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에베소서를 읽다보면 바울의 다른 서신보다도 더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에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인간의 언어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가 사랑입니다. 모든 분야에서 ‘사랑’은 영원한 주제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강조하고 있는 단어도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보면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을 ‘더 큰 것은 사랑이라’고 번역이 될 수도 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세상도, 교회도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사랑하기를 원하고 사랑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들이 쉽게 사랑을 말하지만 사실은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 또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에베소 교회를 통해서 그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초대교회 가운데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사역했던 목회자들이 대단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였습니다. 디모데와 아볼로가 목회를 하였고, 사도 요한이 늙어서 죽기까지 시무했던 교회입니다. 그리고 요한의 제자 ‘폴리캅’이 순교한 교회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들로 보아 에베소 교회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 시무했던 교회였으며 많은 칭찬을 받는 아주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온갖 박해 가운데서도 흔들림이 없이 초대교회를 이끌어가는 기둥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이단들이 교회를 어지럽힐 때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과 말씀을 중심으로 교리적인 부분을 분명하게 정립하며 교회를 이끌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대단한 사역을 감당했던 에베소 교회에 한 가지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사랑이 식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 2장 1-4절에서 그 부분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한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 교회는 극심한 박해도 잘 참아냈습니다. 이단들이 교회들을 어지럽게 만들 때도 말씀으로 분별하며 진리를 잘 지켜 왔습니다. 그런 에베소 교회가 소홀히 한 것이 있는데 바로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아마도 어려운 상황 안에서 인내하며 혼란 중에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다 보니 정작 간직하고 있어야 할 사랑이 식어버린 것입니다. 

교회가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바르게 서기 위해서는 교리적으로 온전하게 서있어야 합니다. 교리는 교회의 뼈대와 같고, 기둥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뼈대가 잘 서 있을 때 그 어떤 이단사설에도 현혹되지 않고 순결하고 건강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뼈대가 잘 서 있다 하더라고 그 위에 살이 제대로 붙어 있지 않으면 뼈만 앙상해 흉한 몰골이 되고 맙니다. 교리적인 부분만 서 있으면 그 교리와 이론을 내세워 서로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그 안에는 옳고 그름만 있을 뿐이지 사랑의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맹목적인 사랑만 있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하지만 사랑이 없는 옳고 그른 것만을 말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에베소 교회처럼 성숙했던 교회조차도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데는 실패를 했습니다.   

우리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 나갈 때 조심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점입니다. 신앙의 연수에 의해 아는 것과 경험하는 것에 의해 교리적이고 행정적인 것은 알아 가는데 그것을 이끌어가는 진정한 힘인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랑은 교회를 살리고 사람을 살립니다. 공동체를 말씀을 중심으로 바르게 세워나갑니다.

안동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에 지역과 교회에서 후덕한 분으로 인정을 받는 구덕희 권사님이라는 분이 계셨답니다. 목회하는 가운데 교인들로 인해 목사님이 힘들어 할 때 권사님이 오셔서 ‘목사님, 교인들 꾸지람 할 때가 있거들랑 그 사람들 꾸지람 하면 시험들 수 있으니 저를 앞세우고 꾸지람 하십시오.’ 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배시간에 습관처럼 늦는 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권사님이 목사에게 왔습니다. ‘목사님 그 사람 예배 늦는 것 꾸지람 하면 시험 들어 교회도 안 나올 신앙이니 제가 저녁 예배 시간에 5분 늦게 참석할 테니 그 때 저를 불러 세우고 단단히 교육하십시오.’ 어떻게 권사님을 그렇게 할 수 있느냐 할 때 권사님은 진심으로 그렇게 해서라도 교인들 바르게 교육해야 할 것 아니냐는 것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일이 전개되어 그 후 예배시간에 늦는 교인이 줄어들게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목사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권사님은 자신이 짐을 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내가 행복을 느끼면서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주고 아픔을 준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법칙은 내가 주는 사랑을 통해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은 대부분이 자기중심의 사랑입니다. 자기를 사랑해 달라는 몸부림입니다. 내가 만족할 때, 내가 바라는 것이 이뤄졌을 때 사랑을 말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말하는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사랑을 느낄 때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 사랑이 이뤄질 때 바로 그곳이 천국이 됩니다. 사람들이 죽을 때가 되면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이 ‘-걸’이랍니다. ‘그렇게 조급하고 불안하며 악착같이 살기보다 좀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살 걸’ ‘그렇게 미워하며 싸우며 살기보다 좀 더 사랑하며 살 걸’ ‘좀 더 잘해 줄 걸’ ‘좀 더 품으면서 살 걸’

성경에서 ‘사랑장’이라 이름이 붙은 고린도전서 13장을 공동번역으로 읽어드리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 말씀을 받아 전하는 특권도 사라지고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도 끊어지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도 불완전하고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도 불완전하지만
완전한 것이 오면 불완전한 것은 사라집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어린이의 생각을 하고 어린이의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의 것들을 버렸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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