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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앞에서 (마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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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 (마 6:1-4)

사람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지식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가장 괴롭게 하는 지식일까요? 자기를 아는 지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위선을 하게 됩니다. ‘나’ 아닌 다른 ‘나’를 보이려고 자기를 꾸미고 장식을 하게 됩니다. 

심리학의 중요한 하나의 용어로 슈퍼아이(Super I)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모습이면 좋겠다, 혹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때 이런 모습으로 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슈퍼아이를 만들어서 그 슈퍼아이를 향해서 지향하게 되고, 그런 사람으로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사람에게는 진실된 내 모습이 아니라 내가 바라는 그런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또 자기가 그런 사람인 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인식시키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가장 괴로운 지식이 자기를 아는, 자신을 아는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우리 기독교에서 들어본다면 상당히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의 참다운 진리를 회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회피합니다. 기독교들이 당연하게 기독교의 진리를 추구하고 더 가까이 가서 알려고 노력해야하는데 상당히 많은 경우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기독교의 참다운 진리를 알게 되면 나 자신의 진면모를 알게 되고, 그렇게 되면 내가 너무 괴롭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독교의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얼마나 죄인인지, 내가 얼마나 악한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정말로 바른 삶을 사는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담이 없고 그냥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 알게 되면 괴롭습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고, 또 자꾸 주머니가 마르게 됩니다. 여기저기 일하다 보니 힘이 부치게 되고 피곤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의식적으로 또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의 참된 진리를 멀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참된 진리의 말씀보다는 그렇지 않은 말씀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일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이 분명하게 알 것은 우리에게는 그 고통이 있어야합니다.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우리에게는 그런 고통이 있어야합니다. 그래야지 내가 내 인생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내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알고 주님께 달려가게 됩니다. 주님의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 갈 이유를 가지지 않습니다. 그대로 살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꼭 갈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도 편안하고 힘든 것도 없기 때문에 그냥 살면 됩니다. 여기서 바로 소위 ‘기독교의 오류’라는 큰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데도 이상하게 그곳에 기독교의 진리가 없는 문제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많은 사람들,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조차 진리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그 고통이 있어야합니다. 주님 앞에 나오면, 예배당에 나오면 물론 평안도 위로도 얻을 수 있고 얻어야하겠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위로보다는 질책이 많습니다. 가슴 때리고 가슴 아프게 하고 가슴 찌르게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에도 위대한 하나님의 종, 예수님의 출생을 기다리던 사람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눅 2:34-35/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피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더 가까이 가야합니다. 괴로워야합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모를 때는 괜찮았습니다. 자기는 상당히 괜찮은 사람, 잘 하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진리를 알고 난 후부터는 자기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게 된 그 다음에 온 것이 참된 만족과 깊은 감사였습니다. 

로마서 7장 15절에서 사도 바울은 엄청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 혼자만의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기독교의 진리의 말씀입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롬7:15).. 자기는 잘 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7:16-21).. 

바울은 스스로 자기에게는 악이 전혀 없는 것으로 생각했고 정말로 선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적어도 자기는 인정해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알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 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 라고 탄식합니다. 그러다 드디어 감격 속으로 들어간 것이 25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고뇌하고 고민하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께 갔더니 괴로움은 많았지만 거기에 참된 진리와 행복이 있더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원리가 균형 즉 밸런스(balance)입니다. 이 밸런스가 맞아야하는데 열성적인 기독교인들은 신비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체로 교회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신비에 치우치는 경향이 다소 있는 반면에 이성적인 기독교인들은 논리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목사님 설교를 듣고도 저것은 옳은 말씀이고 저것은 아닌 것 같다, 이것은 저 목사님이 세상 물정을 모르기 때문인 것 같다는 등 논리적으로 분석을 합니다. 그런데 둘 다 올바른 신앙은 아닙니다. 균형을 갖추어야합니다. 신비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논리도 있어야합니다. 

