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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독교인들이 세상 살아가는 법 (눅 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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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이 세상 살아가는 법 (눅 6:1-11)

그저께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했습니다. 한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우리나라에 지금까지 여러 명의 대통령이 있었지만 아무도 독도에 가지 않았습니다. 일본 반발이 대단합니다. 충분히 예상했을 것입니다. 비난도 거셀 것이고 반대도 많을 것이다, 또 정적들은 정략적인 행동이라고 비판할 것이라고 비난할 것을 말입니다. 항상 적대자들은 있습니다. 

이러든 저러든 말 많고 비난하고 비판하는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온갖 이유를 들어서라도 비난하는 일들이 있고, 무엇을 하더라도 할 때 마다 시비 거는 일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소위 식자인양 하면서 국제 분쟁에 휘말릴 것을 우려하면서 반대하기도 할 것이라는 예상을 했을 것입니다. 

이 대통령도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습니다. 대통령 말에 따르면 취임 초부터 생각했던 것이지만 이런 저런 사유로 미루어졌다고 합니다. 심지어 정부 내에서조차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그 모든 문제와 우려에도 불구하고 독도 방문을 결정했습니다. 

지난 금요일 뉴스에 나왔을 때 정말로 방문할지 저도 좀 걱정했습니다. ‘날씨에 따라서’ 라는 말이 붙어있기에 날씨를 핑계로 또 안 갈 것은 아닌지 관심을 가지고 보았는데 독도에 가셨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왜 대통령이 이런 저런 문제와 우려에도 불구하고 독도를 방문했을까요? 대한민국의 대통령에게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의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 헌법에는 이것을 통치행위라고 기록하였는데 요즘도 그렇게 해석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법적인 말은 뒤로하고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나가야할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나라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국군통수권자입니다. 대한민국의 국군 통수권자라면 대한민국의 국군 통수권자로서 선택해야할 길이 있기 때문에 대통령은 그 길을 선택했고 실행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각자의 길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길이 있고, 어머니의 길이 있고, 남편의 길이 있고, 아내의 길이 있습니다. 교회는 교회로서 나가야할 길이 있고, 목회자는 목회자로서 선택해야할 길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자는 기독교 신자로서 나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선택하고 그 길로 나가야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 길에 대해서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고뇌하지 않는 것입니다. 너무 쉽게 인생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더 아쉬운 것은 젊은이들이 인생에 대해서 고뇌하지 않는 것입니다. 쉽게 살아가고 편하게 살아가는 것은 좋지만 그러다 정말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어떻게 감당할지 걱정스러울 때가 참 많습니다. 어떻게 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어른 들이 다 젊은이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좀 살만하다 보니 철학 없이 우선 즐기고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선택하다보니 젊은이들이 그것을 따라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고민하고 고뇌해야합니다. 특별히 기독교 신자들은 기독교 신자의 길에 대해서 고민해야합니다. 모든 일들에 깊이 고민하고 내 길은 이것이라고 판단되었을 때는 그 길로 가야합니다. 좀 어렵고 힘든 일이 있고 반대가 있다고 할지라도 또 손해 보는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가야합니다. 

문제는 손해 보는 것을 걱정하고 어려운 것을 걱정하여 그쪽을 선택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일들은 몰라서 선택하지 아니하고 어떤 일들은 알면서도 어렵고 힘들어서 선택하지 않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자들이 이 세상 살아갈 때 세상 사람보다 어려운 일들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기독교신자들에 한정된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 신자는, 참된 기독교 교회는 참된 그 길을 갈 때 어려움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요한복음 15장 19절에서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라고 아주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기독교 신자들, 참된 교회는 이 세상에 살면서도 그러나 세상에 속해져있지 않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 신자로, 참된 교회로 살아갈 때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정말로 많습니다. 각오하고 살아야합니다.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어려움을 겪어야합니다. 지금 좀 편하고 괜찮은 길을 가고 있는 분들은 그 사업을 위해서 또 그 삶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고 얼마나 많은 힘을 들여서 공부했습니까? 편하고 쉽게만 살았다면 어떻게 그런 결과를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사업하면서 그저 쉽게만 했다면 이런 결과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우리 기독교신자들은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이런 일이 있을 때, 우리 기독교 신자들은 세상 사람들과 살아가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먼저 꼭 알아야합니다.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하고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합니다. 돈 버는 것도 돈 쓰는 것도 건강 지키는 것도 아이 키우는 것, 아이 공부시키는 것도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일이 있을 때마다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합니다. 