기독교 신학자 중 위대한 신학자 중 한 사람인 칼 바르크가 한 말,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들라’, 너무나 지당한 말 같습니다. 열심히 믿는 사람들 같으면 성경만 들면 되지 다른 것이 무엇이 필요 있겠냐고 말하겠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손이 두 개 아닙니까? 또 다른 손에는 신문을 들라는 말입니다. 세상도 보고 성경도 보아야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한 예가 오늘 본문 1절의 말씀에 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의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라는 1절의 말씀은 자칫 성경을 쭉 이어서 읽어오던 사람들이 갈등을 가지기 쉽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앞장인 5장 16절에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착한 행실을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라고 한 것인데, 이렇게 하려면 내가 착한 행실 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보아야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오늘 본문 1절에서는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라고 말씀합니다. 전혀 다른 성경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조화시켜야합니까? 여기에 필요한 것이 균형입니다. 이 둘을 동시에 다 해야 합니다. 착한 행실을 해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기독교는 저것이구나, 정말로 예수님을 제대로 믿게 되면 저런 사람이 되는구나, 그리고 기독교회는 사실은 참 좋은 것만 가르친다는 것을 알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애쓰면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어려운 말씀입니다. 도대체 안 보이고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가? 착한 행실을 보이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라고 하면서 보이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성경에는 이런 말씀이 참 많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기독교인들에게 철저히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은 사람들과 함께, 세상과 함께 살면서도 그러나 사람들 앞에, 세상 앞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 얼굴 앞에서 사는 사람이다.’ 라는 인식입니다. 이 인식이 있어야합니다.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할 때에도 그 사람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생각해야합니다. 사람을 보면서도 그 뒤에, 그 위에 계신 하나님을 볼 줄 아는 신앙을 가진 사람, 이런 사람 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좋게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서, 나에게 좋은 인식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저 사람은 좋은 기독교인이다, 훌륭한 사람이다, 대단한 사람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자기만족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의식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경향이 있는 것과 함께 기독교인들 중에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끄러움과 죄송함을 가지고 스스로 정직하게 보아야할 것은 상당히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칭찬보다는 사람의 칭찬을 더 좋아하는 경향입니다. 이것은 저 자신도 마찬가지임을 너무나 자주 느낍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정말로 하나님께서 좋아하실지 생각하는 것보다는 여러 사람들이 동의하고, 여러 사람들이 찬성하고, 여러 사람들이 괜찮게 생각하는 의견일까를 생각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죄송하고 부끄러울 때가 참 많습니다. 

물론 그 둘이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같다고 할지라도 순서는 항상 먼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어라고 생각하실까? 이것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아니면 하나님의 얼굴이 무거우실까? 이것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 결과로 사람들이 좋아한다면 좋고,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결국 ‘하나님을 위해서 살 것인가? 나를 위해서 살 것인가?’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어쩌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보다는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의 기쁘심보다는 자기만족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인,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하나님을 위해서 삽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된 기독교인들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얼굴 앞에서 살아간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예배드리는 이 순간에도 성령 하나님께서 내 옆에 계시면서 내가 진짜로 예배드리고 있는가 아니면 쓸데없는 딴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보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저 사람을 하나님의 종으로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도 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참된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압니다, 내가 아무리 옳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달리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두렵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늘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나 하나님께서 나와 다른 생각을 하면 어떻게 하나? 내가 100% 옳다고 생각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면 어떻게 할까?’ 늘 이것 때문에 고민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는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는지, 하나님께서 다윗을 왜 그렇게 좋아하셨는지는 시편 139편 1절부터 10절까지 한 다윗의 고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였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항상 나를 보고 계신다 그리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신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도 늘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시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셨으면서도 지금은 인간의 몸으로 계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당신 입으로 친히 했던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요한복음17장 6절에서 주님께서는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라고 기도하십니다. 예수님 당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냈다는 말씀입니다. 

8절에서는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이 땅에 잠시 인간의 몸을 입었다고 해서 그렇게 사셨습니다. 이 땅에 인간으로 계시는 동안은 예수님 당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께 주신 말씀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26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라고 고백하십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참된 기독교인들은 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당신 자신을 위해서 산 적이 없었고, 자신을 드러내신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지향해야할 모습, 삶의 자세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늘 자신을 숨기고 하나님만 드러내고 하나님 뜻만 나타내려고 하고 하나님 주신 말씀만 전하려고 애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기원합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십시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마지막에 한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다 이루었다.’ 