‘긴 숟가락 나라’ 이야기가 있습니다. 긴 숟가락밖에 없는 그 나라에는 ‘지옥’이라는 마을, ‘천국’ 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두 마을 다 풍성하므로 먹을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지옥 마을 사람들은 전부 다 못 먹어서 흉측한 몰골입니다. 숟가락이 길다보니 자기 손으로는 자기 입에 숟가락을 넣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내 숟가락 가지고 나만 먹으려고 하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천국이라는 마을 사람들은 전부 다 건강하고 혈색이 좋습니다. 긴 숟가락으로 서로 먹여주다 보니 너도 잘 먹고 나도 잘 먹어 혈색이 좋고 다들 건강했던 것입니다. 긴 숟가락 마을 나라에서는 음식 먹는 방법, 세상 살아가는 방법이 따로 있었습니다. 

기독교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과는 길이 다릅니다. 따로 있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합니다. 그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 중 하나입니다. 

누가복음 6장은 시비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음모로 이어지는데 분위기가 흉흉합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밀밭을 지나가다 제자들이 시장하여 밀이삭을 손으로 비벼서 먹었습니다. 이것을 두고 당시 유대사회를 지도하던 지도자들이 비난한 것입니다. 먹는 것은 좋은데 왜 안식일에 밀이삭 비비는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 비난했습니다. 시비를 걸려고 하면 한이 없습니다. 이유가 있든 없든 상관이 없습니다. 

율법은 남의 밀이삭이라도 비비어 먹는 것을 허용합니다. 우리나라 법에 비해서 좋습니다. 우리나라 법은 이런 일이 절도죄에 들어가지만 율법은 적어도 먹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뷔페처럼 싸가지고 나오지는 못하지만 그 자리에서 먹을 수는 있습니다. 유대사회는 못 먹어서 배고픈 사람들은 그렇게 먹어도 됩니다. 그런데 사회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왜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하는지 시비를 건 것입니다.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마침 거기에 손마른 병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은 대체로 적어도 겉으로는 건강한데 혹 손이 마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그 심정을 생각해야하는데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그 심정을 생각않습니다.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어떻게 하는지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유대가 망하지 않았습니까? 유대 사회지도자들은 그때부터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지 연구하고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성경을 볼 때 관심 있게 볼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상황을 아셨습니다. 위기가 시작되는구나, 저 사람들이 평소 하는 행태로 보아서는 그냥 쉽게 넘어갈 것이 아니다, 시비 걸고 말하고 비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알고 계십니다. 어디까지 진행될 것인지도 아셨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잘 아시는 우리 주님께서 어떻게 대처하시는지 여러분들이 눈 여겨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그리스도인들,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은 이런 일이 있을 때,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에 너무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갈 때 이런 일은 자주 있습니다. 아주 심각한 위기가 올 수 있고 아주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앞으로도 뒤로도 길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본을 보여주십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는 기독교 원론으로 기도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누차 계속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기도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왜 그렇게 기도해야한다는 것을 강조하시는지 확인합니다. 우리는 들을만큼 들었습니다. 또 알만큼 압니다. 그럼에도 왜 또 말씀하실까요? 

첫 번째는 기도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 심지어 기독교 신자들 중에서도 기도에는 정말 힘이 있는지 회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정말로 새벽기도를 해야 하는가? 다른 때 하면 안 되는가? 꼭 예배당에 가서 기도해야하는가? 기도하면 무슨 효험이 있는가? 회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두 번째, 기도하는 것이 사실상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기도를 강조하고 또 강조하십니다. 그러고 또 다시 말씀하십니다. 기도해야한다고 말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은 다 일만 있으면 기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들은 위대한 신앙인들, 위대한 선배들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믿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정말로 위대한 사람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영웅 모세가 그랬습니다. 여러 가지 경우가 참 많지만 몇 가지 경우만 보겠습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으려고 산 위에 올라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잠시를 참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한 채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나 화가 나셨습니다. 그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수차례였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싹이 노란 민족이니 없애야겠다고 판단하셨습니다. 다 없애고 새로운 민족을 일으켜서 그 민족을 내 민족으로 삼겠다고 제법 강하게 작정하신 것 같습니다. 위기의 이 때, 민족의 지도자 모세는 무엇을 했는지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32:9-10) 라고 하십니다. 

이때 모세가 무엇을 했습니까?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르되’(출32:11).. 기도했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었겠지만 그 어떤 것 보다 먼저 기도였습니다. 기도하라, 또 하라, 틈만 나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이런 연유로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가나안에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열 두 정탐꾼 가운데 거의 대다수인 열 명의 정탐꾼이 부정적인 보고를 하자 이스라엘 민족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습니다. 내가 다 준비해놓았으니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셨는데도 기어이 끝까지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민족의 지도자인 모세를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화가 나셨습니다. 너무 많이 화가 나셨습니다. 그래서 이번이야말로 이스라엘 민족들을 없애야겠다고 작정하셨습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의 종 모세가 어떻게 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는데 그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가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민14:10-12)라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가 한 일을 다시 한 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민14:13)..기도했습니다. 이래서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화가 나셨지만 모세가 기도하여 그때는 일단 지나갔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정말로 화가 나셨습니다. 만약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그때 전부 다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최고의 평신도 지도자 느헤미야가 그랬습니다. 유대인인 느헤미야는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다가 바벨론 장관자리에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늘 조국에 있었습니다. 포로로 끌려올 때 나라가 많이 훼손당해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조국에 대해서 늘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날 조국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정말로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완전히 망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때 느헤미야는 여러 날 동안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나에게 혹시라도 할 일이 있으면 일하게 해주십시오.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이 가정을 이끌어 가실 때, 회사를 이끌어 가실 때 또 회사를 함께 이루어 가실 때 생각하실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습니다. 왕이 어느 날 근심어린 표정을 하고 있는 느헤미야를 불러 “느헤미야, 무슨 힘든 일이 있는가? 있으면 나한테 말해보시라.” 라고 묻습니다. 왕이 물어 대답해야할 그 찰나, 잠깐의 틈을 내어 느헤미야는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틈틈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꼭 무릎을 꿇고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이 있을 때 그때마다 그 자리에서 하면 됩니다. 전화 받을 때,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할 때, 일이 있을 그때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서른 살까지는 가정생활을 하시다 사역을 시작하시기 바로 전에 40일 동안 금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할 일이 많으셨지만 무엇보다 먼저 40일간 금식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이것으로 많은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업을 시작할 때, 일을 시작할 때 정말로 기도해야합니다. 자녀 결혼이 있을 때도 기도해야합니다. 보통 건강하지 않거나 문제 있을 때는 기도하지만 좋은 일이 있을 때에도 정말로 기도해야합니다. 40일간 기도했다는 것은 온 힘을 다하여, 생명을 바쳐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일에서도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위기가 시작됩니다. 십자가의 길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것을 잘 아십니다. 