여러 가지 의미가 많겠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 뜻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바, 그 중에서 가장 큰 것, 당신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는 이것을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진실한 기독교인을 지향하고 참된 기독교인이 되기 원하고 그렇게 사는 것을 소원하면서도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이 정말로 힘듭니다. 참 어렵습니다. 세상 살다가 불리한 일을 당할 때가 많고 손해 볼 때가 많고 괴로움을 당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아주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힘들고 괴롭고 손해 본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살면 거기에는 보상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반드시 있습니다. 보상이라고 하니 좀 덜 고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보상이 있습니다. 기독교에는 보상의 원리가 확실하게 있습니다. 

기독교 최고의 가르침이 팔복입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하시는 여덟 가지의 모든 것에 보상이 따르지 아니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맨 처음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는데 그 복은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는 보상을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에 위로를 받을 것이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배부를 것이다,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을 볼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전부 다 보상이 따르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100%는 아닐지라도 만약 여러분의 삶 가운데 이런 하나님의 은총이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면 좀 괴롭다고 할지라도 그 까닭이 무엇인지 한 번 고뇌할 필요는 있습니다. 혹시 나에게 잘못된 것이 있지는 않는지 제대로 고뇌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된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가르침대로 어려움 당하고 손해를 보았다면 반드시 보상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모세가 그랬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 모세에 대해서 히브리서 11장 24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를 ‘상 주심을 바라본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기독교란 말씀입니다. 그저 희생이 즐거워서 하는 것만이 기독교의 핵심인 것은 아닙니다.

성경 역사상 평신도 지도자가 가운데 최고의 지도자가 있습니다. 느헤미야입니다. 느헤미야는 정말로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많은 수고와 희생을 했습니다. 바벨론의 장관급인 느헤미야가 폐허가 된 조국으로 돌아와 많은 수고를 했고 자기 나라를 위해서 개인재산을 많이 썼습니다. 그리고 난 후 어떤 기도를 했는지 함께 보겠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렇게 수고한 후 하나님께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느5:19)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역이 끝나고 난 후 한 기도가 있습니다. 이때 느헤미야는 ‘내가 이와 같이 그들에게 이방 사람을 떠나게 하여 그들을 깨끗하게 하고 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열을 세워 각각 자기의 일을 맡게 하고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느13:30-31) 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주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인간으로 계셨던 그 기간 동안에 기도하셨는데, 예수님의 중보기도장인 요한복음 17장을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4-5)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다른 사람보다는 조금 더 손해를 보아야합니다. 힘이 좀 들어야합니다. 세상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불쌍한 사람을 위해서 조금 더 수고해야합니다.

아실만한 분은 아시겠지만 앞으로 나라 경제는 그렇게 썩 좋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너무 잘 지냈습니다. 너무 많이 누렸습니다. 그것이 정상이 아닙니다. 앞으로 이런 경제상황은 계속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독교인들이 이 일을 위해서 많이 노력해야합니다. 먼저 우리 기독교인들이 모든 일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덜 가지고 있지만 더 많이 내놓아야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필요한 것이 더 많이 있지만 내 필요를 뒤로 하고 이웃을 돕고 나라를 더 챙기고 생각해야하는 사람들이 바로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러나 그 선한 일들, 선한 행실을 남이 모르게 하십시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물론 자기 자신도 모르게 하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2절과 3절에서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른손이 했는데 왼손이 어떻게 모를 수가 있습니까? 이 말씀의 의미는 그런 일을 할 때 아예 잊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어버린다고 하나님께서도 잊어버리실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최후의 심판 과정이 마태복음 25장에 나옵니다. ‘여러분, 참 고맙습니다. 참 수고 많았습니다. 복 받으십시오.’ 라고 말했을 때, 당사자들은 다 잊어버리고 잘 한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잊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때 우리 주님은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10:4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한 것을 나는 다 기억한다고 말씀하시며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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