누가복음 6장 11절에서는 ‘그들은 서로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지나 12절에서는 ‘이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냥 기도가 아닙니다. 모양만 기도가 아닙니다. 방해받지 않으려고 산으로 가셨는데 산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진짜 기도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을 말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또 십자가를 바로 앞에 두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잡혀가기 바로 전에 무엇을 하셨습니까?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혼자만 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치기 위해서 열 두 제자들 중 하나를 빼고 열한 제자들을 다 데리고 가셨습니다. 무엇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여기 앉아 있으라 나는 기도하러 갈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도 기도하라는 부탁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세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가서 정말로 죽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이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할 때 얼마나 부끄러울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얼마나 힘드셨으면,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제자들에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런 부탁을 했겠습니까?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소리를 성경은 왜 말씀하시고 목사님이 또 저런 소리를 하는가를 생각하겠지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안타까움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주님은 ‘기도 외에는 방법이 없는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에는 방법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할 것을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그 위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치료해주시고 그들을 도와주셨습니다. 정말로 많이 생각해보아야할 일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위기대응 방안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방안입니다. 기독교 식이고 기독교의 길입니다. 

위기가 있을 때,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문제가 있을 때 어떻게 하는가? 먼저 가르칠 사람을 세웁니다. 후학을 세우는 것입니다. 좋은 목회자를 골라서 세우고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잘 가르쳐야합니다. 교회학교 선생님들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교회학교 선생님에 많이 지원 하십시오.

오늘 한국 교회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런데 언제까지나 이렇게 많이 모일 것 같습니까? 예배당은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 예배당이 그냥 그대로 갈 것 같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유럽을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예배당이 술집으로 팔리고 레스토랑으로 얼마나 팔리는지 아십니까? 우리나라도 예배당이 술집으로 팔릴 가능성이 상당히 많습니다. 후학을 키워놓지 않으면, 믿음의 후손들을 키워놓지 않으면 그렇게 됩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가 잘 믿는다, 아버지가 좋은 직분이라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자녀들을 가르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분명합니다. 세상 사람은 어떠하든 간에 이 나라의 믿음이 이어지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주저앉고 맙니다. 분명합니다. 젊은 사람들을 기억하고 나중에 한 번 보십시오. 저 목사가 헛소리하는지,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 하는지 잘 보십시오. 교회학교 선생님들은 교회학교에서 학생들을 잘 가르치십시오. 정말로 중요한 일입니다. 

가르칠 때에도 정말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제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가르쳐야하는데 듣기 좋은 말, 사람들이 들을 만한 것을 가르칩니다. 교묘하게 말을 바꾸어서 사람들이 듣기 좋게 만들어서 가르치는 그건 정말 아닙니다. 정말로 제대로 가르쳐야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그 위기의 순간에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20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이런 말씀을 해보셨습니까? 교회에서 하나님의 종들이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을 들으셨습니까?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이런 말을 가르칩니까? 돈 많이 있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씀을 많이 듣지 않았습니까? 저 역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다릅니다. 21절에서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22절에서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24절에는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부자라고 다 화있다고 말씀하시는 건 아닙니다. 불쌍한 사람,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하면 나만 잘 먹고 잘 살 것인가, 이 부(富)를 어떻게 내 자식들에게, 내 후손들에게 물려줄까 이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25절에는 ‘화 있을 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라고 말씀하고 있고, 또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들에게 왜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배 부른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배고파 절절 매는 사람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내 배만 부르고 내 자식들만, 내 가족들만 배부른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웃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말도 못하고 우는 사람들, 통곡하는 사람들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30절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면’ 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대로 살아보라는 말씀을 얼마나 자주 듣습니까?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라’ 라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이 세상사는 법입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힘든 세상을 이기고 나가는 법입니다. 세상과는 다릅니다. 혹자는 ‘그것이 어떻게 사는 법이고 이기는 법인가? 지는 법이고 죽는 법이 아닌가?’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좋은 질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할까요? 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세상에서의 싸움은 우리의 싸움이 아니고 하나님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싸움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것처럼 기도하고 복음 전하고 가르치고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만 하면 일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세상 살아가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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